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2-08-21 오후 2:11:47
지난 16일 대구지법은 "피고인 학교법인과 교장·담임교사·가해자 부모는 1억34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앞서 지난 6월 28일 상고심에서 가해학생 서 군과 우 군에게 각각 장기 3년에 단기 2년 6개월, 장기 2년 6개월에 단기 2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판결을 이틀 앞둔 지난 14일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승민이네를 찾았다. 승민이의 부모는 현직 교사다. 어머니 임지영 씨(경북 영천 금호중학교 교사)는 개학 준비를 위해 방학 중에도 학교에 출근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권 모 씨(경북 안동 모 고등학교 교사)는 최근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남은 큰 아들과 막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해서다. 거실 한쪽에는 그동안의 교직생활을 증명하는 물품들이 쌓여 있었다.
▲ 고 권승민 군의 방에 놓인 영정. 어머니 임지영 씨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 ⓒ프레시안(이명선) |
"아빠, 자살하면 기분이 어떨까?"
지난해 11월 초 승민이는 아버지 권 씨에게 "아빠, 자살하면 기분이 어떨까?"라고 물었다. 권 씨는 평소 독서량이 많은 승민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TV를 보다 나온 말이었고, 심각하게 물은 것도 아니어서 지나가듯 흘려 들었다.
그로부터 50일 후 아버지를 닮아 착하고, 거짓말할 줄 모르고, 꾀부릴 줄 모르던 14살 승민이는 아파트 7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 용가리, 만두, 수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 승민이의 유서 중 |
부부는 '제발,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승민이의 유서를 공개했다. 유서를 통해 드러난 폭행·갈취·고문 등은 중학생의 행동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했다.
승민이는 친구들에게 라디오 전원선에 목이 묶인 채 끌려다녔고 화장실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키우라는 협박도 이어졌다. 그러나 승민은 보복이 두려워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유서에 "원래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고 남겼다.
권 씨는 "교직 생활 20년이지만, 우리 아이처럼 당한 경우는 처음 봤다"며 "교사인 우리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해자는 완벽하게 아이를 괴롭혔고, 피해자인 우리 아이는 완벽하게 그 사실을 부모에게 숨겼다. 그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아이의) 자살을 못 막았다"며 가슴을 쳤다.
▲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임지영 지음, 형설Life 펴냄) ⓒ형설Life |
최근 임 씨는 승민이가 떠난 지난해 12월 20일의 사건과 학교폭력에 대한 생각을 담은 책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형설Life 펴냄)를 출판했다. 그는 책을 낸 이유에 대해 "승민이 사건으로 뉴스와 대책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학생 자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구타의 흔적"
"새파란 멍, 초록색 멍, 그리고 불그레한 색, 노란색으로 변해 가는 멍 자국으로 민이의엉덩이에서 허벅지까지 하얀 살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43쪽)
임 씨는 시신 검안 과정에서 확인한 승민이 몸의 멍을 보고도 아들이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검시관은 "오랫동안 지속된 구타의 흔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진짜 꿈 같았다"며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가해학생들은 직접 구타하는 것 외에도 '요즘 안 맞아서 영 맛이 갔네', '문자 답 늦을 때마다 2대 추가', '내가 죽일 거니까 혼자 디지지 마라', '물속에 처박자' 등 수시로 문자를 보내 승민이를 협박했다. 승민이는 죽기 전날까지도 괴롭힘을 당했다.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 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저를 구타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 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 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 승민이의 유서 중 |
권 씨는 "눈물이 나서 도저히 읽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어른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가려다 보니, 나중에 감당이 안 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애써 승민이를 이해했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죽기 직전까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그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하고, 많은 포기를 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잠 못 이루면서 그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권 씨는 밭은 숨을 내쉬더니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일어섰다. "걱정되니 휴대폰을 들고 가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금방 온다"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 가해학생들이 고 권승민 군 폭행에 사용한 물건 ⓒ연합 |
"한 학교에서 학교폭력 희생자가 두 명, 우연 아니다"
대구시 수성구 'ㄷ'중학교에서는 지난해 두 명의 학생이 자살했다. 승민이가 자살한 12월에 앞서 7월, 같은 학년의 여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보영(책에서 사용한 가명)은 왕따를 당하는 학생을 대신해 익명으로 교사에게 편지를 썼다. 교사는 이를 반 학생 전체에게 벌을 주는 등 공개적으로 처리했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보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화가 난 몇몇 학생들이 보영이를 괴롭혔다. 다음날 보영이는 자살했다.
