PART 1 그대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인생시계 : 그대의 인생은 몇 시인가? | 그대의 열망을 따라가라 | 너라는 꽃이 피는 계절 | 네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 때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 그대 그리고 고시 : 안정에 성급히 삶을 걸지 마라 | 아직 재테크 시작하지 마라 |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라 |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 | 슬럼프
PART 2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시련은 나의 힘 |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 그 한 사람이 그대의 커다란 바다다 | 사랑 따윈 필요 없어 2.0 | 내 안의 혁명 : 프리다 칼로 이야기 | 내 인생의 오답노트 | 누구나 지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늙은 때다 | 죽도록 힘든 네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염원이다 | 치열한 꿈꾸기 | 이별, 그 후
PART 3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심삼일 당연하다, 삶의 방식이란 결심이 아니라 연습이니까 | 혼자 놀지 마라 | 그대의 선생을 찾아가라 | 비린 듯 산뜻한 잉크 냄새로 아침을 맞으라 | 글은 힘이 세다 | 네 이웃의 지식을 다양하게 탐하라 | 29,220피스의 퍼즐 |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 대하여 | ‘카르페 디엠’ 사용법 | 그대 생활의 라임은 무엇인가? |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재수를 시작한 너에게
PART 4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네가 내린 결정으로 삶을 인도하라 |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 찌질이 ‘알파’들 | 대학은 그대에게 결승선인가, 출발선인가? | 스펙이 아닌, 그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라 | 20대, 돈보다 중요한 것 | 우리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 일단 기차에 올라타라 | 교정을 나서는 그대에게 | 인생의 정점을 생각하다
역시 목차의 주제글들만.. 제목만 봐도.. 밀리언 셀러가 되는 이유를 알겠다..
이 글은 .. 하루 아침에 이뤄진게 아니다..
김난도(48) 서울대 교수가 쓴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가 19일 오후 100만부를 돌파했다. '한국 출판사상 최단기간 밀리언셀러 진입' 기록이다. 이날 김 교수는 서울 마포구 홍대앞 주점에서 이 책의 열혈독자인 20~30대 5명과 만나 양은 술잔에 막걸리를 부었다. 베스트셀러 저자와 독자가 만난 축하연인데, 현장 분위기는 눈 밝은 삼촌이 삶에 지친 조카들을 격려하는 자리 같았다. 독자의 고민과 김난도 교수의 답으로 구성했다.
―지방대 졸업하고 상경해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됐다. '아프니까…'의 제목만으로 '내 얘기다' 싶었다. '남들은 20대에 외제차 타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할까' 고민했다.
"학생들은 다 영업직을 기피한다. 나는 '사람 만나는게 너무나 싫은 경우만 아니라면 영업이 중요하다'고 한다. 야전 사령관을 거쳐야 참모총장 되지, 의무장교·법무장교·정훈장교가 그 자리 가나. 모든 비즈니스는 영업이 핵심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팔아야 진짜 영업이다. '오기로 버틴다'고 이를 갈지 말고, '사람에 대해 배우겠다'는 목표를 갖기 바란다. 어느 고깃집 주인이 '학생 오면 질 나쁜 고기를 많이 주고, 여자끼리 오면 좋은 고기 소량에 다른 반찬을 많이 준다'고 해서 감탄했다. 고기 맛이 아니라 사람을 아느냐가 핵심 아닐까."
―부모님은 교사가 되라고 하시지만 진짜 꿈은 '역사 공부'다.
"대부분 부모는 보수적인 판단을 한다. '살아봐라. 별거 없다. 정년보장 되는 직업이 최고'라 한다. 하지만 나는 선생이니까, 각자의 내면에서 최선을 끌어낼 수 있는 길을 권하고 싶다. 제가 태어나던 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87달러였다. 하지만 부모가 살아온 시간과 여러분의 미래는 다르다. 내 아들도 새벽 2시에 일어나 게임을 하더라. 좋아하면 자꾸 하고, 자꾸 하면 잘하게 된다."
―소위 '지잡대'(지방 무명 사립대) 출신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명문대 학생들이 "나는 대기업 가는 게 당연하다"는 글을 띄워 무섭고 슬펐다.
"서울대 나온 서울대 교수가 이런 말 하기 쑥쓰러운데…. 우리 사회에서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 중요하니까. 다만 여러분 생각만큼 중요하진 않다. 취업할 땐 학벌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뒤엔 성격 좋고 일 잘하는 사람이 승진한다. 서울대 발전기금 낸 분 중엔 서울대 안 나온 사람이 훨씬 많다. 편입·유학 등 속된 말로 학벌을 '세탁'하느니 차라리 '내 학벌 좋지 않다' 받아들여라. 그 대신 더 노력해라.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중에 어떤 일을 택해야 하나' 묻는 사람이 많은데, 아마도 제가 여러분에게 (성우 배한성씨 목소리를 흉내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렴'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난 그런 말 안 한다. 그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지금 하는 일에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는 '핑계'가 되선 안 된다."
―교수님들이 "어차피 디자인으로 먹고살 사람은 너희들 100명 중 3~4명에 불과하다"고 해서 반발심이 들었다.
"광고회사 임원 친구가 면접 시험에서 인문대 나온 지원자에게 '자네는 인문대 나왔군' 했더니 그 지원자가 황급히 '제가 비록 인문대를 나왔지만…' 했다더라. 씁쓸하지. 철학이건 문학이건 건축이건, 꼭 그걸로 밥 먹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와 젊은이에게 위로가 아닌 '쓴소리'를 한다면?
