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chosun.com/article.html?contid=2013021200048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고봉중·고등학교(서울소년원)는 19세 미만 청소년이 보호 처분을 받고 격리 생활을 하는 전국 11개 소년원 중 하나다. 280여명이 짧게는 6개월부터 길게는 2년까지 격리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소년범들에게 '가족'은 무엇일까. 기자는 소년원 측에 인터뷰 주선을 요청했고, 그중 10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모두 사회에 가족이 있는 아이들이었고, 가족이 없는 아이들은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소년원 관계자는 "소년범 대부분이 결손가족 등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며 "아이들이 가족에 대해 너무 안 좋은 말만 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대부분 아이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 보니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돌아갈 가족이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인터뷰에 응한 아이들은 소년원에서 가족조차 없는 더 불행한 아이들을 만났고, 잊고 있던 가족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가족은 '날 때리는 사람들'이었다는 문용(가명·18)이는 처음 소년원 처분을 받고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사고 칠 때마다 아빠랑 형들이 날 죽일 듯이 때렸어요. 서로 욕하고 미워하는데 안 보게 돼서 잘됐다 싶었지요." 그런데 목포에 사는 아버지, 형들이 매주 한 명씩 번갈아 면회를 왔다. 한 번만 오고 말 줄 알았는데 계속 왔다. 문용이는 "형한테 왜 오냐고 물어봤는데 '네가 막 보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다. 그래도 동생이라 걱정이 되니까 오는 거다'라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엄마 살아계실 때 기억이 나더라고요. 5년 전에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1주일 전쯤 둘이 산책을 나갔는데 엄마가 그랬어요. '우리 문용이, 계속 사고 쳐서 형이랑 아빠한테 맞으면 어쩌지? 엄마 죽으면 이제 말려줄 사람도 없을 텐데'라고요. 돌이켜보니 나는 우리 엄마 죽을 때까지 걱정만 하게 만들었더라고요. 남은 가족한테도 그랬고요." 문용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소년원에도 '모범생'이 있다. 그렇게 달라진 모범 소년범의 변화 뒤엔 대개 가족이 있었다. 소년원에서 제과·제빵기능사에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딴 윤석(가명·18)이가 그런 경우다. 상습폭행·금품갈취로 2년형을 받은 윤석이는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열두 살 때까지 함께 살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만난 아빠는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윤석이는 "없는 것만도 못한 집구석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출을 밥 먹듯 하던 윤석이는 술 취한 아저씨들을 골라 폭행하고 돈을 뺏다 소년원에 왔다.

윤석이를 바꿔놓은 것은 아빠와 여동생이 꼬박꼬박 보내 준 편지였다. "편지가 올 때마다 자기도 보여달라는 애들이 많았어요. 당연히 안 보여줬지요. 나중에 알았는데 걔들은 편지 보내줄 가족이 없더라고요." 윤석이는 "나는 걔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았는데 똑같이 사고 쳐서 여기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 창피했고, 아빠랑 동생한테도 미안했다"고 말했다. 없는 것만도 못했던 집구석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후 윤석이는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경찰서에서 만난 아빠가 '내가 너를 혼낼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땐 대꾸도 안 했어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지금도 마음에 걸려요." 윤석이는 "미안하다는 말은 쑥스러워서 못하겠다. 여기서 나가면 가장(家長) 역할을 톡톡히 해서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년원에서 측량사 자격증을 딴 홍중(가명·19)이는 차량 상습절도로 소년원에 왔다. 홍중이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내가 잘사는 줄 알았다. 그게 좋았다"라고 말했다. 홍중이가 세 살 때 이혼한 부모는 남매를 보육원에 맡기고 각자 새살림을 차렸다. 홍중이가 중학교 때 아빠와 엄마를 차례로 찾았지만, 둘 다 '미안하다'는 말뿐 함께 살자고 하지 않았다. 누나를 남겨두고 혼자 보육원을 뛰쳐나온 홍중이는 그때부터 차를 훔치고 돌아다녔다.

경찰에게 붙잡혀 들어온 소년원, 편지를 나눠주는 시간에도 홍중이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중이에게도 편지가 왔다. 누나였다. 그 후 누나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퇴소가 한 달도 안 남은 홍중이의 편지 모음 봉투는 누나 편지로 가득 찼다.

