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대표 양승석)가 국내 최초이자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자동변속기용 공회전 자동 엔진 정지 시스템(모델명 AT ISG)'이 33주차 'IR장영실상'을 수상했다.
이 제품은 차량의 운전상태를 스스로 인지해 차량이 정차 중일 때는 자동으로 엔진을 일시 정지하고, 출발할 때는 자동으로 시동이 걸리도록 하는 공회전 제한장치(Idle Stop and Go)다.
32개월에 걸쳐 52억2000만원을 투자해 개발한 이 제품은 공회전 때 엔진을 정지시켜 배출가스를 줄이는 한편 연료 낭비를 방지해 정체가 심한 도심을 달릴 때 연비 개선율이 10~30%에 달한다. 회사 측이 친환경 고연비 엔진제어시스템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ISG는 세계적으로 환경ㆍ연비 규제가 강화되면서 향후 자동차 기본기술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연구팀은 "자동 엔진정지시스템을 적용한 자동차는 연비가 17.5㎞/ℓ로 일반 사양의 16.5㎞/ℓ보다 ℓ당 1㎞ 이상 더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연비 및 CO₂규제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친환경 엔진정지 시스템이 독자 기술로 개발돼 향후 기술경쟁력 확보뿐만 아니라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함께 수입차 가운데 수동변속기 모델에 주로 ISG가 장착돼 있다는 점에서 자동변속기 차량을 선호하는 국내 시장에서 국산 차량이 우위를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회사 측은 최근 북미와 국내의 자동변속기 장착 준중형 차량 분야에서 최고 연비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이 제품은 내구성도 좋아 배터리 채용 수명이 2배 이상 향상됐고 시동소음도 크게 줄었다.
회사 측은 "자동변속기용 공회전 자동 엔진정지 시스템의 표준화된 개발 프로세스로 자동차 300만대를 기준으로 연간 3억6000만ℓ, 금액으로는 1884억원의 절감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 주최 : 매일경제신문사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 후원 : 교육과학기술부
[이유진 기자]
그러나.. 일회용 커피는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있지요..
그래서 하루에 많이 마시게 되면 엄청난 칼로리를 섭취하게 되고.. 그로 인해 건강도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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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원두커피, 원두를 간 커피를 보관하기 위한 유리용기, 물통, 원두분쇄기, 그리고 커피메이커.. 그리고 추가로..필요한 여과지..
원두는 대형마트 가면 팝니다. ㅋㅅㅌㅋ에 가서.. 3만원주고 모닝커피용 원두를 샀습니다.
보관용기는.. 집에서 쓰던 유리병을 쓰면되구요.
커피분쇄기는 스타벅스 같은 커피판매점에 가면 팝니다. 옥션에서 2-3만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커피메이커는.. 솔직히.. 드립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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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원짜리.. 에스프레소머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가격도.. 2-3만원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커피필터도 마트에 가면 100-200장 단위로 살수 있습니다. 몇천원정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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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만원 정도로 준비가 됩니다...
생각보다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들진 않습니다...
요즘 별다방커피가 거의 밥 한끼 가격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죠..
저렴한 가격에 향기롭고 구수한 커피를 여러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간츠라는 만화는..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점점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스토리..
이미 애니화 되었고.. 영화화도 되었다..
그 간츠의 작가..
오쿠히로야의 이야기다..
그는 그의 아이디어가..
대박을 칠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대박이 났고..
..
어째서.. 그는 그의 아이디어가 대박이 날줄 알고 있었을까?
그건.. 그가 이미 만화세상에 대해서 전문가? 오타쿠적인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즉, 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을 팔아봤기 때문에..
그런 현실적인 돈이되는 개념에 대해서도 감을 잘 잡고 있었다..
(그는 간츠 이전에 이미 몇개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대박을 노린다면 오쿠 히로야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그건..우선.. 전문가나. .오타쿠가 되어 .. 한 분야에 대해서 빠듯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다음으로 그걸 이용해서 실제로 뭔가를 시도해봐야 한다는 점이다..즉,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
요즘.. 로또에 대한 광풍이 불고 있는데..
로또 살돈으로 만화책이나 한권 빌려보도록 하자.