"우리 기업은 기존 직원들을 밤늦도록 혹사시키면서 그들에게 복지혜택을 집중한다. 그러지 말자. 기존 직원은 좀 더 놀아야 한다. 근로부담을 줄이는 대신 생산성을 올리고, 부족한 노동력은 청년 신규 채용으로 풀어라. 386세대는 '분단 때문에 여친과 헤어졌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문제까지 몽땅 체제에 돌렸다. 반면 요즘 20대는 구조적인 문제들까지 개인적인 결함 탓이라 자책한다. 거리에 나와 시위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성세대만 탓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결국 사람의 속내는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지금.. 당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당신은 모든걸 다줄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사귀도록 해야 한다. 근본이 나쁜자들을 멀리하여야 한다.
사람의 감정은 비슷하여 결국 같이 있다보면 정이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현실이나 이성적인 문제에 마주치면..
결국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버릴 것은 버려야지.. 어중간하게 행동하다간..
모든걸 잃게 된다..
문제가 생기면 우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도를 생각하고
챙길것과 버릴 것을 분명해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버릴 것에는... 그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어 자신이 손해를 보는 선에서 일을 끝내야 한다.
..
이미 문제가 되었다면 작은 손해를 아까워해선 안된다..
A씨는 최근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변사체의 신원이 남편으로 확인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A씨는 2개월 전 남편을 간통 혐의로 고소했고 이혼 소송을 냈는데, 남편은 경찰의 소환 조사를 앞둔 상태였다.
A씨는 5년 전 직장 선배의 주선으로 남편을 만났고, 그의 능력과 원만한 성격에 마음이 끌렸다. 결혼 후 1년 만에 아이를 낳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명문대 의대에서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서울 근교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실력도 있는데다 남다른 친절로 병원엔 많은 환자들이 몰렸다.
그런 남편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서울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 선배는 남편에게 주점에 투자하면 높은 이익을 나누어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남편은 술집에 큰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대학 선배가 보장한 투자 이익은 지켜지지 않았다. 남편이 확인해보니 그 대학 선배는 도박의 늪에 빠져 사채업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그 주점을 인수하게 되었다. 영업은 잘 되는 편이었다.
이 술집은 접대부들을 불법 고용한 업소였다. 남편은 직접 주점을 운영할 수 없었고 대신 영업을 맡을 '마담'을 별도로 고용했다. 남편은 낮엔 병원에서, 밤에는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마담'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A씨는 어느 날 남편의 휴대전화를 몰래 검색했다. A씨는 남편이 '마담'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남편 모르게 '마담'을 만나 남편과의 관계를 따졌다. 그런데 이 '마담'은 태연하게 "오래전부터 연인 관계였고 현재는 임신 중"이라면서 오히려 A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A씨는 분노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따졌다. 남편은 '마담'의 임신과 이혼 요구가 의외였는지 매우 당황해했다. 남편은 그날 저녁 '마담'을 만나 가정을 지키겠다며 낙태를 요구했다.
이번엔 '마담'이 분노했다. 헤어지는 대가로 술집을 주지 않으면 병원에 악소문을 내고 불법영업을 신고하겠다고 남편을 협박한 것이다.
남편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A씨는 남편으로부터 '마담'을 떼어내기 위해 남편과 '마담'을 간통 혐의로 고소하고 남편을 상대로 한 이혼소송을 떠올렸다. 형사처벌을 두려워 한 '마담'이 남편에게서 스스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마담'은 병원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고, 그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병원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마담의 신고로 술집까지 단속을 당해 문 닫을 처지에 놓였다. 지금껏 좌절을 모르고 살아왔던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A씨는 '마담'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도 이참에 혼나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간통 고소를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A씨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어이없는 자살이었다.
2.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다니던 B씨는 고시 공부를 하는 오빠 뒷바라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결심했다. B씨는 친구로부터 ‘스폰만남’에 관해 듣고 해당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한 남성 회원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이 남성은 대가로 가짜 금팔찌를 준 뒤 달아났다. B씨는 ‘스폰만남’에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고생하는 어머니 -->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 성관계를 가졌다..
대가로 금팔찌를 받았다.. --> 알고 보니 가짜였다.. -->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
ㅋㅋ
이게 무슨 논리야?
어머니가 고생한다고 돈벌려고 성관계를 했다. 니....
지가 성관계를 한게 왜 어머니 탓이 되는 걸까?
..
그리고 가짜 금팔찌를 안 받고 대신에 돈을 받았다면..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
그녀들은 불법 성매매를 한 공범자나 미수에 그친 자들이다.
그런 성매매 공범의 이야기를 마치 피해자의 진술인듯.. 그리고..그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논리에 대해 별다른 여과 없이 글을 올린 것은.. 어떤 합당한 이유에서 돈 벌기위해 성매매하는 것을 괜찮고, 당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이유가 된다고 보는 걸까?
검찰 조사 결과 이씨 등은 “한 달에 300만∼500만원을 지원할 남성을 스폰서로 소개해주겠다”는 말로 여성들을 꼬드긴 것으로 드러났다. 카페 회원으로 가입한 여성은 대부분 20, 30대로 명품 구입이나 성형수술비 마련을 위해 스폰서를 원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교사, 항공기 승무원도 있다.
검찰, 운영자 등 2명 기소… 네이버·다음, 100여곳 폐쇄
[세계일보]#1. 지방의 한 방송사 리포터 A(26·여)씨는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성상납’을 한 후배한테 자리를 빼앗긴 뒤 ‘스폰만남’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시절 주위에서 “어떤 애들은 스폰서를 끼고 방송가에서 승승장구한다”는 말을 들었던 A씨는 ‘스폰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하지만 막상 남성 회원으로부터 성매매 제안을 받자 곧 선택을 후회하고 카페에서 탈퇴했다.