"누나가 편지에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우리가 이해하자. 너랑 나랑 잘살면 된다'예요. 아직 엄마, 아빠는 이해 안 되고 용서도 안 돼요. 그런데 우리 누나, 하나 남은 가족인 나까지 속썩이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앞으로는 누나한테 든든한 동생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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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피임약이 지난 9일로 판매 50주년을 맞았다. 1960년 이날 미국 식품의약국은 제약회사 시얼(Searle)이 여성호르몬 이상 치료제로 개발했던 에노비드(Enovid)의 피임 효과를 인정하고 경구피임약으로 판매를 허가했다.

에노비드는 1998년 세계 지식인 포럼인 '에지'가 선정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 121개'에 뽑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콜린 블래이크모어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변화시킨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했다.

먹는 피임약 전과 후의 세상은 달라졌다. 임신과 육아에 묶여 있던 여성들이 스스로 임신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임신의 공포에서 해방되면서 성(性)도 개방됐다. 단순 신약(新藥)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든 현상이 된 것이다.

경구피임약 개발은 남자들이 했지만 약이 발명되기까지 험난한 여정은 마거릿 생거가 헤쳐나갔다. 생거는 최초로 산아제한운동을 제안한 간호사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생거는 1879년 9월 미국 뉴욕주 코닝에서 가난한 석공(石工)의 딸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생거의 어머니는 18차례 임신을 거쳐 11남매를 낳았다. 생거는 여섯째였다. 생거는 태어나자마자 방치돼 죽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숱한 아기들을 보며 자랐다. 당시 콘돔이 있었지만 고가인 데다 남자들은 이를 기피했다.

결혼한 후 맨해튼으로 이사한 생거는 1912년 간호사로 일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새디 작스라는 여잔데, "혼자서 낙태를 하려다가 하혈이 심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치료를 끝낸 후 작스가 물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동행한 남자 의사가 대답했다. "섹스를 절제하면 된다." 몇 달 뒤 작스의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생거의 눈앞에서 새디 작스는 또다시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어 있었다. 생거는 훗날 "자포자기에 빠진 여성들을 위험천만한 낙태로부터 구원해야겠다고 저절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1914년 생거는 '여성들의 반란'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우편으로 배포했다. 피임의 방법과 산아 제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정부는 이 책자를 포르노물로 규정했다. 생거는 영국으로 1년 동안 망명했다. 생거 대신 남편이 책자를 직접 돌리다가 음란물 유포죄로 구류를 살았다. 1916년 생거는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사춘기의 성, 자위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그 해 생거는 뉴욕 브라운스빌에 세계 최초로 '가족계획 클리닉'을 개원했다. 9일 뒤 경찰이 압수수색을 실시했고 생거는 30일 구류형을 받았다. 역시 포르노물 유포죄.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생거에게 동조자들이 생겨났다.

1918년 뉴욕시는 생거에 동조하는 명사(名士)들의 여론에 밀려 클리닉을 허용했다. 1921년 생거는 '미국산아제한연맹'을 결성했다. 1923년 마침내 여성 의료진과 직원으로 구성된 첫 번째 합법적인 산아제한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거부(巨富) 록펠러 가문이 그를 후원했다. 1921년부터 1926년 사이에 생거의 조직으로 쏟아진 편지는 100만 통이 넘었다. 피임 방법을 묻는 엄마들 편지였다.

1936년 마침내 피임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풍속 교란 방지법이 개정됐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피임 정보를 제공받게 된 것이다.

1939년 생거는 뉴욕 할렘가에 근거를 두고 '니그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니그로(Negro)'는 당시 흑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성에 대한 무지와 빈곤으로 피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흑인 여성들을 교육했다.

생거의 고민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불편한 피임도구, 그러니까 여성의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각종 피임도구 없이 간편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굳이 비용을 치르며 병원까지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1950년 생거는 15만달러를 먹는 피임약 개발 기금으로 내놨다. 1934년 그레고리 핀커스라는 생물학자가 호르몬을 조작해 토끼의 배란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근 20년이 지난 1953년 생거가 핀커스를 찾아갔다.