PART 1 그대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인생시계 : 그대의 인생은 몇 시인가? | 그대의 열망을 따라가라 | 너라는 꽃이 피는 계절 | 네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 때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 그대 그리고 고시 : 안정에 성급히 삶을 걸지 마라 | 아직 재테크 시작하지 마라 |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라 |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 | 슬럼프
PART 2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시련은 나의 힘 |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 그 한 사람이 그대의 커다란 바다다 | 사랑 따윈 필요 없어 2.0 | 내 안의 혁명 : 프리다 칼로 이야기 | 내 인생의 오답노트 | 누구나 지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늙은 때다 | 죽도록 힘든 네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염원이다 | 치열한 꿈꾸기 | 이별, 그 후
PART 3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심삼일 당연하다, 삶의 방식이란 결심이 아니라 연습이니까 | 혼자 놀지 마라 | 그대의 선생을 찾아가라 | 비린 듯 산뜻한 잉크 냄새로 아침을 맞으라 | 글은 힘이 세다 | 네 이웃의 지식을 다양하게 탐하라 | 29,220피스의 퍼즐 |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 대하여 | ‘카르페 디엠’ 사용법 | 그대 생활의 라임은 무엇인가? |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재수를 시작한 너에게
PART 4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네가 내린 결정으로 삶을 인도하라 |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 찌질이 ‘알파’들 | 대학은 그대에게 결승선인가, 출발선인가? | 스펙이 아닌, 그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라 | 20대, 돈보다 중요한 것 | 우리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 일단 기차에 올라타라 | 교정을 나서는 그대에게 | 인생의 정점을 생각하다
역시 목차의 주제글들만.. 제목만 봐도.. 밀리언 셀러가 되는 이유를 알겠다..
이 글은 .. 하루 아침에 이뤄진게 아니다..
김난도(48) 서울대 교수가 쓴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가 19일 오후 100만부를 돌파했다. '한국 출판사상 최단기간 밀리언셀러 진입' 기록이다. 이날 김 교수는 서울 마포구 홍대앞 주점에서 이 책의 열혈독자인 20~30대 5명과 만나 양은 술잔에 막걸리를 부었다. 베스트셀러 저자와 독자가 만난 축하연인데, 현장 분위기는 눈 밝은 삼촌이 삶에 지친 조카들을 격려하는 자리 같았다. 독자의 고민과 김난도 교수의 답으로 구성했다.
―지방대 졸업하고 상경해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됐다. '아프니까…'의 제목만으로 '내 얘기다' 싶었다. '남들은 20대에 외제차 타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할까' 고민했다.
"학생들은 다 영업직을 기피한다. 나는 '사람 만나는게 너무나 싫은 경우만 아니라면 영업이 중요하다'고 한다. 야전 사령관을 거쳐야 참모총장 되지, 의무장교·법무장교·정훈장교가 그 자리 가나. 모든 비즈니스는 영업이 핵심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팔아야 진짜 영업이다. '오기로 버틴다'고 이를 갈지 말고, '사람에 대해 배우겠다'는 목표를 갖기 바란다. 어느 고깃집 주인이 '학생 오면 질 나쁜 고기를 많이 주고, 여자끼리 오면 좋은 고기 소량에 다른 반찬을 많이 준다'고 해서 감탄했다. 고기 맛이 아니라 사람을 아느냐가 핵심 아닐까."
―부모님은 교사가 되라고 하시지만 진짜 꿈은 '역사 공부'다.
"대부분 부모는 보수적인 판단을 한다. '살아봐라. 별거 없다. 정년보장 되는 직업이 최고'라 한다. 하지만 나는 선생이니까, 각자의 내면에서 최선을 끌어낼 수 있는 길을 권하고 싶다. 제가 태어나던 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87달러였다. 하지만 부모가 살아온 시간과 여러분의 미래는 다르다. 내 아들도 새벽 2시에 일어나 게임을 하더라. 좋아하면 자꾸 하고, 자꾸 하면 잘하게 된다."
―소위 '지잡대'(지방 무명 사립대) 출신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명문대 학생들이 "나는 대기업 가는 게 당연하다"는 글을 띄워 무섭고 슬펐다.
"서울대 나온 서울대 교수가 이런 말 하기 쑥쓰러운데…. 우리 사회에서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 중요하니까. 다만 여러분 생각만큼 중요하진 않다. 취업할 땐 학벌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뒤엔 성격 좋고 일 잘하는 사람이 승진한다. 서울대 발전기금 낸 분 중엔 서울대 안 나온 사람이 훨씬 많다. 편입·유학 등 속된 말로 학벌을 '세탁'하느니 차라리 '내 학벌 좋지 않다' 받아들여라. 그 대신 더 노력해라.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중에 어떤 일을 택해야 하나' 묻는 사람이 많은데, 아마도 제가 여러분에게 (성우 배한성씨 목소리를 흉내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렴'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난 그런 말 안 한다. 그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지금 하는 일에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는 '핑계'가 되선 안 된다."
―교수님들이 "어차피 디자인으로 먹고살 사람은 너희들 100명 중 3~4명에 불과하다"고 해서 반발심이 들었다.
"광고회사 임원 친구가 면접 시험에서 인문대 나온 지원자에게 '자네는 인문대 나왔군' 했더니 그 지원자가 황급히 '제가 비록 인문대를 나왔지만…' 했다더라. 씁쓸하지. 철학이건 문학이건 건축이건, 꼭 그걸로 밥 먹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와 젊은이에게 위로가 아닌 '쓴소리'를 한다면?