#2.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다니던 B씨는 고시 공부를 하는 오빠 뒷바라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결심했다. B씨는 친구로부터 ‘스폰만남’에 관해 듣고 해당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한 남성 회원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이 남성은 대가로 가짜 금팔찌를 준 뒤 달아났다. B씨는 ‘스폰만남’에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검찰이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업 중인 ‘스폰카페’를 일제 단속했다. 스폰카페는 스폰서를 구하는 여성을 회원으로 끌어들인 뒤 남성과 성매매를 알선하는 곳으로 ‘이색알바’, ‘애인대행’ 등 용어로 여성을 유혹한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김희준)는 스폰카페 개설자 이모(43)씨와 회원 김모(26)씨를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고 18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스폰카페 여성 회원 81명에게 “성상납을 할 스폰서와 연결해주겠다”며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카페에서 만난 여성에게 “스폰서를 소개받기 전에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면서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이씨 등은 “한 달에 300만∼500만원을 지원할 남성을 스폰서로 소개해주겠다”는 말로 여성들을 꼬드긴 것으로 드러났다. 카페 회원으로 가입한 여성은 대부분 20, 30대로 명품 구입이나 성형수술비 마련을 위해 스폰서를 원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교사, 항공기 승무원도 있다.
검찰은 수사 직후 네이버, 다음 등에 스폰카페 폐쇄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네이버, 다음은 각각 관련 카페 57개, 61개를 사실상 폐쇄하고 ‘애인대행’, ‘조건만남’, ‘스폰’ 등 키워드를 금칙어로 정해 접근 자체를 봉쇄하도록 했다.
피부의 윤기는 사라지고.. 핼쓱해진 그의 모습..
그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긴 하지만..
분명 군대는.. 힘들다..
그렇다면 군대를 어떻게 하면 면제받을 수 있을까?
..
솔직히 편법은 없다.. 기대했던 분들은 돌아가시라.. -ㅅ-;
하지만, 정상적으로 면제가 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문제는 그에 대한 무지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준비를 못한 경우엔..
안가도 될 군대를 가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군대면제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증빙자료가 없다면 그 사유를 인정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대장에 염증이 생겨 평생동안 고생하고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염증성 장질환인 궤양성 대장염, 크론씨병 같은 경우에도..
그가 미리 내시경을 하여 진단을 받고 꾸준히 치료를 하여 진료 차트의 기록을 남겼다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무지나 개인 사정으로 병원진료를 보지 못했다면... 그는 몸이 힘들어도 우선은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젊은 사람들 중에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병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하고 치료하도록 노력하면서..
그것이 군대 면제와 관련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면제가 될 수 있다면.. 면제가 되도록 노력하도록 하자.
17세에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로 시작해
현재 98개 국에 진출한 프레드릭 드루카 서브웨이 회장(64)
"원래 제 꿈은 의학 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친구인 피터 벅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습니다. 샌드위치 사업에 흥미를 느낀 저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사업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3학년 때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서브웨이를 확장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
우리나라에도 한때 석봉토스트가 붐이 일었으나..
이제는 쉽게 찾아보길 힘들다..
무엇의 차이일까?
VS
암튼..
가장 안전하고 괜찮은 사명감의 길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그는.. 아마도 의사가 되었더라도 돈을 잘 벌었을 것이다.
뉴욕의 그라운드제로에선 지난 9 · 11 테러 때 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 재건 공사가 한창이다. 트레일러에 매달려 공중에 떠있는 노란색 컨테이너가 눈에 띈다. 샌드위치 전문점 '서브웨이' 매장이다. 서브웨이는 지난해 6월 컨테이너 안에 55.74㎡ 규모의 가게를 열었다. 이 가게는 공사가 진행되는 층과 같은 높이로 매달린다. 매층 공사가 진척될 때마다 서브웨이 매장도 한 층씩 올라간다. 인부들이 땅에 내려가지 않고도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황당한' 위치 선정은 후발주자로서의 전략이었다. 서브웨이는 맥도날드 KFC 등 경쟁업체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이 지역에 점포를 열고 브랜드 홍보 효과를 노렸다. 이런 적극적인 마케팅전략에 힘입어 후발주자임에도 불구,3만4000여개의 매장을 가진 세계 최대의 패스트푸드 체인이 됐다. 지난해 매출은 152억달러에 달했다. 17세에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로 시작해 현재 98개 국에 진출한 프레드릭 드루카 서브웨이 회장(64)은 '간소한 운영체계,프랜차이즈 노하우,건강한 컨셉트'를 성공 비결로 꼽았다.
▼KFC보다 22년 늦은 1974년에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는데,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은 뭐였습니까.
"점포를 낼 때 전통적으로 '명당'인 곳은 물론이고 남이 쳐다보지 않지만 독특한 자리에는 꼭 입점하려고 했습니다. 쇼핑몰이나 대학,놀이공원,공항,컨벤션센터 등 프랜차이즈라면 누구나 원하는 곳에 서브웨이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들이 제대로 된 음식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도 간판을 걸었습니다. 공사장,유람선,세탁소,고등학교 등입니다. "
▼남들은 못하는데 서브웨이가 점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뭡니까.
"서브웨이는 모든 재료를 기름에 튀기지 않기 때문에 주방에 복잡한 설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맥도날드와 KFC 등 경쟁자에 비해 입지를 선정하는 데 제약이 줄어듭니다. 또 개점 비용과 운영 비용이 적게 들어 가맹점주를 모집하기도 수월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 노동력도 적게 들죠."
▼경기를 너무 타지는 않나요.
"패스트푸드업종은 침체기에도 잘 버티는 편입니다. 소비자들이 저렴하면서도 가치 있는 제품을 찾기 때문이죠.중요한 것은 가치입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또 침체기는 프랜차이즈 운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직장인들이 사업 기회를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브웨이는 운영 방식이 간단해 경기 침체의 수혜를 입기도 했습니다. "
"가맹점주는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본사의 매뉴얼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기업가로서 스스로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본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이를 적극 장려하고 전체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본사의 역할입니다. "
▼어떻게 가맹점주와 소통하고 있나요.
