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걸 다 내팽겨치고.. 35년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유전자 검사 덕에 아들을 찾아냈다..
..
감동이다.
물론 나도 .. 그럴 것이지만..
그전에.. 소중한 아이들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놀이터에 갈때..얘들끼리는 가지 못하게 해야겠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용덕이 찾았어요."
지난 6월 27일 오전 9시 57분, 이영자(가명·63)씨는 사단법인 어린이재단으로부터 35년을 애타게 기다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섯 살 때 잃어버린 아들 조용덕씨를 은평구의 한 복지시설에서 발견했다는 통보였다.
한걸음에 내달렸다. 아들의 두 볼을 감싸쥔 이씨 부부의 눈에선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긴 세월의 회한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졌다. 35년은 국내 실종아동이 가족과 상봉한 사례 중 최장기 기록이다.
충북 제천에 살던 어린 용덕군은 아버지 자전거 앞에 타기를 좋아했다. 하얀 얼굴과 예쁜 눈웃음으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기도 독차지했다. 그러던 1977년 4월 10일. 사촌 누나와 놀이터에 놀러 갔던 용덕이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용덕이 부모에게 아들 찾기라는 긴 아픔은 시작됐다.
그날 밤 아버지는 확성기를 사 들고 용덕이를 부르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잃어버린 후 처음 3년 동안 전국의 아동복지시설 355군데를 모두 직접 찾아다녔다. 전단을 5000장 찍어 들고 다니면서 "우리 용덕이를 보셨느냐"고 수만 번 묻고 다녔다.
아버지가 동쪽으로 가면, 어머니는 서쪽으로 갔다. 당시 11세인 큰딸은 이웃집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보리밥에 된장을 찍어 발라 먹으며 부부는 전국을 헤맸다.
충북 제천 근처에는 나병 환자촌이 있었다. 혹시 그곳에 들어갔는지도 몰라 77년엔 사흘간 마을 근처에서 잠복하기도 했다. 용덕이를 찾겠다며 방송에도 2차례 나갔고, 푸닥거리만 수십 번을 했다.
8년간 제천에 살며 아들을 찾아다녔다. 작은 페인트 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다시피 했다. 7개월여 만에 망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는 틈틈이 일용직 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이웃에서 간고등어와 소 내장 등을 얻어 머리에 이고 장에 나가 팔았다. 돈이 생기면 다시 그 돈으로 전단을 찍고 교통비로 삼았다. 팔을 못 쓸 정도로 수천 장의 편지를 써서 전국 반상회 회보, 도교육위원회, 초등학교, 경찰청, 각종 시설에 보냈다.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가족은 그 후로도 25년간 아들을 찾았다. 잘못된 제보에 제주도부터 부산, 대구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아닌 것을 확인하고 돌아설 때마다 가슴은 다시 한 번 찢어졌다.
잃어버린 지 30년이 지나자 아들의 얼굴조차 추정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2010년엔 미국 국립 실종·학대아동센터에 가족사진과 용덕씨 어린 시절 사진을 보내서 현재 모습 추정 사진을 받았다. 작년 전립선암으로 수술한 아버지는 아들을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잃어버릴 당시엔 그저 성장이 조금 늦는구나 생각했던 용덕씨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 되어 은평구 복지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 지난 2월부터 개정돼 시행된 실종아동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라 보호시설 입소자였던 무연고 아동도 유전자 검사 대상물을 채취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용덕씨도 유전자를 채취했다. 앞서 용덕씨 부모는 4년 전 인천 서부경찰서를 통해 장기 실종자 가족의 자격으로 유전자를 등록해뒀다. 지난달 18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친자 관계일 확률은 99.9999%. "저희 부부가 35년간 포기하지 않고 용덕이를 찾게 한 힘은 그저 자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용덕이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