"사람도 가능하지 않은가." 핀커스는 제약회사 시얼사(社)에 개발을 제안했다. 사회적 비난을 예상한 시얼사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1957년 이 회사 연구원 하나가 우연하게 피임효과가 있는 물질을 개발한 것이다. 핀커스는 그 물질을 자기 연구소로 가져와 실험에 몰두했다. 처음부터 먹는 피임약이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게 뻔해 여성호르몬 이상증 개선제로 시판했다. 에노비드는 3년 뒤 FDA가 이 약의 피임효과를 인정하면서 정식으로 경구피임약이 됐다.

시얼사는 그 덕에 시장을 독점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시판 3년 동안 미국 여성 120만명이 에노비드를 구입했다. 1965년 연방 대법원은 정부가 임신이라는 사적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국의 모든 주에서 피임약이 합법화됐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생거는 여성 해방의 시대를 생전에 목격하고 1966년 9월에 87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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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조국과 미국 내 한인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출신 사업가 박형만(74)씨와 윤병인(73)씨는 지난 10일 LA 주재 총영사관에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일 LA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해외 진출이 드물던 1960년대에 남들보다 먼저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봉사할 기회도 먼저 얻게 됐을 뿐"이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했다.

◇'막장 정신'으로 성공… "재산 절반 사회 환원"

박형만씨는 충남 공주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2년 만에 중퇴한 뒤 서울 은평구의 한 공장에 미화원으로 취직한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다 27세이던 1964년 7월 파독 광부가 되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씨는 "5개월 뒤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고생한다'고 말한 연설을 들었다"며 "그날 많이 울면서 '정말 잘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힘든 광산 일을 마치고 오후 3시에 다시 인근 축사로 출근해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계약된 3년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2만4000마르크를 모았다. 서울에서 아파트 3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걸 당시 남편을 잃고 고생하던 누나에게 대부분 보냈습니다.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미국 LA로 건너갔습니다. 막장일을 하고 나니 어딜 가도 겁날 게 없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청소하며 시간당 1.45달러를 버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종이컵 공장으로 옮겨선 하루 12시간씩 연장 근무를 해 주당 200달러를 벌었다. 독일서 만나 결혼한 부인 이숙희씨도 간호사로 취직해 월 1200달러를 벌어 왔다. 적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월세 65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2년여 만에 3만달러를 모아 주류(酒類) 상회를 열었고 이어 주유소를 냈다. 박씨는 현재 건물 24채를 가진 자산 1억달러대의 부동산 임대업자가 됐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그에게 미국인들이 '한국 유대인(Korean Jewish)'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고향인 공주의 저소득층 417명에게 총 2억4255만원을 기부했다. 자선사업을 더 크게 하기 위해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만희복지재단' 설립도 추진 중이다. 그는 "재산의 절반인 5000만달러를 출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소해서 모은 돈, 교포사회에 써

윤병인씨는 1965년 개인사업을 접고 독일로 간 직후 막장 천장에서 떨어진 돌에 손이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6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은 그는 더 이상 광산 일을 할 수 없었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 빈손으로 귀국할 수 없다며 떠올린 것이 미국행이었다.

 

1966년 LA로 건너간 윤씨는 하루 4시간만 자고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오전에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고 오후에는 선반 공장에서 기계를 깎았다. 1년2개월 만에 9000달러를 모아 주유소를 샀다. 돈은 벌 만큼 벌었다고 생각한 윤씨는 1974년 귀국했지만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의 70%가 넘는 2만달러 이상을 날렸다. 2년 만에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남은 돈으로 항공기 청소 용역사업을 시작했다.

"고객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군말 없이 한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직원들이 청소를 끝낸 항공기는 반드시 제가 직접 마지막 점검을 했습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36개 항공사가 LA국제공항, 샌프란시스코공항, 새너제이공항에서 윤씨에게 일을 맡겼다. 연매출이 1800만달러까지 올랐다.