"음성메일이나 이메일소식지 비디오 개별미팅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죠.컨설턴트들은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매장을 방문해 가맹점주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의견을 듣습니다. 또 가맹점주와 개발대행업체 컨설턴트들과 회의도 자주 엽니다. 그들의 사업에 대한 관찰과 제안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가맹점주의 아이디어를 전사적 캠페인으로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는 5달러짜리 '6인치 풋롱 샌드위치'였다. 2004년 마이애미의 한 가맹점주가 미끼상품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 메뉴의 인기가 높아지자 본사는 2008년 불황기에 전사적 캠페인으로 확장했다. 서브웨이는 5달러짜리 샌드위치만으로 38억달러의 매출을 올렸고,그해 전체 매출은 17% 늘었다. )
▼'건강' '신선'을 모토로 내건 배경은 뭡니까.
"1965년 코네티컷주 브릿지포트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시작했을 때부터 건강과 신선은 우리의 중요한 컨셉트였습니다. 1974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면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방이 적은 살코기와 신선한 야채를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빵에 들어가는 소금 함량도 평균 15% 줄이기로 했습니다. 고품질과 식품안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는 우리의 모토입니다. "(서브웨이 메뉴 중 일부는 지방성분이 6g 이하다. 맥도날드 '빅맥'의 지방함량이 30g인 것에 비하면 20% 수준이다. )
▼건강 컨셉트가 다양성을 저해하진 않을까요.
"현재 서브웨이에서 재료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메뉴는 200만개에 달합니다. 또 우리는 맛과 영양의 균형을 고려해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선보인 아침식사 프로그램인 저지방 오믈렛 샌드위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
▼17세에 창업을 했는데요.
"원래 제 꿈은 의학 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친구인 피터 벅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습니다. 샌드위치 사업에 흥미를 느낀 저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사업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3학년 때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서브웨이를 확장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
▼'제2의 서브웨이'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소비자의 만족과 직원의 성장에 집중하세요. 사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고객'을 벌어야 합니다. 또 직원은 당신의 대표자이자 모든 고객과의 접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 17세에 창업을 하면서 경험도 배움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습니다. 실수는 모두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쳐지게 마련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관점이란 것에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사실은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
북한에서 온 망명자들의 빈곤한 삶에 대한 한계레 신문의 한 기사를 보았다.
한국서 17년 ‘발버둥’…“지금은 떠날 생각뿐” 그들의 땅은 어디에 다시 러시아로, 차라리 북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게 꿈, 정부지원책은 울분만 남겼다
..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는 옛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7년동안 노력했지만.. 빈민으로 산다면
뭔가 분명 문제가 있긴한데..
한국의 빈곤은 구조적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국의 빈곤은 대물림된다. 자녀까지 저학력·저소득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중간에.. 기자가 삽입한 이 대목은..
기자의 자기 생각이며, 그가 전제로 생각하고 있는 오로지 그의 생각이다..
다른 나라의 빈곤은 구조적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꼭 노력한다고 부자, 아니.. 중산충이라도 될 수가 되는가?
사회구조.. 민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일 뿐이 이 기자의 생각은..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
쉽게 생각해보자.. 다음을 보자..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하지만.. 매번 반에서 뒤에서 1-2등을 해..
시험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도 대게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할때.. 그 '열심히'의 개념이 공부잘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놀고, 잘것은 다 자고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열심히 노력한다. 반면에 공부잘하는 학생은 우선 공부에만 매진하고 열심히 한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공부못하는 학생의 문제는 이 사회나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학생의 공부방법이나 태도의 문제일 따름이다..
공부방법에 대한 방법론적인것은.. 옛날과는 달리 TV, EBS , 인터넷에 보면 아주 잘 나와있다.. 누구든 그 방법을 잘 실천만 하면 우등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우등생이 되는게 아니다..
.....
탈북자들의 빈곤에 대해서 접근할때는
솔직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나 궁금증이 있어야 헀다..
정말 그들은 빈민층인가? 컴퓨터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고 집도있는데..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번 돈을 어떻게 모으고 관리하였는가? 그런 수단이나 방법에 문제가 있진 않았나?
또는 17년동안 고생해서 돈을 얼마나 모으고 어떻게 썻는가?
도대체 그들을 얼마만큼 지원해야 하는가? 그들이 만족할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그들을 호위호식하게 돈을 대주어야 하나?
..
정작.. 그들이 정말로 가난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언급없이..
기자는 그냥 한국의 구조적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다..
그들이 미국이나 외국으로 가면.. 잘살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나마의 경제적인 지원도 없을텐데, 또 인종차별은 더 심할텐데....
한계레 신문.. 이 기자의 성향은.. 분명 반사회적이고 부정적이다.
그 스스로도 불행할 수 밖에 없겠지만..
언론에 몸담은 그가 토해 내는 부정적인 역겨움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제말 좀 긍정적이고 균형적인 사고를 갖길 바란다.
“안되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든지….” 앞뒤의 말들을 뺴고 이 글만 올린 기자의 불순한 의도가 궁금하다.. 정말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길 바란다..