"우리 기업은 기존 직원들을 밤늦도록 혹사시키면서 그들에게 복지혜택을 집중한다. 그러지 말자. 기존 직원은 좀 더 놀아야 한다. 근로부담을 줄이는 대신 생산성을 올리고, 부족한 노동력은 청년 신규 채용으로 풀어라. 386세대는 '분단 때문에 여친과 헤어졌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문제까지 몽땅 체제에 돌렸다. 반면 요즘 20대는 구조적인 문제들까지 개인적인 결함 탓이라 자책한다. 거리에 나와 시위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성세대만 탓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결국 사람의 속내는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지금.. 당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당신은 모든걸 다줄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사귀도록 해야 한다. 근본이 나쁜자들을 멀리하여야 한다.
사람의 감정은 비슷하여 결국 같이 있다보면 정이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현실이나 이성적인 문제에 마주치면..
결국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버릴 것은 버려야지.. 어중간하게 행동하다간..
모든걸 잃게 된다..
문제가 생기면 우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도를 생각하고
챙길것과 버릴 것을 분명해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버릴 것에는... 그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어 자신이 손해를 보는 선에서 일을 끝내야 한다.
..
이미 문제가 되었다면 작은 손해를 아까워해선 안된다..
A씨는 최근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변사체의 신원이 남편으로 확인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A씨는 2개월 전 남편을 간통 혐의로 고소했고 이혼 소송을 냈는데, 남편은 경찰의 소환 조사를 앞둔 상태였다.
A씨는 5년 전 직장 선배의 주선으로 남편을 만났고, 그의 능력과 원만한 성격에 마음이 끌렸다. 결혼 후 1년 만에 아이를 낳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명문대 의대에서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서울 근교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실력도 있는데다 남다른 친절로 병원엔 많은 환자들이 몰렸다.
그런 남편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서울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 선배는 남편에게 주점에 투자하면 높은 이익을 나누어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남편은 술집에 큰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대학 선배가 보장한 투자 이익은 지켜지지 않았다. 남편이 확인해보니 그 대학 선배는 도박의 늪에 빠져 사채업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그 주점을 인수하게 되었다. 영업은 잘 되는 편이었다.
이 술집은 접대부들을 불법 고용한 업소였다. 남편은 직접 주점을 운영할 수 없었고 대신 영업을 맡을 '마담'을 별도로 고용했다. 남편은 낮엔 병원에서, 밤에는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마담'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A씨는 어느 날 남편의 휴대전화를 몰래 검색했다. A씨는 남편이 '마담'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남편 모르게 '마담'을 만나 남편과의 관계를 따졌다. 그런데 이 '마담'은 태연하게 "오래전부터 연인 관계였고 현재는 임신 중"이라면서 오히려 A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A씨는 분노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따졌다. 남편은 '마담'의 임신과 이혼 요구가 의외였는지 매우 당황해했다. 남편은 그날 저녁 '마담'을 만나 가정을 지키겠다며 낙태를 요구했다.
이번엔 '마담'이 분노했다. 헤어지는 대가로 술집을 주지 않으면 병원에 악소문을 내고 불법영업을 신고하겠다고 남편을 협박한 것이다.
남편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A씨는 남편으로부터 '마담'을 떼어내기 위해 남편과 '마담'을 간통 혐의로 고소하고 남편을 상대로 한 이혼소송을 떠올렸다. 형사처벌을 두려워 한 '마담'이 남편에게서 스스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마담'은 병원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고, 그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병원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마담의 신고로 술집까지 단속을 당해 문 닫을 처지에 놓였다. 지금껏 좌절을 모르고 살아왔던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A씨는 '마담'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도 이참에 혼나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간통 고소를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A씨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어이없는 자살이었다.
2.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다니던 B씨는 고시 공부를 하는 오빠 뒷바라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결심했다. B씨는 친구로부터 ‘스폰만남’에 관해 듣고 해당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한 남성 회원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이 남성은 대가로 가짜 금팔찌를 준 뒤 달아났다. B씨는 ‘스폰만남’에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고생하는 어머니 -->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 성관계를 가졌다..
대가로 금팔찌를 받았다.. --> 알고 보니 가짜였다.. -->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
ㅋㅋ
이게 무슨 논리야?
어머니가 고생한다고 돈벌려고 성관계를 했다. 니....
지가 성관계를 한게 왜 어머니 탓이 되는 걸까?
..
그리고 가짜 금팔찌를 안 받고 대신에 돈을 받았다면..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
그녀들은 불법 성매매를 한 공범자나 미수에 그친 자들이다.
그런 성매매 공범의 이야기를 마치 피해자의 진술인듯.. 그리고..그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논리에 대해 별다른 여과 없이 글을 올린 것은.. 어떤 합당한 이유에서 돈 벌기위해 성매매하는 것을 괜찮고, 당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이유가 된다고 보는 걸까?
