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150㎝인 작고 통통한 체구에 항상 높은 도수의 안경을 끼고 다니는 이모(16)양은 중학교 시절 '왕따'였다. 학생들은 이양이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놀리면서 안경을 부수고 도망갔다. 이양은 '졸업하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이양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밥 먹는 모습을 몰카로 찍어 올려놓곤 '돼지 같다'고 써놓은 글 등 같은 반 친구들이 자신에 대하 욕설 일기를 쓰고 있는 인터넷 안티 카페를 봤다. 충격을 받은 이양은 심각한 거식증 증세를 보이며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토했다. 결국 이양은 자퇴했다.
'사이버 왕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한국정보화진흥원이 지난해 11월 전국 초·중·고등학생 126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12.4%가 '인터넷 왕따'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국의 초·중·고생이 720만명이므로, 단순 셈법으로는 89만여명이 인터넷에서 한 번 이상 왕따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집단적으로 욕설을 당했다는 응답은 20.2%였다. 김봉섭 한국정보화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사이버 왕따는 인터넷과 휴대폰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괴롭힐 수 있어 전학 등을 통해서도 쉽게 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메시지로 괴롭히기
초등학교 6학년생인 조모(12)양은 지난 6월 카카오스토리에 남자친구 사진을 올렸다가 3시간 동안 학교 친구 20명으로부터 '떼카 괴롭힘'을 받았다. 친구들이 조양에게 "왜 남자친구 사진을 올리느냐. 나댄다"며 수백 통의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혼자 방에서 메시지를 보며 우는 조양을 보고 조양의 부모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학생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훈방 처리됐다. 현재 조양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중학교 2학년생인 이모(15)양은 매일 친구들로부터 '문자 폭행'을 당했다. 친구들은 이양에게 "돈 내놔" 등의 욕설 문자를 보냈고, 이양의 답변이 성의 없다고 판단되면 직접 찾아와 괴롭혔다. 현재 이양은 휴대폰 문자 소리만 들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노이로제에 걸렸으며, 퇴행성 야뇨증까지 앓고 있다.
◇SNS로 괴롭히기
중학교 3학년생인 A(15)양은 친구의 연락처를 다른 학교 학생에게 알려줬다는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했다. A양의 친구들은 싸이월드 클럽에 A양의 별명인 '심슨X'라는 제목으로 게시판을 만들어 놓고 A양에 대한 욕을 썼다.
A양은 매일 게시물을 읽으며 울었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며 지냈다. 그 모습을 본 A양의 부모가 학교에 이 사건을 신고했지만, 오히려 가해자들은 게시판에 '아직 안 끝났어 미친 X아'라는 글을 올릴 뿐이었다.
중학교 1학년생인 B(13)양은 같은 반 친구의 미니홈피에서 빨간 글씨로 자신의 이름과 '죽어'라는 글이 적힌 게시물을 발견했다. 그 밑에는 학교 친구들이 남긴 '맞다, 죽어라' 등의 댓글이 있었다. B양은 "모두가 날 싫어하는 것 같다. 날 모르던 아이들도 이 글을 보고 다 나를 싫어할 것"이라며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 중인 임모(25)씨는 "작년에 왕따 주동자를 처벌했더니, 반 친구들은 오히려 주동자 페이스북에 '힘내라'고 글을 올리더라"라고 말했다.
뭐.. 나의 학창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모나... 옷차림.. 성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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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에서는 놀림거리가 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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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중 하나가..
고독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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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내면에서 가치를 찾고,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몰두할 줄 안다면..
그리고.. 왕따라는 것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는 왕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어려서 하도 전학을 많이 다니는 바람에.. 대인관계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마지막에 간곳은 그 당시 아주 잘사는 아파트 옆에 있는 초등학교 였는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나는..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1. Try not to give the bully an easy victim. Be someone the bully does not want to pick on. Work on building good self-esteem. If you feel confident inside yourself you won’t look like a victim and it will be easier for you to stand up for your rights.
