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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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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 그림들 모음

2012. 12. 1.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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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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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의 사진

..

 

대규모 정치적 M&A를 시도한 그는..

..

실패했다.

그 실패의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꽤나 시간이 흘라야  이야기가 나올듯..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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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 측 안도현 시민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은 29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한 김지하 시인에 대해 “많은 분이 김 시인이 변절했다고 하는데 저는 변절이라기보다는 김 시인의 오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인인 안 위원장은 불교방송라디오 ‘고성국의 아침저널’ 에 출연해 “김 시인이 개인적으로 누구를 지지하든 별로 문제가 안 된다”면서 “하지만 대한민국이 유신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박정희 군부독재와 유신에 항거한 대표적 시인인 김시인이 그런 사람의 딸에게 지지를 표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저는 문단에서 김 시인을 한번도 뵌 적은 없는 까마득한 후배”라면서 “김 시인은 90년대 이후에 문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는 긴장을 많이 잃어버린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나는 박근혜는 모른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와 어버지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뭔가 다른 사람하곤 좀 다르지 않겠느냐”는 김 시인의 발언에 대해 “속으로 그 말을 듣고 좀 웃었다”며 “부모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어떻게 박 후보 혼자 뿐이겠느냐. 그 사실만으로만 본다면 박 후보는 인간적으로 측은한 후보라는 걸 인정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그러나 우리는 박 후보의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나 이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20여 년간 권력 중심에서 분단이라는 체제를 끌어왔고, 또 장기집권에 따라서 권력 누수 현상이 생겼다. 그 장본인이 박정희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육영수 여사 피격에 대해서는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그런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아니냐”며 “분단으로 생긴 전쟁도 있고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박정희라는 대통령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여성대통령론에 대해서는 “여성 지도자는 언제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박 후보가 과연 여성을 대표할 인물인가, 우리나라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던 시절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남편수발, 자식수발 하면서 고생하며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모르겠지만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는 시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박근혜와 아버지의 공통점은 뭔가?..

그냥.. 부녀지간일뿐.. 그들의 정치적인 이념이나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별개의 사람일뿐..

..

 하지만.. 그 딸의 선거에서.. 그의 부모를 들고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마치... 박근혜가.. 흑인이었다면.. 아니면.. 장애인이었다면..

그 배경을 공격하는것과 다를바가 없다..

..

..

그렇다면.. 우리는 노무현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까?..

..

선거란..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공약을 봐야한다..

시인이라고.. 말 함부러 하지마라.

연탄에 쳐 박힌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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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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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개와 멍멍이

2012. 11. 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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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에 새살이 돋듯… 새 꿈이 솟습니다
다시 화장하고 외출까지 악몽의 3년… 출근길 엄마의 잔소리에 코끝이 찡

《대낮 길거리 칼부림, 퇴근길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거의 매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이런 뉴스가 몹시 불편하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저런 범죄를 당한 이들은 얼마나 끔찍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렸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생생히 살아난다. 저 범죄 기사의 피해자도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까지는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공분하겠지만 사건은 금방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 후의 삶을 살아내는 건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황산에 당했던 그날 이후, 3년을 지나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 3년 전 예고 없던 공포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매일 똑같은 인사말이 잔소리처럼 들렸다. 2009년 6월 8일 오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세상에 저 여자 어떡하면 좋아.”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 듯한 고통이 피부를 파고들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헤집는 듯했다.

고통은 순간에 찾아왔다. 저벅저벅. 발을 끌지 않는 남자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얼굴과 목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막은 팔과 손등에도 불처럼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프고 무서워 집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잘 몰랐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전화기도 힘없이 바닥으로 굴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엄마가 달려 나오는 모습, 구급차가 삐뽀삐뽀 소리를 내며 나를 옮기는 장면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난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날 출근길에 나는 ‘황산테러 피해자’가 됐다. 2007년 그만둔 옛 직장 대표와 그의 사주를 받은 동료들 짓이었다. 밀린 임금과 투자금을 내놓으라고 낸 소송에서 내가 이기자 앙심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범죄 피해자로서의 삶은 아무런 예고 없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는 건 아마 이날, 여기까지일 거다.

○ 지옥이 시작되다

“아이고, 우리 딸 어쩌나.”

엄마 우는 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고 또박또박 상태를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몸 전체 피부의 25%가 황산에 타버렸고, 황산은 피부 속으로 침투해 살을 태워 일반 화상보다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의료진은 “환자 몸에 뿌려진 황산 800mL는 순도 99%로 돼지고기 한 점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일 수 있는 강도”라고도 했다. 말보다 치료과정은 더 무서웠다. 상처에 닿은 의료기구가 ‘슥, 스∼윽’ 소리를 내며 긁어내면 시커멓게 변한 내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소독약이 살 속으로 파고들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생명수다, 나를 살리는 생명수다.’