재기에 성공한 윤씨는 LA 지역 한인 사회를 위해 뛰고 있다. 2007년 LA 사우스베이 한인상공회의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무렵 사우스베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한인 소상인들은 한·미 간 사업 관행과 문화 차이 등으로 시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사례가 많았다. 그들이 윤씨를 찾아가 "우리의 창구가 돼 달라"며 도움을 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무실 월세와 운영비에 들어가는 월 3000달러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그는 "소상인들 사정이 그리 넉넉할 것 같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작년엔 두 사람과 재미 서독동우회장 김창수씨가 각각 1만달러(약 1060만원)씩 3만달러를 내 현지에 한인 노인회관도 만들었다. 독일 또는 한국에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또는 흉상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LA 지역 교민들이 뜻을 함께해 지금까지 1만달러 가까이 모았다. 두 사람은 "오늘의 우리와 대한민국이 있게 한 역사의 출발점을 기리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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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아이들과 함께 해돋이 보러 강원도 속초로 갈 거예요. 'ITX (준고속열차)'를 타고 가서 생전 처음 동해 바다도 보고, 눈썰매도 타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27일 오후 경기도 부천 역곡역에서 만난 김행균(51) 역장은 다음 달 22일로 예정된 새해맞이 여행 얘기를 꺼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인천 지역 5개 보육원 아이 300명과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속초로 가는 1박 2일 기차 여행이다. 김 역장은 "여행도, 바다를 보는 것도 처음인 아이들이 많아 일출 시각부터 간식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김 역장이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섯 번째 기차 여행이다. 2001년 1월부터 작년 1월까지 다섯 번의 여행에 1600명 넘는 아이가 김 역장을 따라나섰다.

김 역장의 기차 여행은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2001년 당시 3년째 인천의 한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김 역장은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김 역장은 "부모만 있었으면 여기저기 다녔을 아이들이 바다 한번 본 적 없다는 말을 듣고 함께 새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첫 여행은 소박했다. 보육원 아이 50명과 무궁화호를 타고 정동진에 가서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김 역장은 "바다를 보며 연방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본 뒤 매년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꿈은 김 역장이 서울 영등포역 운용팀장으로 있던 2003년 열차 사고를 당하면서 중단됐다. 그해 7월 25일 김 역장은 기차가 들어오는데도 플랫폼 근처에서 놀고 있던 다섯 살 아이를 구하다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이 잘렸다. 이 사고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김 역장은 '아름다운 역무원'으로 불렸다 본지 2003년 7월 26일 A9면〉.

김 역장은 이 사고로 5번 이상 수술을 받았다. 발목이 잘린 왼쪽 다리는 의족을 끼우기 위해 무릎 아래까지 절단했다. 발등이 잘린 오른쪽 다리는 인공 피부를 덧씌우고 특수 신발을 신겼다. 진통제와 수면제 없이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김 역장은 재활 치료 후 1년 만에 역으로 복귀했다. 김 역장은 "날 돌아오게 한 건 당시 함께 기차 여행을 갔던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사고 후 종일 병실에 누워 있었어요.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편지를 들고 병문안을 온 거예요. 눈물이 났습니다. 빨리 일어나서 다시 아이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한 아이의 편지에 '저는 해가 뜨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저는 저 태양처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저도 역장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김 역장은 복귀 후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만난 유명 인사들에게 '기차 여행'에 대해 설명하며 기부금을 모았다. 2006년 초에는 한 방송국 협찬으로 킬리만자로 등반도 했다.

그는 2010년 전후 신종플루 등이 유행한 때를 제외하곤 2007년부터 매년 1월이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기차 여행을 떠났다. 매년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 2500만원은 코레일과 아동복지연합 등의 지원금에 그의 사비를 보태 마련했다.

김 역장의 '기차 여행'이 계속되면서 아이들의 편지도 이어졌다. 지금까지 받은 편지만 1200통이 넘는다. 김 역장은 "대학생이나 직장인이 된 아이들도 감사하다며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김 역장은 지금도 절뚝거리는 다리로 역사 곳곳을 누빈다. 직접 선로에 내려가 사고사한 시신을 수습한 건만 10건이 넘는다. 그는 "내 사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처참하게 삶의 마지막을 맞은 분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9년 전 자신의 사고를 회상하던 김 역장은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뛰어들었고, 역무원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살린 아이와 아이 부로모부터 사고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대신 수많은 분의 위로와 관심을 받았잖아요. 민망하게 팬카페까지 생겼고요. 그 아이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습니다. 제 두 아이처럼 어디서든 잘 크기만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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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억원 기부한 77세 총각 할아버지의 방에 가보니

곽래건 기자 | 2012/12/24 03:01

 

 

