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고리(이중섭의 별명·일어로 '턱이 긴 이씨'라는 뜻). 하루빨리 편지를 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설마 병에 걸리시진 않으셨겠죠. 아무 소식이 없다면 여러 나쁜 생각과 상상으로 고통스러울 겁니다."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1층 전시장에는 기별 없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는 아내의 편지가 걸려 있다. 2일 전시장 입구에 걸린 이중섭(1916~1956)의 1955년 작 '자화상'<작은 사진> 복사본 앞에 휠체어를 탄 90대 일본 여성이 조용히 자리했다. 수십년간 고된 노동에 시달린 손마디가 울퉁불퉁했다. 57년 전 떨리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던 바로 그 손. 이중섭이 "유일한 나의 빛, 나의 별, 나의 태양, 나의 애정의 모든 주인인 나만의 천사"라고 했던 아내 이남덕(91·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다.
"가슴이 아파서 차마 이 그림(자화상)을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남편은 이렇게 굳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내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슬픈 표정 짓지 않았겠지요."
서귀포는 이 여사와 이중섭의 특별한 추억이 서린 곳. 이중섭 부부와 두 아들은 1951년부터 1년간 서귀포의 1.4평(4.6㎡) 단칸방에 머무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52년 이 여사는 생활고를 피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1956년 이중섭은 서울서 객사했다. 이 여사의 서귀포 방문은 1997년 이중섭 거주지 복원 준공식 참석 이후 15년 만이다. "서귀포는 바닷가서 게 잡고, 산에서 나물 캐 데쳐 먹었던 곳, 단란한 가정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곳이에요. 다시 오고 싶지만 건강과 나이가 허락할지 모르겠어요."
이 여사는 일본 동경문화학원 재학 시절 같은 과(서양화과) 선배인 이중섭과 사랑에 빠졌다. 1945년 현해탄을 건너와 함경남도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했다.
"그의 어디에 반했느냐고요? (웃으면서) 모든 것에. 상냥한 사람이었어요. 때론 화가로서의 신념을 강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부터도 천재성이 느껴졌어요. 전람회에서 상을 받아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도 있고, 러시아·프랑스에서도 호평받았어요."
삯바느질, 서점 점원 등을 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운 신산한 세월, 세상 떠난 남편이 역사이자 신화가 되는 사이, 고달픈 현실을 견뎌내는 것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회라면, 남편과 함께 있지 못했던 게 후회겠지요. 남편은 가고 없었지만, 항상 내 곁에서 나와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만 같았어요."
이중섭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부부'(1953). 푸른 날개의 수탉과 붉은 날개의 암탉이 재회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를 그리며 그린 이 그림 복사본을 이 여사는 도쿄 집 현관에 걸어두고 있다.
[高卒 출신의 성공 질주, BMW 코리아 사장 김효준] 책상 없어 울던 소년, 그가 핸들을 잡자… BMW 실적이 100배로 나서라, 나서라, 나서라 - 내 업무에만 얽매이지 마라, 다른 영역에도 아이디어를 내라 주변에서 질투 안하냐고? 자기 功으로 돌리지 말라… 내세우지 말라, 그러면 된다 "사장 안할래" 獨 본사와 대결 - 막상 사장 자리 앉고 보니 독일인 부사장이 4명이나… "내가 사장 안해도 되니까 차라리 독일인을 사장에 앉혀라, 대신 우리 직원들 기회 더 달라"
"어릴 때 소원이 자동차? 車는 무슨… 책상도 없었는데… 박스에 보자기 씌워서 공부 이젠, 소외된 아이들 위해 모바일 캠퍼스 만들겁니다 책·자동차 설비 싣고 산간벽지 누빌거예요,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어요 하필이면 왜 수입車? 사람들이 못으로 외제차를 그어댈 때… 난 반대로 가능성을 봤죠"
"'모바일 주니어 캠퍼스'를 만들 거예요. 버스에 기계 설비, 다양한 교재를 싣고 도서 산간벽지를 누비게 할 겁니다. 교육 혜택에서 소외된 어린이들이 자동차 원리를 배우고, 직접 만들어도 보고, 환경의 중요성도 깨닫게 하고…. 이달 말에 출범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할 거예요."
김효준(55) BMW코리아 사장은 수입 자동차 회사 사장 같지가 않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회현동 BMW코리아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 내내 그는 '모범생' 같은 답을 내놨다. 기업의 '명예'와 '지속 가능성', 기업과 사회의 상호 기여·선순환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나 강조할 법한 사회공헌론을 듣는 것 같았다.