검찰 조사 결과 이씨 등은 “한 달에 300만∼500만원을 지원할 남성을 스폰서로 소개해주겠다”는 말로 여성들을 꼬드긴 것으로 드러났다. 카페 회원으로 가입한 여성은 대부분 20, 30대로 명품 구입이나 성형수술비 마련을 위해 스폰서를 원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교사, 항공기 승무원도 있다.
검찰, 운영자 등 2명 기소… 네이버·다음, 100여곳 폐쇄
[세계일보]#1. 지방의 한 방송사 리포터 A(26·여)씨는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성상납’을 한 후배한테 자리를 빼앗긴 뒤 ‘스폰만남’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시절 주위에서 “어떤 애들은 스폰서를 끼고 방송가에서 승승장구한다”는 말을 들었던 A씨는 ‘스폰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하지만 막상 남성 회원으로부터 성매매 제안을 받자 곧 선택을 후회하고 카페에서 탈퇴했다.
#2.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다니던 B씨는 고시 공부를 하는 오빠 뒷바라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로 결심했다. B씨는 친구로부터 ‘스폰만남’에 관해 듣고 해당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한 남성 회원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이 남성은 대가로 가짜 금팔찌를 준 뒤 달아났다. B씨는 ‘스폰만남’에 회의를 느껴 활동을 접었다.
검찰이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업 중인 ‘스폰카페’를 일제 단속했다. 스폰카페는 스폰서를 구하는 여성을 회원으로 끌어들인 뒤 남성과 성매매를 알선하는 곳으로 ‘이색알바’, ‘애인대행’ 등 용어로 여성을 유혹한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김희준)는 스폰카페 개설자 이모(43)씨와 회원 김모(26)씨를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고 18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스폰카페 여성 회원 81명에게 “성상납을 할 스폰서와 연결해주겠다”며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카페에서 만난 여성에게 “스폰서를 소개받기 전에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면서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이씨 등은 “한 달에 300만∼500만원을 지원할 남성을 스폰서로 소개해주겠다”는 말로 여성들을 꼬드긴 것으로 드러났다. 카페 회원으로 가입한 여성은 대부분 20, 30대로 명품 구입이나 성형수술비 마련을 위해 스폰서를 원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교사, 항공기 승무원도 있다.
검찰은 수사 직후 네이버, 다음 등에 스폰카페 폐쇄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네이버, 다음은 각각 관련 카페 57개, 61개를 사실상 폐쇄하고 ‘애인대행’, ‘조건만남’, ‘스폰’ 등 키워드를 금칙어로 정해 접근 자체를 봉쇄하도록 했다.
17세에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로 시작해
현재 98개 국에 진출한 프레드릭 드루카 서브웨이 회장(64)
"원래 제 꿈은 의학 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친구인 피터 벅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습니다. 샌드위치 사업에 흥미를 느낀 저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사업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3학년 때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서브웨이를 확장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
우리나라에도 한때 석봉토스트가 붐이 일었으나..
이제는 쉽게 찾아보길 힘들다..
무엇의 차이일까?
VS
암튼..
가장 안전하고 괜찮은 사명감의 길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그는.. 아마도 의사가 되었더라도 돈을 잘 벌었을 것이다.
뉴욕의 그라운드제로에선 지난 9 · 11 테러 때 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 재건 공사가 한창이다. 트레일러에 매달려 공중에 떠있는 노란색 컨테이너가 눈에 띈다. 샌드위치 전문점 '서브웨이' 매장이다. 서브웨이는 지난해 6월 컨테이너 안에 55.74㎡ 규모의 가게를 열었다. 이 가게는 공사가 진행되는 층과 같은 높이로 매달린다. 매층 공사가 진척될 때마다 서브웨이 매장도 한 층씩 올라간다. 인부들이 땅에 내려가지 않고도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황당한' 위치 선정은 후발주자로서의 전략이었다. 서브웨이는 맥도날드 KFC 등 경쟁업체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이 지역에 점포를 열고 브랜드 홍보 효과를 노렸다. 이런 적극적인 마케팅전략에 힘입어 후발주자임에도 불구,3만4000여개의 매장을 가진 세계 최대의 패스트푸드 체인이 됐다. 지난해 매출은 152억달러에 달했다. 17세에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로 시작해 현재 98개 국에 진출한 프레드릭 드루카 서브웨이 회장(64)은 '간소한 운영체계,프랜차이즈 노하우,건강한 컨셉트'를 성공 비결로 꼽았다.
▼KFC보다 22년 늦은 1974년에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는데,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은 뭐였습니까.
"점포를 낼 때 전통적으로 '명당'인 곳은 물론이고 남이 쳐다보지 않지만 독특한 자리에는 꼭 입점하려고 했습니다. 쇼핑몰이나 대학,놀이공원,공항,컨벤션센터 등 프랜차이즈라면 누구나 원하는 곳에 서브웨이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들이 제대로 된 음식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도 간판을 걸었습니다. 공사장,유람선,세탁소,고등학교 등입니다. "
▼남들은 못하는데 서브웨이가 점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뭡니까.