서울 종로구 필운동 골목길에 들어서자 나무 대문이 두꺼운 구옥(舊屋)이 나왔다. 집 마당엔 낙엽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고, 1.5L짜리 생수병은 꽁꽁 얼어 있었다. 냉장고 문은 붉게 녹슬어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반찬은 김치뿐이었다. 안방에는 이불과 신문, 옷가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안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이 방의 주인은 민정기(77)씨. 최근 30억원 상당의 재산을 장학 재단으로 등기 이전 중인 자산가다. 하지만 민씨가 이날 입고 있던 점퍼와 바지는 모두 인근 주민센터 직원들이 사줬다. 집안의 세탁기와 청소기, TV도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전 세탁기가 생기기 전까지 민씨는 손빨래를 했다. 김기선 사직동 주민센터장은 "매번 성금을 내시는데 본인한테는 전혀 투자를 안 해 보다 못한 직원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회사 생활과 사업을 한 민씨는 1970년 즈음부터 이 집에서 아버지 고(故) 민병욱씨와 살았다. 25년 가까이 한동네에서 산 김종구(61)씨는 "'회사 생활과 장사 때문에 결혼 시기를 놓쳤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형제는 모두 출가했다고 한다. 3남 2녀 중 막내아들인 민씨는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아침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해삼을 사와 논에서 잡은 우렁과 함께 밥상에 올렸다. 아버지가 2003년 병원에 입원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 수발을 들었다. 2005년 초 민씨 본인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이틀 만에 퇴원해 병구완을 계속했다. 이듬해 어버이날에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는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잘했다'는 말 한 번 안 한 아버지가 훈장을 보여드렸을 때는 눈물을 흘리셨다"며 울먹였다. 아버지는 반년 뒤 세상을 떴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자식들을 모두 서울 등지로 유학 보냈다. 민씨는 전남대 문리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민씨는 아버지 재산으로 장학 재단을 세웠다. 재단 이름은 아버지 호와 이름을 따 '제봉민병욱장학재단'으로 지었다. 들어간 부동산은 공시지가로 20억원에 달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장학금을 받은 인원만 38명. 1억8335만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민씨는 "'세상에 태어나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평소 뜻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재단 재산은 더욱 불어날 전망이다. 김명좌 법무사는 "민씨가 보유한 땅과 상가를 모두 장학 재단으로 등기 이전하는 중"이라며 "시가로 32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민씨가 재산을 모두 내놓는 건 작년 말부터 건강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씨는 "요즘엔 꿈에서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며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인 장학 재단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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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번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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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개와 멍멍이

2012. 11. 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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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에 새살이 돋듯… 새 꿈이 솟습니다
다시 화장하고 외출까지 악몽의 3년… 출근길 엄마의 잔소리에 코끝이 찡

《대낮 길거리 칼부림, 퇴근길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거의 매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이런 뉴스가 몹시 불편하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저런 범죄를 당한 이들은 얼마나 끔찍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렸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생생히 살아난다. 저 범죄 기사의 피해자도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까지는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공분하겠지만 사건은 금방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 후의 삶을 살아내는 건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황산에 당했던 그날 이후, 3년을 지나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 3년 전 예고 없던 공포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매일 똑같은 인사말이 잔소리처럼 들렸다. 2009년 6월 8일 오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세상에 저 여자 어떡하면 좋아.”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 듯한 고통이 피부를 파고들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헤집는 듯했다.

고통은 순간에 찾아왔다. 저벅저벅. 발을 끌지 않는 남자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얼굴과 목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막은 팔과 손등에도 불처럼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프고 무서워 집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잘 몰랐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전화기도 힘없이 바닥으로 굴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엄마가 달려 나오는 모습, 구급차가 삐뽀삐뽀 소리를 내며 나를 옮기는 장면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난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날 출근길에 나는 ‘황산테러 피해자’가 됐다. 2007년 그만둔 옛 직장 대표와 그의 사주를 받은 동료들 짓이었다. 밀린 임금과 투자금을 내놓으라고 낸 소송에서 내가 이기자 앙심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범죄 피해자로서의 삶은 아무런 예고 없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는 건 아마 이날, 여기까지일 거다.

○ 지옥이 시작되다

“아이고, 우리 딸 어쩌나.”