한국서 17년 ‘발버둥’…“지금은 떠날 생각뿐”
그들의 땅은 어디에
1994년 북 벌목공, 망명 수용
북·중·러 반발속 정치적 활용
국내 탈북자 현재 2만918명
1994년 8월22일, 대한항공 924편은 모스크바를 출발해 김포공항을 향했다. 깜박 잠든 한철길(52)씨를 옆자리 탑승객이 깨웠다. “텔레비전에 당신 사진이 나와요.” 기내의 작은 화면에서 한씨는 제 얼굴을 보았다. “현재 모스크바를 출발한 한씨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말했다. 낮 12시35분, 공항 입국장에서 한씨는 취재진의 수많은 플래시에 둘러싸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한씨는 러시아 벌목장 출신 탈북자다. 1985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삼림지역에서 일했다. 그는 영화기사였다. 벌목장을 다니며 영화를 틀었다. 장사도 했다. 벌목장 밖에서 담배 등을 구해 벌목공에게 팔다가 북한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1986년, 27살의 한씨는 벌목장을 탈출했다. 8년 뒤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는 ‘러시아 벌목공’으로 소개되어 기자회견에 나섰다. 당시 러시아 벌목공(출신 탈북자)은 북한의 인권유린을 웅변하는 존재로 통했다.
한국 생활은 올해로 17년이 됐다. 그 세월 동안 한씨는 사무직, 건설현장 막노동, 식당 점원, 다단계 판매원, 옷장사 등을 거쳤다. 북한 실태에 대한 강연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 어느 아파트 단지의 전기기사로 일한다. “돈 없으면 지옥 같은 이 나라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발버둥 끝에 한씨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냥 (한국을) 떠날 생각뿐입니다.”
탈북 1세대인 한씨는 2만여명에 이르는 국내 탈북자의 처지를 웅변한다. 지난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국내 탈북자 경제활동인구 10명 중 1명은 실업 상태다. 취업 경험이 있는 탈북자의 63.4%는 한 직장에 1년 이상 다니질 못했다. 80.4%는 근로소득액이 150만원 이하다. 탈북자는 한국 사회 최하층을 이룬다. 성공적 정착자가 없지 않지만 매우 드물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대표되는 탈북 1세대의 실패를 다른 탈북자들도 따라 걷고 있다.
»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해 1994년 한국에 온 한철길(52)씨가 광복절인 지난 15일 서울의 한 아파트 전기관리실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으로 떠나려는 탈북자 최진선(가명·47)씨가 지난 7일 경기도 자택에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아이의 장래를 걱정해 미국에 가려는 탈북자 장희순(가명·44)씨가 지난 16일 경기도 자택에서 딸이 영어 공부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부터)
2011년 3월 현재, 국내 거주 탈북자는 2만918명이다. 탈북자의 국내 입국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2006년부터는 매해 2000~3000명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 탈출한 북한 주민들이 그 서막을 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북한과 러시아는 벌목협정을 맺었다. 러시아는 영구 동토의 혹독한 환경에서 벌목 작업을 할 노동자가 필요했고, 북한은 외화수입이 필요했다. 그 절정기인 80년대, 연해주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은 2만~3만명에 이르렀다.
70년대 한국의 중동 건설 노동자에 비견되는 북한 벌목공들은 90년대 이후 난관에 부닥쳤다. 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고 인플레가 심해지자 북·러 당국이 벌목공 규모를 축소했다. 예전 같지 않은 벌이와 감원에 불만을 품은 북한 벌목공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94년 초, 한국의 보수언론이 북한 벌목공이 지내는 합숙소 등을 “인권유린의 수용소”라고 보도했다. “과장된 증언”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김영삼 정부는 작업장을 나와 떠도는 벌목공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북핵 관련 남북 긴장이 높아지던 때였다. 북한은 “(벌목공의 망명을 허용하면) 납치로 간주하겠다”며 반발했다. 러시아는 “망명을 원하는 북한 벌목공이 러시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른 나라의 개입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94년 5월, ‘망명자’ 신분으로 북한 벌목공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국내적으로는 ‘북한의 인권유린’이 사회의제로 부각되는 동시에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대외적으로는 한-러, 남북 관계 모두 경색되면서 한반도 주변에 긴장이 흘렀다. 김영삼 정부가 탈북자를 ‘정치적 카드’로 활용해 남북대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때부터 북한 주민들에겐 ‘북한 탈출-러·중 체류-한국 입국’의 탈북 경로가 생겼다. 북-중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탈북부터 한국 입국까지 안내하는 브로커가 등장했다. 한국 선교단체·보수단체들도 중국 동북 지역에서 탈북자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입국한 벌목공들에게 임대아파트와 정착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해줬다. 1994년은 탈북자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잉태된 시기였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 벌목장에서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한철길(52)씨의 지난 17년은 한국 거주 탈북자의 실상을 웅변한다.
한씨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는 ‘기획 탈북’의 그림자가 있다.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 삼림지역에서 일했던 한씨는 1986년 벌목장을 탈출했다. 그 뒤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연해주 등을 떠돌았다. 93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고려인 아내를 만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탈출 이후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배경에는 한국 대사관이 있다. 94년 초,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씨를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나한테 ‘한국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입국 이후 탈북자의 첫 임무는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일이다. 입국 직후 한씨는 다른 벌목공과 함께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에 나갔다. 한씨의 첫 직업은 통일부 홍보 강사였다. 대학과 경찰서를 다니며 전쟁 대비책을 강연했다. “원고는 경찰이 써주고 1시간에 10만원을 받았는데, 따라다니는 형사 2명의 밥값을 계산하면 5만원 남더라고요.”
입국한 탈북자에게 한국 정부는 정착 지원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한다. 극빈층에 준하는 지원이다. 풍요로운 삶을 기대했던 탈북자들은 종종 실망에 빠진다. 입국 당시 한씨는 15평 임대아파트 보증금 900만원과 정착금 300만원을 받았다. 한씨는 정착금으로 중고 텔레비전과 밥그릇을 샀다.