"서브웨이는 모든 재료를 기름에 튀기지 않기 때문에 주방에 복잡한 설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맥도날드와 KFC 등 경쟁자에 비해 입지를 선정하는 데 제약이 줄어듭니다. 또 개점 비용과 운영 비용이 적게 들어 가맹점주를 모집하기도 수월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 노동력도 적게 들죠."
▼경기를 너무 타지는 않나요.
"패스트푸드업종은 침체기에도 잘 버티는 편입니다. 소비자들이 저렴하면서도 가치 있는 제품을 찾기 때문이죠.중요한 것은 가치입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또 침체기는 프랜차이즈 운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직장인들이 사업 기회를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브웨이는 운영 방식이 간단해 경기 침체의 수혜를 입기도 했습니다. "
"가맹점주는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본사의 매뉴얼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기업가로서 스스로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본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이를 적극 장려하고 전체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본사의 역할입니다. "
▼어떻게 가맹점주와 소통하고 있나요.
"음성메일이나 이메일소식지 비디오 개별미팅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죠.컨설턴트들은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매장을 방문해 가맹점주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의견을 듣습니다. 또 가맹점주와 개발대행업체 컨설턴트들과 회의도 자주 엽니다. 그들의 사업에 대한 관찰과 제안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가맹점주의 아이디어를 전사적 캠페인으로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는 5달러짜리 '6인치 풋롱 샌드위치'였다. 2004년 마이애미의 한 가맹점주가 미끼상품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 메뉴의 인기가 높아지자 본사는 2008년 불황기에 전사적 캠페인으로 확장했다. 서브웨이는 5달러짜리 샌드위치만으로 38억달러의 매출을 올렸고,그해 전체 매출은 17% 늘었다. )
▼'건강' '신선'을 모토로 내건 배경은 뭡니까.
"1965년 코네티컷주 브릿지포트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시작했을 때부터 건강과 신선은 우리의 중요한 컨셉트였습니다. 1974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면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방이 적은 살코기와 신선한 야채를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빵에 들어가는 소금 함량도 평균 15% 줄이기로 했습니다. 고품질과 식품안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는 우리의 모토입니다. "(서브웨이 메뉴 중 일부는 지방성분이 6g 이하다. 맥도날드 '빅맥'의 지방함량이 30g인 것에 비하면 20% 수준이다. )
▼건강 컨셉트가 다양성을 저해하진 않을까요.
"현재 서브웨이에서 재료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메뉴는 200만개에 달합니다. 또 우리는 맛과 영양의 균형을 고려해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선보인 아침식사 프로그램인 저지방 오믈렛 샌드위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
▼17세에 창업을 했는데요.
"원래 제 꿈은 의학 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학비를 보태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친구인 피터 벅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습니다. 샌드위치 사업에 흥미를 느낀 저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사업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3학년 때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서브웨이를 확장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
▼'제2의 서브웨이'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소비자의 만족과 직원의 성장에 집중하세요. 사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고객'을 벌어야 합니다. 또 직원은 당신의 대표자이자 모든 고객과의 접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 17세에 창업을 하면서 경험도 배움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습니다. 실수는 모두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쳐지게 마련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관점이란 것에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사실은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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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온 망명자들의 빈곤한 삶에 대한 한계레 신문의 한 기사를 보았다.
한국서 17년 ‘발버둥’…“지금은 떠날 생각뿐” 그들의 땅은 어디에 다시 러시아로, 차라리 북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게 꿈, 정부지원책은 울분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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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는 옛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7년동안 노력했지만.. 빈민으로 산다면
뭔가 분명 문제가 있긴한데..
한국의 빈곤은 구조적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국의 빈곤은 대물림된다. 자녀까지 저학력·저소득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중간에.. 기자가 삽입한 이 대목은..
기자의 자기 생각이며, 그가 전제로 생각하고 있는 오로지 그의 생각이다..
다른 나라의 빈곤은 구조적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꼭 노력한다고 부자, 아니.. 중산충이라도 될 수가 되는가?
사회구조.. 민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일 뿐이 이 기자의 생각은..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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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해보자.. 다음을 보자..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하지만.. 매번 반에서 뒤에서 1-2등을 해..
시험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도 대게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할때.. 그 '열심히'의 개념이 공부잘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놀고, 잘것은 다 자고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열심히 노력한다. 반면에 공부잘하는 학생은 우선 공부에만 매진하고 열심히 한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공부못하는 학생의 문제는 이 사회나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학생의 공부방법이나 태도의 문제일 따름이다..
공부방법에 대한 방법론적인것은.. 옛날과는 달리 TV, EBS , 인터넷에 보면 아주 잘 나와있다.. 누구든 그 방법을 잘 실천만 하면 우등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우등생이 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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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빈곤에 대해서 접근할때는
솔직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나 궁금증이 있어야 헀다..
