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피임약이 지난 9일로 판매 50주년을 맞았다. 1960년 이날 미국 식품의약국은 제약회사 시얼(Searle)이 여성호르몬 이상 치료제로 개발했던 에노비드(Enovid)의
피임 효과를 인정하고 경구피임약으로 판매를 허가했다.
에노비드는 1998년 세계 지식인 포럼인 '에지'가 선정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 121개'에 뽑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콜린 블래이크모어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변화시킨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했다.
먹는 피임약 전과 후의 세상은 달라졌다. 임신과 육아에 묶여 있던 여성들이 스스로 임신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임신의
공포에서 해방되면서 성(性)도 개방됐다. 단순 신약(新藥)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든 현상이 된 것이다.
경구피임약 개발은 남자들이
했지만 약이 발명되기까지 험난한 여정은 마거릿 생거가 헤쳐나갔다. 생거는 최초로 산아제한운동을 제안한 간호사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생거는
1879년 9월 미국 뉴욕주 코닝에서 가난한 석공(石工)의 딸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생거의 어머니는 18차례 임신을
거쳐 11남매를 낳았다. 생거는 여섯째였다. 생거는 태어나자마자 방치돼 죽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숱한 아기들을 보며 자랐다. 당시
콘돔이 있었지만 고가인 데다 남자들은 이를 기피했다.
결혼한 후 맨해튼으로 이사한 생거는 1912년 간호사로 일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새디 작스라는 여잔데, "혼자서
낙태를 하려다가 하혈이 심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치료를 끝낸 후 작스가 물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동행한 남자
의사가 대답했다. "섹스를 절제하면 된다." 몇 달 뒤 작스의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생거의 눈앞에서 새디 작스는 또다시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어 있었다. 생거는 훗날 "자포자기에 빠진 여성들을 위험천만한 낙태로부터 구원해야겠다고 저절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1914년 생거는 '여성들의 반란'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우편으로 배포했다. 피임의 방법과 산아 제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정부는 이 책자를 포르노물로 규정했다. 생거는 영국으로 1년 동안 망명했다. 생거 대신 남편이 책자를 직접 돌리다가 음란물
유포죄로 구류를 살았다. 1916년 생거는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사춘기의 성, 자위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그 해 생거는 뉴욕 브라운스빌에 세계 최초로 '가족계획 클리닉'을 개원했다. 9일 뒤 경찰이 압수수색을 실시했고 생거는
30일 구류형을 받았다. 역시 포르노물 유포죄.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생거에게 동조자들이 생겨났다.
1918년 뉴욕시는 생거에 동조하는 명사(名士)들의 여론에 밀려 클리닉을 허용했다. 1921년 생거는 '미국산아제한연맹'을 결성했다.
1923년 마침내 여성 의료진과 직원으로 구성된 첫 번째 합법적인 산아제한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거부(巨富) 록펠러 가문이 그를
후원했다. 1921년부터 1926년 사이에 생거의 조직으로 쏟아진 편지는 100만 통이 넘었다. 피임 방법을 묻는 엄마들
편지였다.
1936년 마침내 피임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풍속 교란 방지법이 개정됐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피임
정보를 제공받게 된 것이다.
1939년 생거는 뉴욕 할렘가에 근거를 두고 '니그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니그로(Negro)'는 당시 흑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성에 대한 무지와 빈곤으로 피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흑인 여성들을 교육했다.
생거의 고민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불편한 피임도구, 그러니까 여성의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각종 피임도구 없이 간편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굳이 비용을 치르며
병원까지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1950년 생거는 15만달러를 먹는 피임약 개발 기금으로 내놨다. 1934년 그레고리 핀커스라는
생물학자가 호르몬을 조작해 토끼의 배란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근 20년이 지난 1953년 생거가 핀커스를 찾아갔다.
"사람도
가능하지 않은가." 핀커스는 제약회사 시얼사(社)에 개발을 제안했다. 사회적 비난을 예상한 시얼사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1957년 이 회사
연구원 하나가 우연하게 피임효과가 있는 물질을 개발한 것이다. 핀커스는 그 물질을 자기 연구소로 가져와 실험에 몰두했다. 처음부터 먹는
피임약이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게 뻔해 여성호르몬 이상증 개선제로 시판했다. 에노비드는 3년 뒤 FDA가 이 약의 피임효과를 인정하면서 정식으로
경구피임약이 됐다.
시얼사는 그 덕에 시장을 독점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시판 3년 동안 미국 여성 120만명이 에노비드를
구입했다. 1965년 연방 대법원은 정부가 임신이라는 사적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국의 모든 주에서 피임약이 합법화됐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생거는 여성 해방의 시대를 생전에 목격하고 1966년 9월에 87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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