탈북자들의 고민은 취업 직후부터 본격화된다. 그들은 한국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감을 느낀다. 직업학교에서 자격증을 딴 한씨는 한국전력공사에 취직했다. 동료들은 회식 자리에 한씨를 부르지 않았다. “저 사람은 스파이”라며 숙덕이는 소리도 들었다. 한씨는 취업 4년여가 지난 2000년에 사표를 냈다. 함께 직업학교에 다니며 자격증을 딴 탈북자 19명에게 연락해봤다. 그들 역시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상태였다.
달리 기댈 곳 없는 탈북자들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돈이 필요했던 한씨는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일자리를 줬다. 한달에 50만원을 받고 교인들 앞에서 북한 실태를 얘기했다. 교회는 더 큰 일을 요구했다. 러시아에 선교사로 나가라고 했다. 한씨는 교회 일을 그만뒀다.
탈북자들은 결국 몸으로 돈 버는 생활을 시작한다. 한씨는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사무직 일을 하고 싶었지만, “북에서 왔다”고 하면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착실히 돈 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탈북자들은 종종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진다. 어느 날 한씨에게 낯선 이가 찾아왔다. 러시아 수출용 의류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또다른 이는 다단계 판매를 권했다. 한씨는 ‘판매에 성공한 탈북자’로 소개되어 다단계 판매 회사의 강사로도 일했다. 수백만·수천만원이 오가는 일에 잘못 연루되어 한씨는 고소를 당했다. 결국 사기죄로 감옥까지 다녀왔다.
숨가쁜 17년이 보람 없이 지나가는 동안, 담당 형사의 소개로 만난 한국인 아내와도 멀어졌다. 이제 아파트 단지 전기 기사로 일하는 그는 제 인생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자꾸 치민다. “친척이 있어요, 동창이 있어요? 워낙 바닥부터 시작하지, 비빌 데는 없지…. 외톨이가 되니까 점점 폐쇄적이 되고, 한국 사람이 볼 땐 별거 아닌 걸로도 상처 받고….”
얼마 전, 한씨는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1994년 입국 당시 한씨는 다른 벌목공 8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연락 닿는 이들에게 어찌 지내는지 물었다. 그들은 시골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거나, 아파트 쓰레기 수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더라고요. 오래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요.” 한씨는 쓰게 웃었다.
정착금 등 줘도 극빈층 수준
차별·경쟁 심해 적응에 실패
‘빈곤 대물림’ 사회에 절망감
한국 거주 탈북자의 ‘누적된 실패’는 2000년대 중반부터 탈북자의 제3국행으로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가족 탈북’이 있다. 초기에는 혈혈단신 탈북이 주를 이뤘다. 이후 ‘나홀로 탈북자’들이 북한의 가족·친척을 한국에 데려왔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2세도 태어났다. 자녀를 둔 탈북자들은 밑바닥 인생을 오래 인내하지 않는다.
장희순(가명·44)씨는 9살 딸을 위해 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일찍 깨친 (탈북자) 엄마들은 애 데리고 2007년 무렵부터 영국에 많이 갔어요. 거긴 북한 사람에 대한 색안경도 없고 차별도 없고 그렇게 좋다고 그래요.” 요즘은 영국 망명이 힘들다. 그래서 미국을 택했다. 내년에는 출국할 생각이다. “우리야 한국에서 고생하며 몸으로 때울 수 있지만, 아이들까지 그럴 순 없어요.”
이 대목에 이르러 한국 거주 탈북자의 고민은 한국 빈곤계층의 처지와 겹친다. 한국의 빈곤은 구조적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국의 빈곤은 대물림된다. 자녀까지 저학력·저소득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출신이 섞인 탈북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최진선(가명·47)씨는 2002년 탈북 직후 중국에서 조선족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딸을 업고 타이를 거쳐 2007년 한국에 왔다. 한국 국적을 얻은 뒤 중국의 남편을 초청했다. 최씨에겐 북한에 있던 시절 결혼해 낳은 아들도 있었다. 2009년, 1200만원을 들여 북에 있던 19살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남편, 탈북하여 중국 생활을 경험한 아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북한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모여 가족을 이뤘다. 남편과 아내는 둘 다 몸이 아프다. 빈곤계층에 지원하는 최저생계비 130만원으로 한달을 산다. 자녀들 역시 한국의 경쟁적 교육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러시아로, 차라리 북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게 꿈
정부지원책은 울분만 남겼다
러시아 벌목공 논란 이후인 1997년, 한국 정부는 ‘북한이탈주민 보호·정착 지원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정했는데, 자립·자활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을 둔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 “워낙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한철길씨의 울분은 정부 지원책의 실제 효과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 하층의 바닥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한다.
한씨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게 꿈이다. “안되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든지….” 체념한 표정으로 한씨가 말했다. 최진선씨는 미국에 있는 탈북자 친구에게 전화 거는 일로 요즘 바쁘다. “거기 가면 나 같은 아줌마도 월 300만원은 버는 것 같아요.” 최씨의 꿈은 미국에 가는 것이다. 17년 전, 러시아 벌목공에서 비롯한 탈북의 행렬은 ‘다국적 탈북자’ 가족 시대를 거쳐 미국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이 진화인지 퇴화인지 구분해주는 전문가를 취재 내내 만나지 못했다. <끝>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 최진선(가명)씨의 부모는 모두 북한에 있다. 지난 2009년 아버지 칠순 잔치 직후 어머니는 최씨에게 보낸 편지에 북녘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동봉했다.
마치며 한결같이 불안정한 삶…얼굴 노출 원치 않아
6월 중순 짧은 외신 기사를 봤다. “미국에서 탈북자가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정이 궁금해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미국·캐나다 등 각국 정부의 자료를 살폈다. 생각보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이 아닌 제3국에 머물고 있었다. 국내 거주 탈북자 및 관련 단체를 만나고 해외 탈북자 협회, 탈북자 지원 단체, 선교 단체, 변호사를 접촉했다.