Work on building good self-esteem by: · identifying what you are good at · be involved in activities that you enjoy build, branch out or expand your hobbies and talents
Presenting yourself with confidence: · make eye contact when speaking with someone · use good posture (stand straight, shoulders back, be aware of personal space—3 -6 feel) · pay attention to what you wear—is it right for the situation?
2. Develop ties with friends and family. This will help you to feel less isolated. It will also provide you with support and someone to talk to.
Here are some ideas of where you might be able to get support.
Your friends—You may find that you aren’t the only one being bullied. Hang around with your friends, the bully might get bored waiting to catch you alone. Stick up for others who are being bullied.
Your parents—Hopefully you can talk to your parents and you can discuss your problems easily. They care about you and may have some ideas to help or may support you by talking to someone at school or where the problem is.
Your teacher—Most teachers know how to handle bully situations and will be able to help you. If your teacher doesn’t help then go and see your principal.
Your coach or group leader—If the problem is during a group activity then it is up to the adult to support you. If there is a bully at work in your team then the team will not be doing their best.
The police or a community leader—If you have no one that you feel comfortable talking to then go to your police station. Police do not like bullies and will be able to give you some information that might help you.
If you are still uneasy about the situation you must revisit someone that gave you support. DO NOT GIVE UP. Keep telling until someone listens.
후룬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50대 부호중 3분의 1, 그리고 10대 부호중 5명이 정치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이들이 더욱 부자가 될수록 정치적 지위들은 더 많아진다.
중국인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감각을 타고난 때문인지 개혁.개방30년만에 수백만의 부자가생겨났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따르면세계적으론 1%의 상위그룹이 개인 부의 40%를 점유하고 있지만중국에선 1%의 상위 자산가 그룹이 전체 개인 자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5년 겨울,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정문 앞. 테너 박지민(34)씨는 평소 영웅처럼 여기던 미국의 테너 닐 시코프(63)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 '라 보엠'의 영상에서 노래는 물론, 연기 동작과 습관까지 외워둔 터였다. 박씨는 다음 날도, 이틀 뒤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같은 옷까지 입고 있었다.
결국 사흘째 다시 마주친 시코프는 조용히 오페라 극장 안으로 그를 데려갔다. 극장 음악감독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방이었다. 박씨는 1시간 동안 오자와의 피아노 반주로 시코프 앞에서 노래하고 레슨을 받았다.
"반드시 '라 보엠'을 세계적 무대에서 부르겠다고 결심했지요." 박씨는 5년 뒤인 2010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주역을 맡으며 그 꿈을 이뤘다.
서울대 음대 졸업 직후 빈 유학, 영국 굴지의 매니지먼트사 아스코나 홀트와의 계약까지 이력으로만 보면 박씨는 전도유망한 청년 성악가다. 하지만 이 경력을 얻기 위해 그는 유럽 전역의 오페라 극장에서 180번 오디션에 낙방하면서 온몸으로 좌충우돌했다.
◇좌충우돌 로커에서 성악가로
전주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 교내 록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인근 여고 축제에 초대받아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섰다. 문제는 그 여고 교장이 바로 박지민의 아버지라는 것. "정체를 숨기기 위해 종이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는데, 공연 도중 땀이 흘러서 그 가면이 찢어지고 말았어요."
1997년 지방대 음대에 들어간 박씨는 병역을 마친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서울행 차표를 샀다. 매주 한 차례씩 3개월간 서울대 음대 대학원생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았다. 결국 2001년 서울대 음대에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서울대 합격 후에도 성악에는 별 관심 없었다. 자신의 음역(音域)이 테너인지, 바리톤인지도 헷갈렸고 고음은 무조건 자신 없었다. 대학 2학년 때는 '서울대 음대 출신의 가수'가 되겠다며 6개월간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동방신기 멤버들과도 함께 연습했어요. 저보다 7~8년은 나이 어린 친구들이 눈만 뜨면 목숨 걸고 춤추고 연습하는 모습에 솔직히 기가 질렸지요."
