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는 그의 인물만큼이나 집안 배경이 근사합니다. 말하자면.. '엄마 친구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공부는 그렇게 잘 못했기 때문에.. 엄친아라고 부르기엔 좀 애매합니다.
차인표는 12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서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의 형은 서울시 전체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할 정도의 수재고 막내 동생 또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형이 공부를 제일 잘했고 그 다음이 동생, 나는 반에서 20등 정도로 제일 못했다" "그런데 지금 사는 거 보면 내가 제일 잘 산다. 형이 제일 못 산다"
그의 큰형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삼성SDS 상무로 재직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형도 엄청난 연봉을 받을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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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의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적이란 것에 목매어 사는 오늘날의 학부형들과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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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성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주 성적이 좋다고 해도.. 그길로 가서 끝까지 오르면..
그냥 안정적인 직장에 도달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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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걸 해서.. 성공하는 인생.. 차인표씨는 잘 사는 것을 가지고 빗대어 이야기 했지만..
아마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후두암으로 34㎏이 된 어머니가 3남 1녀 앞에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 죽을란다. 느들 두고 어떻게 죽나." 어머니는 죽었다. 중3 차남이 목수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돈 있었으면 안 죽었어예. 아부지 능력이 없어 어무이가 죽은 기라예."
부산 에서 건강식품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주기영(41) 대박물산 사장의 이야기가 모 신문에 실렸습니다.
나도 가난함을 조금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기영 사장이 경험한 고통은.. 생각지도 못해봤습니다.. 가난때문에..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삶을 연명하지 못한다면..
정말 견디기가 쉽지않을 것 같습니다..
6년 전 돌아가실 때 '아부지, 감사합니다' 했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했어요." 그는 "아버지는 잡초처럼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철없을 땐 그걸 몰랐다. 어머니가 죽은 뒤 그는 고1~2를 폭풍처럼 보냈다.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며 "넷 중에 하나는 대학에 가야지" 했다. 4남매 중 위로 둘은 이미 공장에 다녔다. 반에서 10등 하는 주씨가 부산대 건축과에 합격해 건축가가 되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다. 주씨는 빈정거렸다. "어무이도 못 살렸으면서 무슨 돈으로 나를 대학 보냅니까." 아버지는 주먹을 날렸다.
고2 겨울방학 때 그는 대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공고 졸업하고 공장 다니는 형이 8만원을 쥐여줬다. 그 돈으로 40일간 길에서 라면 끓여 먹으며 부산 집에서 어머니 고향인 강원도 평창까지 여행했다. 동상 걸린 발로 절룩절룩 외가 친척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그는 "그때 내 마음속엔 '친척 중 하나라도 진심으로 나섰다면 어머니가 수술 한번 못 받고 죽진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이 있었다"고 했다. 가난한 외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 울었다. "니도 살아봐라. 딸자식이 객지에서 죽는데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겠나. 사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으로는 .. 마음 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사랑으로 너 자신을 키워서..그들 전체를 품에 안아야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너와 나를 키우는 마법같은 힘 입니다.
후두암으로 34㎏이 된 어머니가 3남 1녀 앞에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 죽을란다. 느들 두고 어떻게 죽나." 어머니는 죽었다. 중3 차남이 목수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돈 있었으면 안 죽었어예. 아부지 능력이 없어 어무이가 죽은 기라예."
슬레이트 지붕이 이어지는 부산 문현동 산동네에서 자란 그 중3 차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힘으로 중소기업을 일궈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에 개인 돈 1억원을 입금했다. 부산 에서 건강식품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주기영(41) 대박물산 사장이 이 모금회의 개인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의 100번째 회원이 됐다.