▲ 서울 회현동 BMW코리아 본사에 전시된 뉴1 시리즈 118d에 앉은 김효준 사장. 그는“차만 파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자동차 문화와 애프터서비스의 기준을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그렇지만 그의 모범생 같은 경영론은 국내외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당장 한국 시장에서의 '실적'을 중시해야 할 BMW 독일 본사에서도 김 사장의 아이디어에 솔깃해하고 있다. '모바일 주니어 캠퍼스'는 물론, BMW 차를 사는 고객들에게 기부금을 내게 하고 그 기부금만큼 회사가 더 기부해 기금을 만드는 'BMW코리아 미래재단' 아이디어도 본사 이사회가 수용했다. BMW는 이 재단 모델의 전 세계 확대를 검토 중이다.
김 사장의 삶 역시 모범생 같았다. '성공한 고졸' 사례를 찾을 때마다 그는 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경영성적도 빼어났다. 2000년 BMW코리아 사장을 맡아 연간 300대 남짓이던 판매량을 올해 3만3000대 수준까지 늘려놨다. 실적 100배 향상, 수입차 1위 업체의 위상도 확고하다. 최초의 현지인 BMW현지법인 사장, 아시아인 최초 BMW 본사 임원, 국가별 최초의 벤츠 판매량 추월 등 보유한 '신기록'도 많다.
'가난한 고졸 출신 경영인'은 사실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덕수상고를 졸업했다는 것 이외에 개인사(史)를 밝히길 꺼려왔다. 그에게 굳이 어린 시절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한참을 망설였다. "자동차" 같은 대답을 기대한 건 엄청난 오산이었다.
"책상이에요. 그땐 엎어놓은 박스에 보자기를 씌우고 벽돌 몇 장을 받쳐 책상으로 썼죠."
그는 서울 금호동 산동네 단칸방을 전전하며 동생 네 명과 부대꼈다. 고1 때 중3짜리 열두 명을 모아놓고 과외를 해 동생들의 학비까지 댔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부친은 6·25 전쟁통에 월남(越南)해 건축업·인쇄업·운수업 등을 했지만 늘 시원찮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결국 직접 택시운전을 하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10년 넘게 병석에 누웠다.
그에게 수입차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는지 물었다. 그는 '가능성'이 판단의 기준이 됐다고 했다.
"입사 인터뷰 때 회사의 역사를 듣고, 제품을 보니 도전할 만하고 존경받는 회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선 반대가 많았죠. 당시엔 수입차를 못으로 그어버리고 수입차 주유를 거부한 주유소에 박수를 보내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또 그땐 한 달에 10대도 못 파는 회사였는데 실적에 대한 걱정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잘 준비하면 꼭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분명히 보였어요." 김 사장은 "이 회사가 한국 자동차 산업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산차 브랜드들이 수입차와 경쟁하면서 세계적 품질을 확보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죠. 수입차가 들어오면서 ABS(잠김현상을 방지하는 브레이크), 에어백 같은 첨단장치가 장착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11개 업체가 세계시장을 휩쓸던 일본차 메이커들이 안방 문을 걸어잠그는 바람에 몰락한 것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자동차 시장 대신 해외에 문을 연 건설중장비 시장에서는 고마쓰라는 브랜드가 일류 중장비 회사와 경쟁, 협력하면서 캐터필러를 능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고졸 직장인이 외국계 기업의 CEO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일을 통해 계속해서 배운 것"이라고 답했다. 일을 통해 배우기 위해선 "자기 업무 영역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영역에도 관심과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력과 소통(communication)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975년 첫 직장이었던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에 입사해 첫 여름휴가 사흘 동안 광주·부산·대구 지점을 돌았다. 매일 전화 통화만 했던 직원들을 만나 업무 얘기를 하면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업무 양식 표준화 방안을 만들어 회사에 제출했다. 세 번째 직장인 제약회사 한국신텍스 경리부 차장일 때에는 충북 음성에 공장을 짓는 프로젝트의 허가를 받지 못해 회사가 철수하려 하자, 건설·농공단지·지방행정 관련 법전을 뒤지고 군수를 비롯한 군청 직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공장 허가를 받아냈다.
"자기 업무도 아닌데 나서면 질시를 받지 않느냐"고 묻자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일을 배우고 회사가 성과를 내는 데에 만족해야지 자기 공(功)으로 돌리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내세우지 않아도 김 사장의 공은 다 평가받고 있었다. 신텍스 미국 본사에서는 그를 '독특한 재무담당자(strange finance director)'라고 평했고, 당시 한국신텍스 미국인 사장은 "대단히 젊은 사람이지만 차기 혹은 차차기에 사장으로 쓸 만한 재목이다"라는 인사기록을 남겼다.