정말 그들은 빈민층인가? 컴퓨터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고 집도있는데..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번 돈을 어떻게 모으고 관리하였는가? 그런 수단이나 방법에 문제가 있진 않았나?
또는 17년동안 고생해서 돈을 얼마나 모으고 어떻게 썻는가?
도대체 그들을 얼마만큼 지원해야 하는가? 그들이 만족할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그들을 호위호식하게 돈을 대주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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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들이 정말로 가난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언급없이..
기자는 그냥 한국의 구조적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다..
그들이 미국이나 외국으로 가면.. 잘살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나마의 경제적인 지원도 없을텐데, 또 인종차별은 더 심할텐데....
한계레 신문.. 이 기자의 성향은.. 분명 반사회적이고 부정적이다.
그 스스로도 불행할 수 밖에 없겠지만..
언론에 몸담은 그가 토해 내는 부정적인 역겨움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제말 좀 긍정적이고 균형적인 사고를 갖길 바란다.
“안되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든지….” 앞뒤의 말들을 뺴고 이 글만 올린 기자의 불순한 의도가 궁금하다.. 정말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길 바란다..
한국서 17년 ‘발버둥’…“지금은 떠날 생각뿐”
그들의 땅은 어디에
1994년 북 벌목공, 망명 수용
북·중·러 반발속 정치적 활용
국내 탈북자 현재 2만918명
1994년 8월22일, 대한항공 924편은 모스크바를 출발해 김포공항을 향했다. 깜박 잠든 한철길(52)씨를 옆자리 탑승객이 깨웠다. “텔레비전에 당신 사진이 나와요.” 기내의 작은 화면에서 한씨는 제 얼굴을 보았다. “현재 모스크바를 출발한 한씨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말했다. 낮 12시35분, 공항 입국장에서 한씨는 취재진의 수많은 플래시에 둘러싸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한씨는 러시아 벌목장 출신 탈북자다. 1985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삼림지역에서 일했다. 그는 영화기사였다. 벌목장을 다니며 영화를 틀었다. 장사도 했다. 벌목장 밖에서 담배 등을 구해 벌목공에게 팔다가 북한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1986년, 27살의 한씨는 벌목장을 탈출했다. 8년 뒤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는 ‘러시아 벌목공’으로 소개되어 기자회견에 나섰다. 당시 러시아 벌목공(출신 탈북자)은 북한의 인권유린을 웅변하는 존재로 통했다.
한국 생활은 올해로 17년이 됐다. 그 세월 동안 한씨는 사무직, 건설현장 막노동, 식당 점원, 다단계 판매원, 옷장사 등을 거쳤다. 북한 실태에 대한 강연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 어느 아파트 단지의 전기기사로 일한다. “돈 없으면 지옥 같은 이 나라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발버둥 끝에 한씨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냥 (한국을) 떠날 생각뿐입니다.”
탈북 1세대인 한씨는 2만여명에 이르는 국내 탈북자의 처지를 웅변한다. 지난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국내 탈북자 경제활동인구 10명 중 1명은 실업 상태다. 취업 경험이 있는 탈북자의 63.4%는 한 직장에 1년 이상 다니질 못했다. 80.4%는 근로소득액이 150만원 이하다. 탈북자는 한국 사회 최하층을 이룬다. 성공적 정착자가 없지 않지만 매우 드물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대표되는 탈북 1세대의 실패를 다른 탈북자들도 따라 걷고 있다.
»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해 1994년 한국에 온 한철길(52)씨가 광복절인 지난 15일 서울의 한 아파트 전기관리실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으로 떠나려는 탈북자 최진선(가명·47)씨가 지난 7일 경기도 자택에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아이의 장래를 걱정해 미국에 가려는 탈북자 장희순(가명·44)씨가 지난 16일 경기도 자택에서 딸이 영어 공부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부터)
2011년 3월 현재, 국내 거주 탈북자는 2만918명이다. 탈북자의 국내 입국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2006년부터는 매해 2000~3000명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 탈출한 북한 주민들이 그 서막을 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북한과 러시아는 벌목협정을 맺었다. 러시아는 영구 동토의 혹독한 환경에서 벌목 작업을 할 노동자가 필요했고, 북한은 외화수입이 필요했다. 그 절정기인 80년대, 연해주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은 2만~3만명에 이르렀다.