↑ [조선일보]주기영 대박물산 대표와 부인 김경아(맨 왼쪽)씨는 부산 문현동 산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이들은 고2 때 뒤에 보이는 판자촌 옆 공동묘지에서 미래를 약속했다. 부부는 은선(16)·영훈(14) 남매에게 “아빠·엄마는 좋은 일 할 테니 너희도 너희 힘으로 성공하라”고 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 [조선일보]주기영 대박물산 사장
아너소사이어티는 2008년 출범한 국내 첫 개인 고액 기부자 단체. 본지는 작년 9월 연재한 '자본주의 4.0 2부―나누는 사람들'에서 당시 회원 49명을 전수(全數) 조사해 이들의 기부 동기(動機)와 사연, 성공 스토리를 집중 조명했다. 이들이 역경을 딛고 돈을 벌어 남을 돕는 이야기들이 알려지면서 이후 사흘에 한 명꼴로 회원이 늘어 5개월 만에 회원 100명을 넘어섰다. 한양대 예종석 교수는 "기부자들의 감동적 스토리는 한마디로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부자일수록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자기를 키워준 사회에 보답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한국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9일 부산에서 만난 주씨는 무허가주택·점집·복집·부침개집·구멍가게가 올망졸망 남아있는 산동네를 지나 회사로 올라가면서 "저 아래가 초등학교 때 살던 셋집(20㎡·6평), 저 위가 신접살림 차린 옥탑방…"이라고 설명했다. "방 얻을 돈이 없어 아버지가 식구들 살던 집에 옥탑방을 손수 지어줬어요. 6년 전 돌아가실 때 '아부지, 감사합니다' 했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했어요." 그는 "아버지는 잡초처럼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철없을 땐 그걸 몰랐다. 어머니가 죽은 뒤 그는 고1~2를 폭풍처럼 보냈다.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며 "넷 중에 하나는 대학에 가야지" 했다. 4남매 중 위로 둘은 이미 공장에 다녔다. 반에서 10등 하는 주씨가 부산대 건축과에 합격해 건축가가 되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다. 주씨는 빈정거렸다. "어무이도 못 살렸으면서 무슨 돈으로 나를 대학 보냅니까." 아버지는 주먹을 날렸다.
고2 겨울방학 때 그는 대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공고 졸업하고 공장 다니는 형이 8만원을 쥐여줬다. 그 돈으로 40일간 길에서 라면 끓여 먹으며 부산 집에서 어머니 고향인 강원도 평창까지 여행했다. 동상 걸린 발로 절룩절룩 외가 친척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그는 "그때 내 마음속엔 '친척 중 하나라도 진심으로 나섰다면 어머니가 수술 한번 못 받고 죽진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이 있었다"고 했다. 가난한 외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 울었다. "니도 살아봐라. 딸자식이 객지에서 죽는데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겠나. 사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씨는 "그 여행을 통해 '이게 내 인생'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했다. 대학을 포기한다고 인생을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부산에 돌아온 그는 친구들이 대학 갈 때 1t트럭을 몰고 두부와 생선을 팔았다. 액세서리 좌판도 펴고, 지게차도 몰았다. 고관절 이상으로 의병제대한 뒤 1993년 월세 8만원에 반 평짜리(1.6㎡) 가게를 얻었다. 달팽이 엑기스 3통, 영지차 20통 놓고 시작한 장사가 지금은 하루 수백 가지 품목이 1만개 이상 들어오고 나가는 유통업체가 됐다. 부산 곳곳에 창고만 다섯 채다.
이렇게 장사를 키우기까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사기를 당해 몇 년 걸려 모은 돈 7000만원을 떼이고, 바닷가에 혼자 앉아 소주를 마셨다. 옷과 구두를 벗고 물에 들어가다가 세찬 파도에 휘말려 몸이 가라앉았다. 저도 모르게 살려고 버둥거렸다. 그는 간신히 기어나와 물을 토하고 엉엉 울고 이튿날 다시 장사를 나갔다. 몇 달 뒤 IMF 외환 위기가 왔을 때 그는 소액 기부를 시작했다.