엄마 우는 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고 또박또박 상태를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몸 전체 피부의 25%가 황산에 타버렸고, 황산은 피부 속으로 침투해 살을 태워 일반 화상보다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의료진은 “환자 몸에 뿌려진 황산 800mL는 순도 99%로 돼지고기 한 점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일 수 있는 강도”라고도 했다. 말보다 치료과정은 더 무서웠다. 상처에 닿은 의료기구가 ‘슥, 스∼윽’ 소리를 내며 긁어내면 시커멓게 변한 내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소독약이 살 속으로 파고들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생명수다, 나를 살리는 생명수다.’

아프다고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병원비 걱정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경기 성남시에서 2400만 원짜리 13평 전셋집에 사는 운전사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가 감당하기에 ‘황산테러’ 치료비는 ‘또 다른 테러’처럼 보였다. 치료비는 최소 4000만 원이라고 했다.

병원비를 아끼려고 내 허벅지 살을 떼어 얼굴 피부에 이식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큰돈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정부가 범죄 피해자에게 준다는 ‘구조금’이었다. 구조금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지만, 그조차도 선정되지 못했다. 주로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팔다리를 움직여 생활하는 데 별문제 없다는 이유였다.

온종일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몸 일부가 불구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나?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치료비 지원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불에 타는 게 나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화상 환자들처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 거울에 비친 ‘검은 나’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얼굴 반쪽은 검붉은 색이었고 군데군데 누런 고름이 보였다. ‘울퉁불퉁’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치지 않은 얼굴 부분이 오히려 낯설었다.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내 모습은 잊기로 했다. 눈물이 났다. 병실에 찾아온 친구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을 보거나 손에 든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을 때 친구는 “괜찮아”라며 위로를 건넸지만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빨리 나가길 바랐다. 낮에도 커튼을 쳤고 그것도 모자라 아줌마들처럼 선캡을 쓰고 모자까지 겹쳐 썼다. 화상 부위가 한 조각이라도 햇빛에 노출되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다친 내 마음까지 가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어둡고 컴컴한 곳에 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발버둥을 쳐봐도 그대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꿈인 줄 알았는데 깨보니 눈물이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우울증이 왔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생살을 긁어내는 화상 치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상처, 사고 당시의 기억이었다.

○ 우연처럼 찾아온 희망

병원 1층 로비 맨 구석 자리에서 엄마 손에 쥐여 있던 손수건은 그날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코 풀고 눈물 닦은 휴지도 한가득. 그때 로비는 한 비영리단체가 화상 아동에게 후원금을 전달하는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엄마는 무작정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담당자를 찾아 ‘딸이 많이 아픈데 제발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고 병실로 데려왔다. 내 얼굴을 보고, 당시 사건 기사를 기억한 단체 관계자들은 그 자리에서 ‘돕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하늘이 도왔다”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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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의 후원으로 치료비를 마련하게 되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쓴 글. 연필 잡기가 쉽지 않아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이 단체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려 후원금을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내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2주일이 흘렀을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후원금으로 7000만 원이 모였어요. 병원비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요.’

얼굴도 모르는 수천 명이 나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니. 이 후원금 덕분에 ‘4000만 원 완납’이 찍힌 영수증을 받게 됐다. 남은 돈은 집을 옮기는 데 보탰다. 정이 든 집이지만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퇴원할 무렵 새로 다니던 직장 사장과 동료들도 병원을 찾아왔다. 친구들이 왔을 때와 달리 눈도 마주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다 보니 이런 말이 들렸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꼭 다시 회사로 나와 줘요.”

일도 하지 못했는데 6개월 치 월급을 통장에 넣어줬다. 후원은 그 뒤로도 쏟아졌다. 범죄 피해자를 돕는 또 다른 민간단체에서는 성형수술을 지원해줬다. 하얗다고는 할 수 없어도 고름은 사라졌고 비포장도로 같던 얼굴은 화장품을 발라도 될 정도로 팽팽해졌다. 아예 보이지 않던 귀도 분명, 사람의 귀로 다시 태어났다. 고된 1년간의 성형이 헛되지는 않았다.

2009년 10월 퇴원 직후부터는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심리치료 첫날 들은 이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자책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나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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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흘렀다. 누군가 “괜찮니?”라고 물으면 가끔은 등 쪽에서 땀 한 줄기가 흐르는 듯하다가도 웃으면서 “당근이지”라고 받아치기도 한다. 고통을 이겨낸 나 자신에게 코끝이 찡해질 만큼 고맙다.