70년대 한국의 중동 건설 노동자에 비견되는 북한 벌목공들은 90년대 이후 난관에 부닥쳤다. 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고 인플레가 심해지자 북·러 당국이 벌목공 규모를 축소했다. 예전 같지 않은 벌이와 감원에 불만을 품은 북한 벌목공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94년 초, 한국의 보수언론이 북한 벌목공이 지내는 합숙소 등을 “인권유린의 수용소”라고 보도했다. “과장된 증언”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김영삼 정부는 작업장을 나와 떠도는 벌목공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북핵 관련 남북 긴장이 높아지던 때였다. 북한은 “(벌목공의 망명을 허용하면) 납치로 간주하겠다”며 반발했다. 러시아는 “망명을 원하는 북한 벌목공이 러시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른 나라의 개입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94년 5월, ‘망명자’ 신분으로 북한 벌목공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국내적으로는 ‘북한의 인권유린’이 사회의제로 부각되는 동시에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대외적으로는 한-러, 남북 관계 모두 경색되면서 한반도 주변에 긴장이 흘렀다. 김영삼 정부가 탈북자를 ‘정치적 카드’로 활용해 남북대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때부터 북한 주민들에겐 ‘북한 탈출-러·중 체류-한국 입국’의 탈북 경로가 생겼다. 북-중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탈북부터 한국 입국까지 안내하는 브로커가 등장했다. 한국 선교단체·보수단체들도 중국 동북 지역에서 탈북자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입국한 벌목공들에게 임대아파트와 정착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해줬다. 1994년은 탈북자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잉태된 시기였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 벌목장에서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한철길(52)씨의 지난 17년은 한국 거주 탈북자의 실상을 웅변한다.
한씨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는 ‘기획 탈북’의 그림자가 있다.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 삼림지역에서 일했던 한씨는 1986년 벌목장을 탈출했다. 그 뒤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연해주 등을 떠돌았다. 93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고려인 아내를 만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탈출 이후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배경에는 한국 대사관이 있다. 94년 초,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씨를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나한테 ‘한국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입국 이후 탈북자의 첫 임무는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일이다. 입국 직후 한씨는 다른 벌목공과 함께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에 나갔다. 한씨의 첫 직업은 통일부 홍보 강사였다. 대학과 경찰서를 다니며 전쟁 대비책을 강연했다. “원고는 경찰이 써주고 1시간에 10만원을 받았는데, 따라다니는 형사 2명의 밥값을 계산하면 5만원 남더라고요.”
입국한 탈북자에게 한국 정부는 정착 지원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한다. 극빈층에 준하는 지원이다. 풍요로운 삶을 기대했던 탈북자들은 종종 실망에 빠진다. 입국 당시 한씨는 15평 임대아파트 보증금 900만원과 정착금 300만원을 받았다. 한씨는 정착금으로 중고 텔레비전과 밥그릇을 샀다.
탈북자들의 고민은 취업 직후부터 본격화된다. 그들은 한국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감을 느낀다. 직업학교에서 자격증을 딴 한씨는 한국전력공사에 취직했다. 동료들은 회식 자리에 한씨를 부르지 않았다. “저 사람은 스파이”라며 숙덕이는 소리도 들었다. 한씨는 취업 4년여가 지난 2000년에 사표를 냈다. 함께 직업학교에 다니며 자격증을 딴 탈북자 19명에게 연락해봤다. 그들 역시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상태였다.
달리 기댈 곳 없는 탈북자들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돈이 필요했던 한씨는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일자리를 줬다. 한달에 50만원을 받고 교인들 앞에서 북한 실태를 얘기했다. 교회는 더 큰 일을 요구했다. 러시아에 선교사로 나가라고 했다. 한씨는 교회 일을 그만뒀다.
탈북자들은 결국 몸으로 돈 버는 생활을 시작한다. 한씨는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사무직 일을 하고 싶었지만, “북에서 왔다”고 하면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착실히 돈 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탈북자들은 종종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진다. 어느 날 한씨에게 낯선 이가 찾아왔다. 러시아 수출용 의류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또다른 이는 다단계 판매를 권했다. 한씨는 ‘판매에 성공한 탈북자’로 소개되어 다단계 판매 회사의 강사로도 일했다. 수백만·수천만원이 오가는 일에 잘못 연루되어 한씨는 고소를 당했다. 결국 사기죄로 감옥까지 다녀왔다.
숨가쁜 17년이 보람 없이 지나가는 동안, 담당 형사의 소개로 만난 한국인 아내와도 멀어졌다. 이제 아파트 단지 전기 기사로 일하는 그는 제 인생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자꾸 치민다. “친척이 있어요, 동창이 있어요? 워낙 바닥부터 시작하지, 비빌 데는 없지…. 외톨이가 되니까 점점 폐쇄적이 되고, 한국 사람이 볼 땐 별거 아닌 걸로도 상처 받고….”
얼마 전, 한씨는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1994년 입국 당시 한씨는 다른 벌목공 8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연락 닿는 이들에게 어찌 지내는지 물었다. 그들은 시골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거나, 아파트 쓰레기 수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더라고요. 오래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요.” 한씨는 쓰게 웃었다.