아프다고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병원비 걱정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경기 성남시에서 2400만 원짜리 13평 전셋집에 사는 운전사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가 감당하기에 ‘황산테러’ 치료비는 ‘또 다른 테러’처럼 보였다. 치료비는 최소 4000만 원이라고 했다.

병원비를 아끼려고 내 허벅지 살을 떼어 얼굴 피부에 이식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큰돈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정부가 범죄 피해자에게 준다는 ‘구조금’이었다. 구조금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지만, 그조차도 선정되지 못했다. 주로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팔다리를 움직여 생활하는 데 별문제 없다는 이유였다.

온종일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몸 일부가 불구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나?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치료비 지원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불에 타는 게 나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화상 환자들처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 거울에 비친 ‘검은 나’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얼굴 반쪽은 검붉은 색이었고 군데군데 누런 고름이 보였다. ‘울퉁불퉁’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치지 않은 얼굴 부분이 오히려 낯설었다.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내 모습은 잊기로 했다. 눈물이 났다. 병실에 찾아온 친구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을 보거나 손에 든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을 때 친구는 “괜찮아”라며 위로를 건넸지만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빨리 나가길 바랐다. 낮에도 커튼을 쳤고 그것도 모자라 아줌마들처럼 선캡을 쓰고 모자까지 겹쳐 썼다. 화상 부위가 한 조각이라도 햇빛에 노출되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다친 내 마음까지 가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어둡고 컴컴한 곳에 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발버둥을 쳐봐도 그대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꿈인 줄 알았는데 깨보니 눈물이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우울증이 왔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생살을 긁어내는 화상 치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상처, 사고 당시의 기억이었다.

○ 우연처럼 찾아온 희망

병원 1층 로비 맨 구석 자리에서 엄마 손에 쥐여 있던 손수건은 그날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코 풀고 눈물 닦은 휴지도 한가득. 그때 로비는 한 비영리단체가 화상 아동에게 후원금을 전달하는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엄마는 무작정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담당자를 찾아 ‘딸이 많이 아픈데 제발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고 병실로 데려왔다. 내 얼굴을 보고, 당시 사건 기사를 기억한 단체 관계자들은 그 자리에서 ‘돕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하늘이 도왔다”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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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의 후원으로 치료비를 마련하게 되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쓴 글. 연필 잡기가 쉽지 않아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이 단체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려 후원금을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내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2주일이 흘렀을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후원금으로 7000만 원이 모였어요. 병원비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요.’

얼굴도 모르는 수천 명이 나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니. 이 후원금 덕분에 ‘4000만 원 완납’이 찍힌 영수증을 받게 됐다. 남은 돈은 집을 옮기는 데 보탰다. 정이 든 집이지만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퇴원할 무렵 새로 다니던 직장 사장과 동료들도 병원을 찾아왔다. 친구들이 왔을 때와 달리 눈도 마주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다 보니 이런 말이 들렸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꼭 다시 회사로 나와 줘요.”

일도 하지 못했는데 6개월 치 월급을 통장에 넣어줬다. 후원은 그 뒤로도 쏟아졌다. 범죄 피해자를 돕는 또 다른 민간단체에서는 성형수술을 지원해줬다. 하얗다고는 할 수 없어도 고름은 사라졌고 비포장도로 같던 얼굴은 화장품을 발라도 될 정도로 팽팽해졌다. 아예 보이지 않던 귀도 분명, 사람의 귀로 다시 태어났다. 고된 1년간의 성형이 헛되지는 않았다.

2009년 10월 퇴원 직후부터는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심리치료 첫날 들은 이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자책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나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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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흘렀다. 누군가 “괜찮니?”라고 물으면 가끔은 등 쪽에서 땀 한 줄기가 흐르는 듯하다가도 웃으면서 “당근이지”라고 받아치기도 한다. 고통을 이겨낸 나 자신에게 코끝이 찡해질 만큼 고맙다.

올해 초부터는 다시 아침마다 옷을 고르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며 회사 출근길을 재촉한다. 대학원 학생증도 손에 쥐어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상담사 자격증을 따 범죄 피해자들의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게 목표다. 지난 한 해 강도나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 피해 건수가 13만3900건에 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다행히 범죄 피해자들을 다루는 법안이 2010년 개정돼 나 같은 사람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고 피해자 분류도 6단계에서 10단계로 지원 대상이 늘었다고 한다. 이제라도 보다 많은 범죄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게 돼 다행이지만, 예전의 나처럼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채 고통 속에 방치되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이제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 할 숙제만이 남았다. 옛 회사 대표는 2년 전 징역 15년 확정 판결을 받았고 대표의 지시를 받고 직접 범행을 저지른 직원들도 중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이들을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날이 밝았다. 오늘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한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잔소리’가 들린다. 2012년 11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다.

다시 집을 나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나는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 취재기자의 말 ::

긴 인터뷰를 마친 박정아(가명) 씨는 “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나에게 평범한 출근길을 되돌려준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나나, 피해자 잘못이 아니에요. 꼭 힘내서 이겨내세요.”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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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놈 기저귀를 인터넷으로 주문하려고 

익스플로러를 켰다.