그는 BMW코리아 사장으로서 회사를 키울 수 있었던 건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증해 보인 사례라고 말했다. "2000년 사장이 되면서 세 가지를 주문했어요. 벤츠를 이긴다는 뜻의 'B to B'(벤츠에서 BMW로)와 'B to C'(BMW는 고객을 지향한다), 그리고 '1 in 5'(1% 시장 점유율을 5년 안에 이룬다)였죠. 당시 우리 딜러(판매상)들은 '우리는 2등이니 싸게라도 팔아야 한다'고 했었고, 독일 본사에서도 한국 시장에서 어떻게 연간 1만대를 파느냐며 웃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300대 팔 때였거든요. 그해 바로 2100대를 팔면서 벤츠를 확실히 이겼죠. 그런 자신감이 2005년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BMW가 벤츠를 이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서울 아셈(ASEM) 회의 의전 차로 BMW 고급차 135대를 제공하고, 1년에 고작 한 대 팔던 대형차 L7을 13대나 보내달라고 해 본사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런 과감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아이디어도 많이 냈지만 본사와 '대결'한 적도 많다. BMW코리아에 처음 입사했을 때에는 독일어로 적힌 문서를 영어로 보내달라며 본사로 돌려보내기도 했고, 사장이 된 후엔 4명의 독일인 부사장이 너무 많다며 그럴 바엔 차라리 사장을 독일인으로 바꾸고, 우리 직원들이 기회를 더 갖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많이 이뤘지만 벌여놓은 일도 아직 많다. BMW 소형차인 뉴 1시리즈를 들여오는 등 라인업을 계속 확충하고 있고, 무엇보다 독일, 미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한국 영종도에 들어서게 되는 BMW드라이빙센터를 멋있게 건립해야 한다. 그는 모터사이클 면허를 따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2년 안에 모터사이클 면허를 따겠다고 본사에 약속했는데 마감이 한 달 남았다"며 웃었다.
그에게 '꿈'을 물었다. 그는 "나는 먼 길을, 아주 멀리 돌아왔다"면서 "후배들은 좀 더 빨리 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 글로벌 리더로 클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의 '모범생' 같은 답으로 돌아왔다. "사회와 기업이 같이 나아간다는 것,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듬어 나가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수입車 1등 이끄는 김효준은 누구인가]
-1957년 서울생.
-1975년 덕수상고, 1997년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졸업, 2000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국제경영학 석사, 2007년 한양대 경영학 박사
-1975년 삼보증권 입사, 1979년 하트포드화재보험 경리과장, 1994년 한국신텍스 부사장
-1995년 BMW코리아 상무, 2000년 대표이사 사장, 2003년 BMW그룹 본사 임원(Senior Executive)
김순옥씨(85·가명)는 악을 썼다.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등으로부터 7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린 지난 15일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 들어서는 재판장을 향해 그는 참았던 설움을 토해냈다. 폐지를 주워 먹고사는 김씨의 까칠한 손은 떨렸다. 그 손으로 김씨는 가슴을 쳤다.
“애들 소풍 갈 때 김밥도 못 싸주고, 도시락에 계란 하나 못 넣어주고 모은 돈이다. 그 돈 찾아서 나도 따뜻한 밥 먹고 고기 구워 먹을란다. 노숙자 행세 안 할란다. 나이 팔십이 넘어 뭐 먹고 살라고…. 너희 돈 달라고 하나…. 내 돈, 내가 맡긴 돈 달란 말이다.”
4년 전까지 김씨는 부산 자갈치·국제시장 등에서 생선과 붕어빵 장사를 했다. 그래서 평생 모은 1억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예금했다가, 이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5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김씨는 예금보험공사로부터 받은 5000만원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 같이 살던 아들을 분가시켰다. 김씨는 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보다 혼자 살기를 택했다. 다시 장사를 하기에는 몸이 예전같지 않았던 김씨가 할 수 있는 건 폐지를 줍는 것뿐이었다.
요즘 김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손수레도 없이 맨손으로 폐지를 줍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초량동 옛 부산저축은행 본점 주위를 돌며 버려진 폐지를 줍는다. 하루 종일 일해 그가 쥘 수 있는 돈은 3000~4000원. “그래도 그거라도 벌어야지 밥을 먹을 것 아이가. 요즘은 다리가 아파서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폐지를) 끌고 다닌다. 그래도 나는 걸어다니니까 낫지. 나이 90이 넘는 피해자들은 걸음도 못 걷는다. 아이고, 언제 해결이 나겠노.”