올해 초부터는 다시 아침마다 옷을 고르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며 회사 출근길을 재촉한다. 대학원 학생증도 손에 쥐어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상담사 자격증을 따 범죄 피해자들의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게 목표다. 지난 한 해 강도나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 피해 건수가 13만3900건에 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다행히 범죄 피해자들을 다루는 법안이 2010년 개정돼 나 같은 사람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고 피해자 분류도 6단계에서 10단계로 지원 대상이 늘었다고 한다. 이제라도 보다 많은 범죄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게 돼 다행이지만, 예전의 나처럼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채 고통 속에 방치되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이제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 할 숙제만이 남았다. 옛 회사 대표는 2년 전 징역 15년 확정 판결을 받았고 대표의 지시를 받고 직접 범행을 저지른 직원들도 중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이들을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날이 밝았다. 오늘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한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잔소리’가 들린다. 2012년 11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다.

다시 집을 나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나는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 취재기자의 말 ::

긴 인터뷰를 마친 박정아(가명) 씨는 “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나에게 평범한 출근길을 되돌려준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나나, 피해자 잘못이 아니에요. 꼭 힘내서 이겨내세요.”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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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 110억 기부한 故유회진 교수 기리려 스승·친구 모여
"부모·형제없이 떠난 그… 매년 제사 우리가 챙기자" 스승·친구 1년전 약속 지켜

9일 새벽 경기도 안성시의 유토피아 추모관. 산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추모관 주변에 짙은 안개가 내리깔렸다. 오전 9시, 아무도 없던 추모관의 예식실에 노신사가 걸어 들어왔다. 예식실 앞 대형 TV에는 한 중년 남성의 사진만이 초상화 대신 떠 있었다.

"1년 전 이맘때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이장무(67) 전 서울대 총장이었다.

중년의 남성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색 정장과 넥타이를 갖춰 입은 신사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유회진(53) 전 동아대 교수를 기리는 제사가 시작됐다. TV 속 영정을 향해 절을 한 이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유 전 교수 제사의 제주(祭主)는 서울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유 전 교수는 외아들이었던 탓에 형제도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 110억원을 기부받은 모교 서울대가 상주(喪主)로 나섰고, 은사(恩師)와 친구들이 동참했다.

"자신에게 매우 인색했지만, 사회를 향한 마음은 넉넉했던 내 친구를 되새깁니다. 당신이 확고한 마음으로 베푼 사랑은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영재(54)씨의 추모사가 20㎡ 남짓한 예식실에 울려 퍼졌다.

9일 오전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열린 고 유회진 전 교수(왼쪽 위 작은 사진) 1주기 추모식.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사진 오른쪽부터), 유 전 교수의 외사촌 형 손영석씨, 공대 이우일 학장이 국화꽃을 든 채 눈을 감고 유 전 교수를 추모하고 있다. /최영호 객원기자

중학교 때부터 유 전 교수의 친구였던 임씨는 어릴 적 작은 한옥에 살던 죽마고우를 떠올렸다. 임씨는 "중학교 시절 항상 절약하던 회진이네가 그렇게 돈이 많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그게 몸에 밴 회진이였고, 부모님의 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암 투병 생활 때도 병원비 외에는 일절 돈을 쓰지 않았던 친구였다.

그는 아낀 돈으로 학사·석사 시절을 지냈던 서울대에 기부를 약속했다. 구강암 판정을 받은 그해 11월, 은사였던 당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을 찾아가서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 죽기 전에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면서 전 재산 기부의 뜻을 밝혔다. 친구들은 "모교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기부 약속을 하고 2년 후인 지난해 11월 10일 끝내 숨을 거뒀다.

"돈도 굉장히 있었는데, 인색한 편이었어요. 짠돌이 같았다고나 할까요?"

대학동기 윤병옥(54)씨는 친구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에게 유 전 교수는 과제를 베끼는 것도, 실험을 대신 해주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 윤씨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가 원칙에 따라 내린 선택이 기부가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뭘 해도 열심히 하는 제자였죠. 교수가 되고 나서도 굉장히 겸손했던 친구였습니다."