메인으로 된 네이놈가 뜨는 동안 주소창에..

억션을 쳐넣었따...


그 순간... 

로딩된 네이놈 메인 페이지에 이나영의 히트텍입은 사진이 떠있는게 보인다... 


'아차'...


하지만.. 이미 페이지는 억션으로 넘어갔다..

다시 뒤돌려서 네이놈으로 갔지만... 어디에도.. 이나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20분동안의 서핑으로.. 찾아낸 기사..



유니클로 `히트텍 대란`…얼마나 싸길래


..

.

..

그래... 다 이나영때문이야..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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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 110억 기부한 故유회진 교수 기리려 스승·친구 모여
"부모·형제없이 떠난 그… 매년 제사 우리가 챙기자" 스승·친구 1년전 약속 지켜

9일 새벽 경기도 안성시의 유토피아 추모관. 산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추모관 주변에 짙은 안개가 내리깔렸다. 오전 9시, 아무도 없던 추모관의 예식실에 노신사가 걸어 들어왔다. 예식실 앞 대형 TV에는 한 중년 남성의 사진만이 초상화 대신 떠 있었다.

"1년 전 이맘때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이장무(67) 전 서울대 총장이었다.

중년의 남성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색 정장과 넥타이를 갖춰 입은 신사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유회진(53) 전 동아대 교수를 기리는 제사가 시작됐다. TV 속 영정을 향해 절을 한 이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유 전 교수 제사의 제주(祭主)는 서울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유 전 교수는 외아들이었던 탓에 형제도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 110억원을 기부받은 모교 서울대가 상주(喪主)로 나섰고, 은사(恩師)와 친구들이 동참했다.

"자신에게 매우 인색했지만, 사회를 향한 마음은 넉넉했던 내 친구를 되새깁니다. 당신이 확고한 마음으로 베푼 사랑은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영재(54)씨의 추모사가 20㎡ 남짓한 예식실에 울려 퍼졌다.

9일 오전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열린 고 유회진 전 교수(왼쪽 위 작은 사진) 1주기 추모식.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사진 오른쪽부터), 유 전 교수의 외사촌 형 손영석씨, 공대 이우일 학장이 국화꽃을 든 채 눈을 감고 유 전 교수를 추모하고 있다. /최영호 객원기자

중학교 때부터 유 전 교수의 친구였던 임씨는 어릴 적 작은 한옥에 살던 죽마고우를 떠올렸다. 임씨는 "중학교 시절 항상 절약하던 회진이네가 그렇게 돈이 많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그게 몸에 밴 회진이였고, 부모님의 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암 투병 생활 때도 병원비 외에는 일절 돈을 쓰지 않았던 친구였다.

그는 아낀 돈으로 학사·석사 시절을 지냈던 서울대에 기부를 약속했다. 구강암 판정을 받은 그해 11월, 은사였던 당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을 찾아가서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 죽기 전에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면서 전 재산 기부의 뜻을 밝혔다. 친구들은 "모교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기부 약속을 하고 2년 후인 지난해 11월 10일 끝내 숨을 거뒀다.

"돈도 굉장히 있었는데, 인색한 편이었어요. 짠돌이 같았다고나 할까요?"

대학동기 윤병옥(54)씨는 친구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에게 유 전 교수는 과제를 베끼는 것도, 실험을 대신 해주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 윤씨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가 원칙에 따라 내린 선택이 기부가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뭘 해도 열심히 하는 제자였죠. 교수가 되고 나서도 굉장히 겸손했던 친구였습니다."

제자를 위해 유학 추천서를 써줬던 이장무 전 총장에게 유 전 교수는 조용하고 꼼꼼한 학생이었다. 투병 기간 중 병문안을 갈 때마다 제자는 "기부금을 꼭 이공계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 살뜰히 챙겼다고 한다. 이 전 총장은 "자신의 성공이 학교와 사회의 도움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제자가 기부를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친구들은 유 전 교수가 넓은 인간관계를 갖진 못했지만 한번 통한 사람과 오래가고, 마음먹은 일은 확실히 하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운동에 몰두한 유 교수는 1981년 미스터코리아 선발 대회 헤비급 2위에 입상했다.

"하루는 전화가 와서 중매 좀 해달라고 말하더랍니다. 소개팅도 좀 해주고 그러지 왜 회진이를 총각 귀신 만들었어요." 이날 유 전 교수의 1주기에 친척으로 유일하게 참석한 외사촌 형 손영석(64)씨의 말에 상주들은 웃음보를 터트렸다. "자기 자신에게 후하면, 쓰는 재미에 빠져 기부는 못 하는 것일까요?" 주종남(56) 기계항공공학부 학부장의 말에 모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11시. 추모관 주변은 여전히 안개가 짙게 깔렸다. 내년을 기약한 유 전 교수의 상주들이 안개 속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상주들이 모두 떠나고 얼마 뒤,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추모관 앞산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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