7월 말, 국내 거주 탈북자, 한인 선교단체 등을 통해 소개받은 탈북난민 및 탈남 탈북자를 미국 현지에서 만났다. 기사에 등장하는 탈북자를 직접 만난 것은 물론 이웃 탈북자, 선교단체, 한인회, 한인 교회, 한인 가게, 현지 기자 등을 만나 사실 관계를 재차 확인했다. 열흘 동안의 현지 취재 이후에는 전화·전자우편·인터넷 메신저 등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 인권 및 탈북자 문제는 이념에 속박된 쟁점이다. 취재 전반에 걸쳐 이념의 틀을 벗어나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탈북자 문제를 다루려 애썼다. 인권은 소외·억압당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의 삶은 극적이고 다양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불안정했다.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이웃 탈북자의 부러움을 받는 이들조차 사회적·경제적 곤란을 호소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북한·중국·미국 정부와 교회를 필두로 하는 주변 한인의 시선에 민감했다. 익명을 쓰는 등 그들의 신분을 최대한 가렸으나, 기사에 등장한 어느 탈북자는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도 (신분 노출로 이어질까) 걱정된다”고 연락해왔다.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 기사 아니냐는 몇몇 독자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살기 힘든데 그 정도 지원을 받고도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반응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반면 탈북자들을 돕고 싶다는 국내외 독자의 문의는 계속되고 있다.
김현희 -"김대중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짜'로 만들고 온갖 의혹을 부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을 뒤집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그때 나는 바깥 활동을 일절 안 하고 있었고, 딸이 막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기자 질문―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현희 -"좌파 정권이 만든 국정원(김대중 정부 이후)에서는 보호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도망쳐나온 내게 방송에 출연하라고 했다.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라고."
기자 질문―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선 궁금해했다.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지 않은가?
김현희 -"내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공작원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짜'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북의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KAL기 폭파 사건을 우리나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표적을 거꾸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비열한 공작의 나팔수처럼 된 방송 프로에 어떻게 나갈 수 있나. 국정원이 MBC 'PD수첩'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마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의구심을 자아내고 의혹설을 제기하였던 오늘날 일부 세력들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아기까지 키우면서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김현희가 미ㅊㄴ이거나..
..
아님.. 이 자유민주주의의 남한 땅에는 자기는 정작 북한에 가서 살기를 거부하면서도..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이 꽤나 많은가 보다.
그들은 과연 지금의 자신들이 과거의 김현희처럼 통일 대업을 위한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지난 정권서 겪은 고초는 죄업에 대한 업보라 생각하나?
"나는 로봇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인간이다"
그때 바레인에서 죽었어야 - 미인이라 동정론?
北이라면 내게 돌 던졌을 것… 유족들 격려 덕분에 인간성 조금씩 회복
115명 숨진 테러를 정치적 이용 - 노무현정부, 나를 '가짜'로 몰아
방송출연 거부하자 거주지 노출, 국정원 보호도 못받아… 관련 직원들 처벌 대신 승진
"정말 배신이었다! 등에 칼을 꽂는 것과 같았다. 자기들 말 안 듣는다고 나를 노출했다. 자기들이 직접 나를 손댈 수는 없고 북한에서 와서 나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49)씨는 우리 기억 속의 얼굴은 아니었다. 길 가다 만났다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날아오던 KAL 858편이 공중폭발했다. 미얀마 근해 상공(上空)이었다. 탑승자 115명 전원이 숨졌다. 대부분 열사(熱砂)의 땅에서 일하다 3년 만에 귀국하는 중동 근로자였다. 이들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 김현희씨는 “KAL기 폭파 때만 해도 나는 통일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 미모의 폭파범은 이제 중년이 돼서, 지난 정권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고 있었다. 목청을 높이다가 울먹이곤 했다. 흥분할수록 북한 억양이 살아났다.
"김대중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짜'로 만들고 온갖 의혹을 부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을 뒤집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그때 나는 바깥 활동을 일절 안 하고 있었고, 딸이 막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좌파 정권이 만든 국정원(김대중 정부 이후)에서는 보호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도망쳐나온 내게 방송에 출연하라고 했다.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라고."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선 궁금해했다.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공작원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짜'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북의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KAL기 폭파 사건을 우리나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표적을 거꾸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비열한 공작의 나팔수처럼 된 방송 프로에 어떻게 나갈 수 있나. 국정원이 MBC 'PD수첩'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당시 여론 분위기에서 국정원의 고충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부하니까, 국정원에서 내 남편을 불렀다. '정 그렇다면 방송 출연은 하지 말고 국정원 안에서 신부님들(KAL기 폭파 사건은 안기부 조작 사건이니 재수사하라고 서명운동을 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을 지칭)을 모셔놓고 설명회를 갖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바로 그 시각에 MBC 'PD수첩'팀이 내 거주지로 들이닥쳤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고 한밤중에 집을 나와 피신해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의 취재는 자유롭다. 당신은 뉴스 메이커였으니, 적극적인 취재를 나무랄 순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의 최고 보안(保安) 사항은 거주지 노출이다. 황장엽 선생에게도 북한이 테러하겠다고 암살단을 보냈고, 이한영(김정일 처조카)도 거주지 노출로 살해됐다(1997년).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경찰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내 거주지를 노출해 버린 것이다."
―언론 매체가 당신을 수소문해 취재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국정원에서 정보를 흘려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보호해야 할 사건의 '증인'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아이를 업고 나와 어디 가나. 허름한 단칸방에서 지금 9년째 그렇게 살고 있다."
―KAL기 유가족 중 일부도 당신을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민과 노동자의 정부라면서 중동 근로자들의 희생을,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했다. 사제단이 앞장서 그런 여론을 조성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성경책이 발견돼도 대역죄고 가족이 멸절한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그런 정권을 옹호하고,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사건을 남한이 했다고 뒤집어씌우니, 과연 그들은 사제복을 입고서 정말 하느님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외국에 이민 갈 것을 권유받았다고 들었다.