'연예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는 겉돌았다. 그는 "소프라노 조수미 선배가 재학 시절 성적이 안 좋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보다도 심했어요. 아마도 서울대 음대 창설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보다 못한 스승 강병운 교수(베이스)가 3학년 때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1년만 무조건 공부하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박씨는 스승 댁을 찾아가서 발성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첫 수상 이후 180번 낙방
반신반의하면서 4학년 때인 2004년 참가한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콩쿠르에서 덜컥 특별상을 받았다. 덕분에 박씨는 빈 음대로 유학 갔고, 독일 전역의 오페라극장에 오디션 신청서를 보냈다. 기차 타고 다니며 오디션을 봤지만, 180여 차례 떨어졌다.
'고진감래(苦盡甘來)'였다. 2007년 영국 로열오페라극장에서 젊은 성악가들에게 교육과 데뷔 기회를 부여하는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로 선발된 것. 주역이 사정이 생겨 무대에 서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예비 출연자, '커버'를 맡으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 결국 그는 '라 보엠' 주역을 거머쥐었다.
박씨는 바리톤 임경택(조셉 임)과 임창한, 허종훈 등 젊은 성악가들과 함께 4인조 성악 앙상블 '로티니'를 만들고 오는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공연을 갖는다. 록 가수 대신 오페라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어릴 적 느끼하고 어색해서 마냥 싫어했던 오페라 가수가 직업이 된 걸 보면, 이걸 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아요"라고 했다.
여전히 그의 꿈은 조금 엉뚱하다. "성공하고 8년쯤 뒤에는 은퇴해서 자선 사업을 하는 게 최종 목표예요. 저 같은 '망나니 녀석'도 주위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듯이 다른 후배들도 도움이 절실할 테니까요."
이씨는 삶이 너무 힘들어 선우가 여섯 살 때 자살을 결심했다. 뛰어내리려는 순간, 옥탑방에서 아빠를 찾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씨는 옥탑 지붕에 그대로 멈춰 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선우의 목소리는 "아빠 나도 이렇게 사는데,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선우합창단' 이종진 단장] 세 살 때 백혈병 앓던 아들 뇌손상 입어 결국 장애1급 소아암 환자·가족 격려 결심… 합창단 꾸려 병동서 정기 공연 생활고에 한때 자살 생각도… 지금은 웃음치료사로 새 삶
지난 6일 오후 5시 30분,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암병동 복도에 고운 합창곡이 울려 퍼졌다. 금세 환자와 가족 10여명이 몰렸다. 휠체어에 탄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수를 쳤고, 부모들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17명으로 구성된 '선우합창단'. 제대로 된 무대도 보수도 바라지 않는 자원봉사 합창단이다. 하지만 이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이곳에서 노래를 부른다. '선우'는 소아암을 앓다 완치됐지만, 뇌손상으로 지체장애 1급이 된 이종진(47) 단장의 아들 이름이다.
이씨는 "소아암 환자들을 보면 아들이 생각나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선우는 세 살이던 2002년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모아놓은 돈은 병원비로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병원비를 구하느라 카드사와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렸다. 3년이 지나자 경기도 양주시 22평 아파트가 경기도 고양시 대화동의 방 한 칸짜리 옥탑방으로 쪼그라들었다. 빚을 갚지 못한 이씨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씨는 경희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음악 아카데미에서 1년 공부했다. 이후엔 국내에서 오페라 조역이나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음악잡지 편집장도 지냈다. 그러나 아이의 병 앞에서 그의 노래 솜씨는 무용지물이었다.
이씨는 삶이 너무 힘들어 선우가 여섯 살 때 자살을 결심했다. 뛰어내리려는 순간, 옥탑방에서 아빠를 찾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씨는 옥탑 지붕에 그대로 멈춰 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선우의 목소리는 "아빠 나도 이렇게 사는데,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난 6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암병동에서 이종진(왼쪽) 단장과 단원들이 환자들과 가족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선우는 그해 겨울 백혈병 완치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뇌 손상을 입어 지체장애 1급 간질환자가 됐다. 이씨는 낙심 대신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땄다. 처음엔 아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선우도 이씨가 우울한 날이면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았다. 선우를 위해 시작했지만, 웃음치료는 이씨 스스로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이씨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곪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직업 자체를 웃음치료사로 바꿨다.