정착금 등 줘도 극빈층 수준
차별·경쟁 심해 적응에 실패
‘빈곤 대물림’ 사회에 절망감
한국 거주 탈북자의 ‘누적된 실패’는 2000년대 중반부터 탈북자의 제3국행으로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가족 탈북’이 있다. 초기에는 혈혈단신 탈북이 주를 이뤘다. 이후 ‘나홀로 탈북자’들이 북한의 가족·친척을 한국에 데려왔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2세도 태어났다. 자녀를 둔 탈북자들은 밑바닥 인생을 오래 인내하지 않는다.
장희순(가명·44)씨는 9살 딸을 위해 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일찍 깨친 (탈북자) 엄마들은 애 데리고 2007년 무렵부터 영국에 많이 갔어요. 거긴 북한 사람에 대한 색안경도 없고 차별도 없고 그렇게 좋다고 그래요.” 요즘은 영국 망명이 힘들다. 그래서 미국을 택했다. 내년에는 출국할 생각이다. “우리야 한국에서 고생하며 몸으로 때울 수 있지만, 아이들까지 그럴 순 없어요.”
이 대목에 이르러 한국 거주 탈북자의 고민은 한국 빈곤계층의 처지와 겹친다. 한국의 빈곤은 구조적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국의 빈곤은 대물림된다. 자녀까지 저학력·저소득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출신이 섞인 탈북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최진선(가명·47)씨는 2002년 탈북 직후 중국에서 조선족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딸을 업고 타이를 거쳐 2007년 한국에 왔다. 한국 국적을 얻은 뒤 중국의 남편을 초청했다. 최씨에겐 북한에 있던 시절 결혼해 낳은 아들도 있었다. 2009년, 1200만원을 들여 북에 있던 19살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남편, 탈북하여 중국 생활을 경험한 아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북한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모여 가족을 이뤘다. 남편과 아내는 둘 다 몸이 아프다. 빈곤계층에 지원하는 최저생계비 130만원으로 한달을 산다. 자녀들 역시 한국의 경쟁적 교육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러시아로, 차라리 북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게 꿈
정부지원책은 울분만 남겼다
러시아 벌목공 논란 이후인 1997년, 한국 정부는 ‘북한이탈주민 보호·정착 지원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정했는데, 자립·자활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을 둔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 “워낙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한철길씨의 울분은 정부 지원책의 실제 효과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 하층의 바닥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한다.
한씨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게 꿈이다. “안되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든지….” 체념한 표정으로 한씨가 말했다. 최진선씨는 미국에 있는 탈북자 친구에게 전화 거는 일로 요즘 바쁘다. “거기 가면 나 같은 아줌마도 월 300만원은 버는 것 같아요.” 최씨의 꿈은 미국에 가는 것이다. 17년 전, 러시아 벌목공에서 비롯한 탈북의 행렬은 ‘다국적 탈북자’ 가족 시대를 거쳐 미국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이 진화인지 퇴화인지 구분해주는 전문가를 취재 내내 만나지 못했다. <끝>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 최진선(가명)씨의 부모는 모두 북한에 있다. 지난 2009년 아버지 칠순 잔치 직후 어머니는 최씨에게 보낸 편지에 북녘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동봉했다.
마치며 한결같이 불안정한 삶…얼굴 노출 원치 않아
6월 중순 짧은 외신 기사를 봤다. “미국에서 탈북자가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정이 궁금해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미국·캐나다 등 각국 정부의 자료를 살폈다. 생각보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이 아닌 제3국에 머물고 있었다. 국내 거주 탈북자 및 관련 단체를 만나고 해외 탈북자 협회, 탈북자 지원 단체, 선교 단체, 변호사를 접촉했다.
7월 말, 국내 거주 탈북자, 한인 선교단체 등을 통해 소개받은 탈북난민 및 탈남 탈북자를 미국 현지에서 만났다. 기사에 등장하는 탈북자를 직접 만난 것은 물론 이웃 탈북자, 선교단체, 한인회, 한인 교회, 한인 가게, 현지 기자 등을 만나 사실 관계를 재차 확인했다. 열흘 동안의 현지 취재 이후에는 전화·전자우편·인터넷 메신저 등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 인권 및 탈북자 문제는 이념에 속박된 쟁점이다. 취재 전반에 걸쳐 이념의 틀을 벗어나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탈북자 문제를 다루려 애썼다. 인권은 소외·억압당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의 삶은 극적이고 다양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불안정했다.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이웃 탈북자의 부러움을 받는 이들조차 사회적·경제적 곤란을 호소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북한·중국·미국 정부와 교회를 필두로 하는 주변 한인의 시선에 민감했다. 익명을 쓰는 등 그들의 신분을 최대한 가렸으나, 기사에 등장한 어느 탈북자는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도 (신분 노출로 이어질까) 걱정된다”고 연락해왔다.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 기사 아니냐는 몇몇 독자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살기 힘든데 그 정도 지원을 받고도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반응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반면 탈북자들을 돕고 싶다는 국내외 독자의 문의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