부인 김경아(42)씨는 "남편이 집에 월 70만원 가져오면서 매달 10만~15만원씩 소녀 가장을 도왔는데, 한 번도 아깝지 않았다"고 했다. 이달 초 "모금회에 1억원 내기로 했다"고 했을 때도 남편은 그랬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영훈(14)군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오늘 도덕 시간에 아너소사이어티에 대해 배웠는데 아빠가 한다는 게 그거지? 아빠 어렸을 때 못살았다면서? 아빠가 영 달리 뷔네."
안철수는 과거의 성공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결단의 순간, 특히 의사 가운을 벗고 벤처기업을 세울 때는 "반년 정도를 고민했다"면서 자신이 정한 `결단의 세 원칙'을 소개했다.
첫번째 원칙 : "과거를 잊자" "특히 실패보다는 성공한 경험을 경계하라. " "한번 자그마한 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놓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결정을 하게 돼서, 결국은 마음이 약해지고 과감한 결단을 못 내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정말로 객관적으로 인생에 중대한 결정을 할 때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두번째 원칙 : "주변 사람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 "부모님, 친구 등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단기적인 방법과 장기적인 방법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원하는 길을 가게 되면 당장은 좋지만 만약에 본인이 행복하지 않은 경우라면 오래갈 수 없다"
그러면서 "정말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면 우선은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자연적으로 주위 사람들도 결국에는 이해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라며 장기적인 방법을 권유했다.
세번째 원칙: `미래의 결과에 미리 욕심을 내지 말 것' 결과에 대해 먼저 욕심을 내고 결과만 갖고서 생각하다 보면 판단을 그르치기 싶다.
안 원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은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겠다는 환상은 없으며, 이름은 남지 않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든지 뭔가 바람직한 제도가 생긴다든지, 제가 만든 조직이나 일이 남는다든지 하면 제가 살았다는 흔적이 남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나? 이런 이야기들은 항상 년말이나 년초에 사람들이 반성을 하거나 새로운 계획을 짤때 항상 등장하는 이야기다.
성공에 대해서 아주 잘 정리된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그리고 최근에 8번째 습관을 이야기 하면서 가 공부하여 정리한 결론을 제시하였다.
습관 1. 주도적이 되라 (개인 비전의 원칙) 습관 2. 목표를 갖고 행동하라 (개인 리더쉽의 원칙) 습관 3. 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개인 관리의 원칙) 습관 4. 상호 이익을 추구하라 (대인 관계 리더쉽의 원칙) 습관 5.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공감적 커뮤니케이션의 원칙) 습관 6. 시너지를 활용하라 (생산적 협조의 원칙) 습관 7. 심신을 단련하라 (균형적인 자기 쇄신의 원칙) 습관 8. 내면의 소리를 찾고, 다른 사람들도 내면의 소리를 찾도록 고무하라
최근에 최지성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이 한 말은 위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결국 같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스마트(Smart)’하게 일하라." .
삼성에서 이야기하는 ’워크 스마트(Work Smart)’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 효율적인 경영시스템과 조직문화를 구축이 전재 - 개인의 삶과 업무를 균형 있고 스마트하게 관리 --> 업무 의욕을 높인다. - 창조적 조직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 - 개개인이 자신의 분야에서 프로가 돼 가치 있는 일에 집중 - 자기계발은 물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한다.
결국, '우선적으로 하라'는 말이나 '관리', '집중'이란 말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런 것이 중요한 세부사항이라 한다면..내 생각에 그보다 근본적인 중요한 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믿음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우선 '믿음'이 전제 되어야 한다. 답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믿고 그것을 꾸준하게 실천하고 실행한다면 어느새 성공이 눈앞에 다가올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와 자기계발서에 현혹되지 말고 요전에 읽었던 자기계발서중 하나만을 골라집어들고 다시 읽어보고.. 그 내용 그대로 실천해보자.. 물론 스티븐 코비의 책도 참 좋다. 우리 함께 믿고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