"병원에서 본 환아 부모는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세상에 대한 원망이 많아요. 문득 그분들이 잠시라도 행복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노래'였다. 지난 1월, 이씨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어린이병동에 홀로 서 첫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다. 노랫소리를 들은 환자 부모가 병실 밖으로 나와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러줬다.
지난 4월부터는 이씨를 돕겠다는 사람들도 생겼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성가대원이 함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이씨가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자, 성악 전공자 2명이 참가의사를 밝혔다. 이들이 친구를 데려오고, 그 친구가 자신의 자녀를 데려왔다. 지난 6월 29일 17명의 멤버가 모여 이씨의 아들 이름을 딴 '선우합창단' 창단식을 가졌다. 병원은 "매주 정기적인 공연을 하는 것은 선우합창단이 처음"이라고 했다. 단원들은 공연이 있는 날이면 1시간 30분 전에 모여 함께 연습을 한다.
이씨는 "성악을 할 땐 훨씬 더 화려하고 큰 무대에도 많이 서 봤어요. 그땐 관객이 많이 오면 기뻐했는데, 병동에서 노래 부를 땐 지난주에 본 환자가 병을 이겨내고 퇴원해 보이지 않으면 기쁜 마음이 듭니다. 관객이 많이 없길 바라는 합창단인 셈이죠"라고 말했다.
모든걸 다 내팽겨치고.. 35년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유전자 검사 덕에 아들을 찾아냈다..
..
감동이다.
물론 나도 .. 그럴 것이지만..
그전에.. 소중한 아이들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놀이터에 갈때..얘들끼리는 가지 못하게 해야겠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용덕이 찾았어요."
지난 6월 27일 오전 9시 57분, 이영자(가명·63)씨는 사단법인 어린이재단으로부터 35년을 애타게 기다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섯 살 때 잃어버린 아들 조용덕씨를 은평구의 한 복지시설에서 발견했다는 통보였다.
한걸음에 내달렸다. 아들의 두 볼을 감싸쥔 이씨 부부의 눈에선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긴 세월의 회한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졌다. 35년은 국내 실종아동이 가족과 상봉한 사례 중 최장기 기록이다.
충북 제천에 살던 어린 용덕군은 아버지 자전거 앞에 타기를 좋아했다. 하얀 얼굴과 예쁜 눈웃음으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기도 독차지했다. 그러던 1977년 4월 10일. 사촌 누나와 놀이터에 놀러 갔던 용덕이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용덕이 부모에게 아들 찾기라는 긴 아픔은 시작됐다.
그날 밤 아버지는 확성기를 사 들고 용덕이를 부르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잃어버린 후 처음 3년 동안 전국의 아동복지시설 355군데를 모두 직접 찾아다녔다. 전단을 5000장 찍어 들고 다니면서 "우리 용덕이를 보셨느냐"고 수만 번 묻고 다녔다.
아버지가 동쪽으로 가면, 어머니는 서쪽으로 갔다. 당시 11세인 큰딸은 이웃집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보리밥에 된장을 찍어 발라 먹으며 부부는 전국을 헤맸다.
충북 제천 근처에는 나병 환자촌이 있었다. 혹시 그곳에 들어갔는지도 몰라 77년엔 사흘간 마을 근처에서 잠복하기도 했다. 용덕이를 찾겠다며 방송에도 2차례 나갔고, 푸닥거리만 수십 번을 했다.