16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놀이공원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시한부 신경암 환자 박상은(44)씨와 딸 현주(가명·3), 아들 영수(가명·2)가 온 것이다. 박씨의 아버지와 누나들, 조카 그리고 병원 측 의료진과 봉사자들과 함께였다.
박씨는 얼마 전 병원에서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이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박씨가 겪는 병은 신경종양. 신경에 종양이 생기는 유전성 질환인데, 1000명에 1명이 걸리는 희귀병이다. 이날 박씨는 이동식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키가 171㎝인 박씨 몸무게는 50㎏이 채 되지 않았다. 종양 덩어리들이 튀어나와 살갗이 울퉁불퉁했다. 이날 박씨는 두 아이가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지켜봤고, 가을꽃이 핀 화단에서 아들딸과 사진을 찍었다. "애기들이 어려서, 아빠가 아픈지 어떤지도 몰라요" 하고 박씨의 조카 우영화(28)씨가 말했다. 아이들은 "아빠, 아빠" 하며 사촌 누나 품 안에서 박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박씨의 누나 재현(47)씨는 "동생이 오랜 투병 생활을 해서 바깥나들이는 4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수원시에 있는 병원에서 이곳 용인시 에버랜드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남짓. 앰뷸런스 안에서 박씨는 구토를 수차례 했다. 그래서 박씨는 점심도 못 먹고 누워서 아이들 먹는 모습만을 바라봐야 했다.
신경암은 일반 암과는 달리 전이가 20~30년간 서서히 진행된다. 열 살 때 배가 아파 병원을 찾은 박씨는 "종양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평생 배의 통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경기도 화성시 파이프 공장에서 일하던 지난 2008년 갑자기 병세가 나빠져 박씨는 본격적인 투병을 시작했고, 지난 5일 그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경기도 수원시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찾았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아이들은 경기도 화성시에 사는 둘째 누나 애자(55)씨가 돌보고 있다.
"큰딸, 작은아들이 있는데…, 아이들 놀이동산 한번 못 데려간 게 제일 아쉬워요. 죽기 전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함께 가보고 싶어요."
호스피스에서는 막 입원한 환자와 초기 상담을 진행한다. 상담을 하던 병원 간호팀장 강이진 패트라 수녀에게 그는 이렇게 간곡한 부탁을 했다. 수녀는 수소문 끝에 에버랜드 놀이동산에 연락했고, 사정을 들은 에버랜드는 박씨와 가족을 초대했다.
세 살, 두 살배기 두 아이가 할 줄 아는 말은 "아빠"밖에 없다. 두 아이는 사촌들 손에 이끌려 회전목마를 탔다. 놀이기구 바깥에서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로 박씨는 고개를 돌려 두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오른 손목을 까딱였다. 박씨는 "예" "아니오" 등 단답형 말만 했다. 고개를 끄덕거린다든지 손을 까딱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박윤정(31) 주치의는 "우울증도 있고, 온종일 한 마디도 없을 정도로 워낙에 말씀이 없는 분"이라며 "그래도 오기 일주일 전부터 '기대된다'고 말하면서 밥도 많이 먹고 평소보다 밝아졌다"고 말했다.
현주와 영수는 옆에 누워 있는 아빠는 안중에도 없이 '이솝우화'의 공주님과 왕자님의 길거리 행렬에 눈길을 뺏겼다. 그런 아이들을 가만히 쳐다보다 박씨가 엷게 웃음 지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간호사 이수지(30)씨는 "우리 병원에 온 이래로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며 덩달아 웃었다.
노란 국화가 피어 있는 화단에서 박씨는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웃어보라"는 가족의 채근에 큰딸 현주는 울고 말았다. 박씨의 아버지 박주원(84)씨는 멀리서 아들과 손주를 바라보며 "손주들이 정말 예쁜데…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누나 박애자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동물원 동물들을 보러 가는 마지막 코스에 박씨는 동행하지 못했다. 차가 좁고 덜컹거리기 때문이다. 검은색과 흰색 얼룩말 모양으로 꾸며진 차를 본 아이들은 신이 났다. 박씨는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지켜봤다.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박씨는 "좋아. 좋아요….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이날 한 가장 긴 말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지만 돈 없어서 힘든 사람들 보면 눈물만 나고 맴도 아프고 가슴 한쪽이 저렸지. 그 사람들 심정을 아니까네."
