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겨울,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정문 앞. 테너 박지민(34)씨는 평소 영웅처럼 여기던 미국의 테너 닐 시코프(63)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 '라 보엠'의 영상에서 노래는 물론, 연기 동작과 습관까지 외워둔 터였다. 박씨는 다음 날도, 이틀 뒤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같은 옷까지 입고 있었다.
결국 사흘째 다시 마주친 시코프는 조용히 오페라 극장 안으로 그를 데려갔다. 극장 음악감독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방이었다. 박씨는 1시간 동안 오자와의 피아노 반주로 시코프 앞에서 노래하고 레슨을 받았다.
"반드시 '라 보엠'을 세계적 무대에서 부르겠다고 결심했지요." 박씨는 5년 뒤인 2010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주역을 맡으며 그 꿈을 이뤘다.
서울대 음대 졸업 직후 빈 유학, 영국 굴지의 매니지먼트사 아스코나 홀트와의 계약까지 이력으로만 보면 박씨는 전도유망한 청년 성악가다. 하지만 이 경력을 얻기 위해 그는 유럽 전역의 오페라 극장에서 180번 오디션에 낙방하면서 온몸으로 좌충우돌했다.
◇좌충우돌 로커에서 성악가로
전주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 교내 록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인근 여고 축제에 초대받아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섰다. 문제는 그 여고 교장이 바로 박지민의 아버지라는 것. "정체를 숨기기 위해 종이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는데, 공연 도중 땀이 흘러서 그 가면이 찢어지고 말았어요."
1997년 지방대 음대에 들어간 박씨는 병역을 마친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서울행 차표를 샀다. 매주 한 차례씩 3개월간 서울대 음대 대학원생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았다. 결국 2001년 서울대 음대에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서울대 합격 후에도 성악에는 별 관심 없었다. 자신의 음역(音域)이 테너인지, 바리톤인지도 헷갈렸고 고음은 무조건 자신 없었다. 대학 2학년 때는 '서울대 음대 출신의 가수'가 되겠다며 6개월간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동방신기 멤버들과도 함께 연습했어요. 저보다 7~8년은 나이 어린 친구들이 눈만 뜨면 목숨 걸고 춤추고 연습하는 모습에 솔직히 기가 질렸지요."
'연예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는 겉돌았다. 그는 "소프라노 조수미 선배가 재학 시절 성적이 안 좋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보다도 심했어요. 아마도 서울대 음대 창설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보다 못한 스승 강병운 교수(베이스)가 3학년 때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1년만 무조건 공부하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박씨는 스승 댁을 찾아가서 발성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첫 수상 이후 180번 낙방
반신반의하면서 4학년 때인 2004년 참가한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콩쿠르에서 덜컥 특별상을 받았다. 덕분에 박씨는 빈 음대로 유학 갔고, 독일 전역의 오페라극장에 오디션 신청서를 보냈다. 기차 타고 다니며 오디션을 봤지만, 180여 차례 떨어졌다.
'고진감래(苦盡甘來)'였다. 2007년 영국 로열오페라극장에서 젊은 성악가들에게 교육과 데뷔 기회를 부여하는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로 선발된 것. 주역이 사정이 생겨 무대에 서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예비 출연자, '커버'를 맡으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 결국 그는 '라 보엠' 주역을 거머쥐었다.
박씨는 바리톤 임경택(조셉 임)과 임창한, 허종훈 등 젊은 성악가들과 함께 4인조 성악 앙상블 '로티니'를 만들고 오는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데뷔 공연을 갖는다. 록 가수 대신 오페라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어릴 적 느끼하고 어색해서 마냥 싫어했던 오페라 가수가 직업이 된 걸 보면, 이걸 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아요"라고 했다.
여전히 그의 꿈은 조금 엉뚱하다. "성공하고 8년쯤 뒤에는 은퇴해서 자선 사업을 하는 게 최종 목표예요. 저 같은 '망나니 녀석'도 주위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듯이 다른 후배들도 도움이 절실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