8년간 제천에 살며 아들을 찾아다녔다. 작은 페인트 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다시피 했다. 7개월여 만에 망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는 틈틈이 일용직 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이웃에서 간고등어와 소 내장 등을 얻어 머리에 이고 장에 나가 팔았다. 돈이 생기면 다시 그 돈으로 전단을 찍고 교통비로 삼았다. 팔을 못 쓸 정도로 수천 장의 편지를 써서 전국 반상회 회보, 도교육위원회, 초등학교, 경찰청, 각종 시설에 보냈다.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가족은 그 후로도 25년간 아들을 찾았다. 잘못된 제보에 제주도부터 부산, 대구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아닌 것을 확인하고 돌아설 때마다 가슴은 다시 한 번 찢어졌다.
잃어버린 지 30년이 지나자 아들의 얼굴조차 추정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2010년엔 미국 국립 실종·학대아동센터에 가족사진과 용덕씨 어린 시절 사진을 보내서 현재 모습 추정 사진을 받았다. 작년 전립선암으로 수술한 아버지는 아들을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잃어버릴 당시엔 그저 성장이 조금 늦는구나 생각했던 용덕씨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 되어 은평구 복지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 지난 2월부터 개정돼 시행된 실종아동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라 보호시설 입소자였던 무연고 아동도 유전자 검사 대상물을 채취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용덕씨도 유전자를 채취했다. 앞서 용덕씨 부모는 4년 전 인천 서부경찰서를 통해 장기 실종자 가족의 자격으로 유전자를 등록해뒀다. 지난달 18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친자 관계일 확률은 99.9999%. "저희 부부가 35년간 포기하지 않고 용덕이를 찾게 한 힘은 그저 자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용덕이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주사 바늘이 들어와 깜짝 놀랐다. 주사가 너무 무섭고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픔을 사라지게 하려면 주사를 맞아야 한다. 나도 주사를 맞긴 싫지만 아픈 것 보단 낫다." 수진이(11)의 일기는 늘 투병 이야기로 채워진다.
◈몸무게 645g으로 태어난 수진이
임신 8개월 만에 몸무게 645g의 작은 몸으로 세상에 나온 수진이. 2년 간의 중환자실 생활은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계속된 치료와 여러 차례의 수술에도 2kg도 되지 않는 작은 몸으로 퇴원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전문 주치의만 4~5 명이고 수진이 컴퓨터만 3~4개가 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인 수진이는 7살 때부터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지만 110cm의 키에 몸무게가 19kg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작고 왜소하다. 게다가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어 매일 10시간 씩 투석을 해야 살 수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함께 이겨냈을 텐데…. 그때는 원망도 많이 하고 좌절도 했었죠."
수진이의 투병 생활이 계속되자 수진이 엄마는 아이가 3살 무렵 집을 나갔고 현재 연락두절 상태다. 그 후 수진이 양육과 간병은 오롯이 아빠 양우용(41) 씨 몫이 됐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일용직 목수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아빠가 일을 하다 골반을 다치면서 간병과 생계에 또 한 번 어려움이 닥쳤다. 투석액과 약값, 각종 검사비용, 호르몬 주사 비용까지 한 달에 70여 만원이 필요한데 당분간 빚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식비용 없어 발만 동동
"대기 순서가 되면 이식수술을 받아야 되는데 경제적으로 그렇지 못 한 상황이라 아빠로서 아프고 미안하죠."
신장이 제 할 일을 하지 못 해 몸속 노폐물을 투석액을 통해 걸러주는 일을 매일 해야 하는 수진이. 투석만으로는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 복막투석을 하다가 안 되면 혈액투석을 해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합병증으로 생명에 위험이 올 수도 있다.
작년에 이식수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경제적 이유로 수술을 받지 못했던 수진이. 이식수술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라 경제적인 여건이 충족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딸을 더 아프게 하는 것 같아 아빠는 늘 죄책감에 시달린다. 딸에게 단 하루라도 건강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지길 기도한다.
양수진 양의 안타까운 사연은 CBS TV '수호천사 사랑의 달란트를 나눕시다'를 통해 오는 7월 7일(토) 오후 4시 10분에 다시 방송된다. (skylife 412번, 각 지역 케이블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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