8일 오전 11시 경상북도 울진 죽변항에서 만난 최기철(53)씨가 배에서 내려 이렇게 말했다. 최씨는 울릉도 남서쪽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를 죽변시장 상인들에게 팔러 잠시 들렀다. 최씨는 2011년부터 매년 1000만원씩 기부해 온 '울릉도 기부왕'이다. 뿐만 아니라 15년 동안 꾸준히 기부와 봉사를 해왔다. 18명의 울릉도 주민과 함께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 5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해왔고, 7년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울릉도에 사는 독거노인의 집을 수리하거나 지체장애인 가족의 집을 청소했다. 그런 '기부왕 최씨'는 한쪽 팔 없이, 30년 된 아파트에 살면서, 17년 된 구식 배를 모는 오징어잡이 어부다.
최씨가 처음 배를 탄 것은 13세 때. 어머니는 산에서 나물을 캤고 아버지는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았지만 형편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6남매 중 넷째 아들인 최씨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다. 뱃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은 매일 멀미약을 먹어야 했다. 하루 종일 잡아봤자 당시 오징어 한 축(스무 마리)은 70원이었다. 고사리 손으로 가까운 바다에 나가 볼락과 문어를 잡기도 했다. 최씨는 "그때 반찬은 매일 오징언데 하도 배가 고프니 매일 묵어도 맛있었지요"라고 말했다. 울릉도를 떠나고 싶었지만 육지까지 갈 여유조차 없을 만큼 가난했다.
계속 어부생활을 하던 중 스물네 살 때 한쪽 팔을 잃었다. 배 로프에 오른손이 감겨들어가는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이었다. 수술로 오른쪽 손목 위 10㎝까지 잘라내야 했다. 최씨는 "당시 가진 것도 없는데 앞이 캄캄했심더"라고 말했다. 한쪽 팔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고기잡이는 안 되지만 오징어잡이는 가능했다. 오징어를 잡는 물레 모양의 기계는 한 손으로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에 2000만원을 들여 중고 배를 사 계속 오징어를 잡았다. 1년 뒤엔 지금 부인과 예식도 올리지 못한 채 셋방에서 결혼 살림을 시작했다. 1995년 사채와 정부 융자를 받아 드디어 지금의 배(만승호·29t급)를 장만했다. 최씨는 그 후로 쉬지 않고 일해왔다. 오징어 철이 아닌 3월부터 8월에는 제주도까지 내려가 조업을 계속했다.
그러던 최씨가 기부왕이 된 것은 2011년부터다. 그해 최씨는 17년간 져 온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당시 오징어 수확량이 평상시의 두 배였기 때문이다. 한숨을 돌린 최씨는 그해 울릉군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2012년에도 '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최 선장은 "TV에서 사람들이 좋은 곳에 기부하고 그런걸 보면서 마누라랑 '저렇게 할 수만 있음 얼매나 좋겠능교' 했었는데 (나도 기부하니까) 이제 참 좋지"라면서 "이번엔 오징어가 싹 다 어디로 갔노…. 이놈들 농사가 잘돼야 (기부를) 더 많이 할 낀데"라고 웃으며 말했다.
최씨는 건강이 좋지 않다. 3년 전 뇌경색이 와 머릿속에 스텐트(인조 혈관 기구)를 삽입했다. 7년 전에는 신경성 장출혈로 장을 40㎝ 잘라내야 했다. 최씨는 "좋은 뜻이 있어도 계속 이어갈 수 있어야지…. 65세까지는 할라카는데 몸이 따라줄랑가 언제까지 할랑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최씨는 저녁 7시부터 새벽 6시까지 오징어를 잡고 오전에는 배에서 쪽잠을 잔다. 인터뷰 후 최씨는 다시 배에 올라탔다. 다음 행선지는 울릉도 남서쪽 바다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합의로 현대차 생산직 근로자의 평균 연봉이 9800만~9900만원에 달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는 노조가 파업을 단행해 1조4000억원의 생산 차질이 발생했지만 성과급과 격려금 등의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한 금액이 지난해 2128만원에서 2240만원으로 오히려 늘었다.
그런데도 현대·기아차가 막대한 이익을 내는 것은 국내 시장을 독점하면서 소비자들이 그만큼 비싼 차값을 치러주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이미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와 협력업체 근로자들의 임금 격차가 심각한데 시간당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됐다"며 "수많은 중소기업 생산 현장 근로자들의 상실감도 산업계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이번 노사 합의로 현대차 생산직 근로자 1명당 노동시간이 앞으로 연간 239시간 줄어들지만, 이 빈자리에 대체 근로자를 고용하기 어렵다. 현대차그룹의 한 임원은 "근로시간제 변경은 물론, 라인의 생산 차종 변경이나 근로자 전환 배치 등을 모두 노조와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대체 노동자를 채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노조의 과도한 간섭은 생산성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임원은 "작은 안전사고에도 노조가 라인을 세운다"며 "이러한 현실이 미국 공장과의 생산성 차이를 만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