"국정원 직원이 와서 직접 그렇게 말했다. 2년쯤 나가 있다가 오라고. 나를 보호하던 관할 경찰서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라'고 협박했다. '우유를 마시지 마라 (우리가) 독약을 넣을 수 있다, 신문을 보지 마라 탄저균을 넣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세놓은 가게에는 영업을 못하도록 법원의 빨간 딱지를 붙여놓았다. (눈물을 흘리며)내가 말을 다 못하겠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들어갔다. 당신은 한 번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보통 뱃심이 아니다.
"숱한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근본을 훼손하고 다른 목적을 가진 조사에는 응할 수 없었다. KAL기 폭파 사건의 모든 자료는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 내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초동수사 때 급하게 하느라 약간의 오차가 있었지만 나중에 정정 확인됐다. 이들은 지엽적인 오류 몇 개를 갖고 트집 잡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렇게 해도 사실은 달라질 수 없다. 과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2007년 10월). 그런 결론을 내리고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사과하라는 권고 한마디 없었다."
―지난 정권이 왜 그렇게 했다고 보나?
"이 사건을 뒤집으면 이전의 군부와 우파 세력이 도덕적으로 타격받는다. 정치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본다.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명단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들었다(2008년 10월 해제)."
―지난 정권에서 겪은 고초는 당신이 저지른 죄업에 대한 업보(業報)라는 생각은 없나?
"그것은 내 개인의 고통 문제만이 아니다. 115명이 숨진 테러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말살하고 유가족을 속이는 범죄 행위다."
―지난 정권 시절의 국정원이 그랬지, 지금의 국정원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니….
"그때 공작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는 대신에 승진했다. 국가관도 안보관도 없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KAL기 폭파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과도 관련 있다. 당시 희생된 근로자 중 현대건설 직원이 60명 이상이었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을 뒤집으려는 범죄에 대해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게 한심하지 않은가."
―당신은 자신을 살인범으로 받아들이나, 아니면 체제의 희생양으로 받아들이나?
"나는 북한 정권의 로봇, 도구가 된 것이다. 자동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그렇게 했지만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봤다. 그전까지는 상상도 안 해본 상황이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했을까. 정말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됐다. 나를 이렇게 도구로 만든 김일성·김정일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근로자들도 희생됐고, 나도 그렇고 내 가족도 희생이 됐다."
―서글픈 얘기지만 당시에도 사건의 본질보다 당신의 미모가 더 화제가 됐다. 세간에는 TV에 나온 당신 모습을 보는 순간 "살려줘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었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북한이라면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졌을 텐데…."
그녀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보름 뒤 특별사면(1990년 4월 12일)됐다. 그녀를 살려둔 것은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테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역사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증언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고, 베일에 싸였던 일본인 실종 사건이 북한 납치극으로 드러나 일본 열도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축복인가 지옥인가?
"당시 바레인 공항에서 우리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준비한 독약 앰풀을 깨물었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났을 때 참 괴로웠다. 지난 정권에서도 죽고 싶었다. 내가 큰 죄인이지만 나를 살려준 것은 '증인'이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지켜야 하는…."
"안기부 수사관에 내가 청혼… 결혼 허가에 2년"
"집 전화·휴대전화도 없어… 엄마 과거 잘 모르는 두 아이,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그녀는 특별사면 뒤로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다.
"귀순자에게는 국가보조금이 나오지만 나처럼 검거된 사람에게는 그게 없었다. 안기부에서 살아갈 방도를 위해 책을 쓰라고 권했다. 그렇게 잘 팔릴 줄은 생각 못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나?
"출판사와 상의해서 그 제목을 했지만 내 마음이 좀 들어가 있었다. 어릴 때 공작원으로 선발돼 혁명가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당시 유족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많이 울었다. 유족들은 '마음고생 많이 했다. 잘 살아라'고 격려해줬다. 그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진심으로 그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가?
"그때만 해도 나는 통일을 위한 혁명가였다. 폭파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혁명가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으면서, 재판정에서 유족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해 갔다. 내가 한 짓이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닌 큰 범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1997년 말 당신을 담당하던 전직 안기부 수사관과 결혼했다.
"내게는 안기부의 안가(安家)가 제2의 고향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수사관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근무지가 바뀌면 떠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나. 홀로서기를 해야 하지 않나. 사회적응을 위해 먼 친척 집에서 잠깐 살아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는 나보고 수녀(修女)가 되라고 권하기도 했다. 결혼은 못 할 줄 알았다. 바깥의 누구를 대놓고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에게 결혼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때 나로서는 고민이 많았다. 김현희씨와 결혼하면 안기부라는 직장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안기부에서도 보안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안기부의 결혼 허가가 나는 데 2년쯤 걸렸다"고 말했다.
―결혼 생활에서 무엇을 꿈꿨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시골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바깥에 나서지 않고. 지난 정권 전까지 그렇게 살고 있었다."
―5학년 아들과 3학년 딸을 두고 있다고 들었다. 자녀는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나?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매스컴에 나고 하니까 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다."
―동네에서 학부모들끼리 어울리는 기회는 있나?
"그런 모임에 나간 적이 없다. 동네에서 혹 나를 알아보는 주민들이 있을지 모르나, 일부러 만나는 경우는 없다."
―아이들이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나?
"놀러오기 어렵다. 경호원도 있고."
―당신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기를 원하나?
"평범하고 자유롭게." 사생활에 관해 그녀의 말은 짧았다. 그녀 부부는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없다.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경호원을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 이번 인터뷰 때는 4명의 경호원이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