제자를 위해 유학 추천서를 써줬던 이장무 전 총장에게 유 전 교수는 조용하고 꼼꼼한 학생이었다. 투병 기간 중 병문안을 갈 때마다 제자는 "기부금을 꼭 이공계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 살뜰히 챙겼다고 한다. 이 전 총장은 "자신의 성공이 학교와 사회의 도움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제자가 기부를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친구들은 유 전 교수가 넓은 인간관계를 갖진 못했지만 한번 통한 사람과 오래가고, 마음먹은 일은 확실히 하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운동에 몰두한 유 교수는 1981년 미스터코리아 선발 대회 헤비급 2위에 입상했다.

"하루는 전화가 와서 중매 좀 해달라고 말하더랍니다. 소개팅도 좀 해주고 그러지 왜 회진이를 총각 귀신 만들었어요." 이날 유 전 교수의 1주기에 친척으로 유일하게 참석한 외사촌 형 손영석(64)씨의 말에 상주들은 웃음보를 터트렸다. "자기 자신에게 후하면, 쓰는 재미에 빠져 기부는 못 하는 것일까요?" 주종남(56) 기계항공공학부 학부장의 말에 모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11시. 추모관 주변은 여전히 안개가 짙게 깔렸다. 내년을 기약한 유 전 교수의 상주들이 안개 속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상주들이 모두 떠나고 얼마 뒤,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추모관 앞산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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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리(이중섭의 별명)와 결혼한 걸 후회하냐고요? 함께하지 못한 것만을 후회하지요"

서귀포=곽아람 기자 | 2012/11/06 03:03

 

"사랑하는 나의 아고리(이중섭의 별명·일어로 '턱이 긴 이씨'라는 뜻). 하루빨리 편지를 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설마 병에 걸리시진 않으셨겠죠. 아무 소식이 없다면 여러 나쁜 생각과 상상으로 고통스러울 겁니다."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1층 전시장에는 기별 없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는 아내의 편지가 걸려 있다. 2일 전시장 입구에 걸린 이중섭(1916~1956)의 1955년 작 '자화상'<작은 사진> 복사본 앞에 휠체어를 탄 90대 일본 여성이 조용히 자리했다. 수십년간 고된 노동에 시달린 손마디가 울퉁불퉁했다. 57년 전 떨리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던 바로 그 손. 이중섭이 "유일한 나의 빛, 나의 별, 나의 태양, 나의 애정의 모든 주인인 나만의 천사"라고 했던 아내 이남덕(91·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다.

"가슴이 아파서 차마 이 그림(자화상)을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남편은 이렇게 굳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내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슬픈 표정 짓지 않았겠지요."

서귀포는 이 여사와 이중섭의 특별한 추억이 서린 곳. 이중섭 부부와 두 아들은 1951년부터 1년간 서귀포의 1.4평(4.6㎡) 단칸방에 머무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52년 이 여사는 생활고를 피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1956년 이중섭은 서울서 객사했다. 이 여사의 서귀포 방문은 1997년 이중섭 거주지 복원 준공식 참석 이후 15년 만이다. "서귀포는 바닷가서 게 잡고, 산에서 나물 캐 데쳐 먹었던 곳, 단란한 가정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곳이에요. 다시 오고 싶지만 건강과 나이가 허락할지 모르겠어요."

이 여사는 일본 동경문화학원 재학 시절 같은 과(서양화과) 선배인 이중섭과 사랑에 빠졌다. 1945년 현해탄을 건너와 함경남도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했다.

"그의 어디에 반했느냐고요? (웃으면서) 모든 것에. 상냥한 사람이었어요. 때론 화가로서의 신념을 강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부터도 천재성이 느껴졌어요. 전람회에서 상을 받아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도 있고, 러시아·프랑스에서도 호평받았어요."

삯바느질, 서점 점원 등을 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운 신산한 세월, 세상 떠난 남편이 역사이자 신화가 되는 사이, 고달픈 현실을 견뎌내는 것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회라면, 남편과 함께 있지 못했던 게 후회겠지요. 남편은 가고 없었지만, 항상 내 곁에서 나와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만 같았어요."

이중섭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부부'(1953). 푸른 날개의 수탉과 붉은 날개의 암탉이 재회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를 그리며 그린 이 그림 복사본을 이 여사는 도쿄 집 현관에 걸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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