보영이가 죽은 후 학교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 씨는 "학교가 1학기에 학생이 죽었는데 2학기 개학 후에도 학생상담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다면 승민이는 구제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승민이가 1학기 때보다는 2학기 때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보영이 사건 후 학교와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 상담을 했다면 승민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임 씨는 "한 학교에서 학교폭력으로 두 명이나 희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 측 책임이 크다"고 비판했다.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학교, "정신병자 같다"
임 씨는 또 사건 발생 후 학교와 담임교사가 보인 태도에 분노했다. 학교는 승민이가 집에서만 맞았다고 주장하며 집단 괴롭힘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경찰조사 결과 승민이가 교실에서뿐 아니라 다른 반에서도 구타를 당하고, 이동할 때마다 늘 심부름을 했다는 학생들의 증언이 나왔다.
얼마 전부터 부부는 학교폭력 피해로 자살한 학생 가족들과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대부분이 사건을 대하는 학교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학교가 학생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면서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권 씨는 올해 4월 발생한 경북 영주 중학생 자살 사건을 예로 들며 "학교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전부 다 정신병자 같다"라며 "아예 노골적으로 같이 공모해서 (사건을) 다 덮는다"fk고 성토했다.
중학교 2학년 이 모 군은 지난 4월 16일 경북 영주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이 군은 유서에 자신을 폭행한 학생들의 이름을 남겼으며, 가해학생으로 지목된 전 군 등 세 명은 폭행 사실 대부분을 시인했다. 가해학생들은 이 군을 연필로 찌르거나 주먹으로 때렸으며, 얼굴에 뽀뽀를 하고 성기를 만지는 등 강체추행도 서슴치 않았다. 숨진 이 군은 지난해 5월 정서행동발달 선별 검사 결과 자살위험도 수치 고위험군 판정을 받았다.
자살한 이 군의 어머니는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아들은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자살한 게 아니다. 유서에 있듯 무자비한 폭력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학교는 숨진 학생은 자살 고위험군이란 것을 부각시켜 학생 관리에 소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승민이 엄마라 죄송합니다"
승민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정부는 '학교폭력 예방 대책'을 발 빠르게 내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생들은 죽어 갔다. 몇 명의 학생이 죽었는지 숫자를 헤아리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학교 교무주임인 임 씨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종종 교육청에 간다. 승민이 사건 이후 교육당국은 회의 때마다 학교폭력 대책을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임 씨는 이런 지침이 '면피용'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회의 때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라며 고개 숙인다"고 말했다.
"아마 많은 선생님들은 우리 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겁니다. 왜냐하면 학교로 정말 많은 공문들이 내려오거든요. 한번은 '학교폭력 대책 교사 연수'를 갔는데, 한 교사가 '학교폭력 공문 때문에 미치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반성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 자체가 정말 교사들의 책임이예요."
권 씨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선 교사들"이라며 "폭력에 대한 교사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학교폭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조했다. 그는 또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대책을 마련해줬다면 아이들이 왜 죽었겠는가"라며 승민이 사건 이후 발생한 학생 자살 사건에 대해 베르테르 효과라고 보도한 몇몇 언론을 비판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정을 내린 게 고작 남을 따라하는 심리 때문이겠느냐는 게다. 폭력에 시달린 아이들의 상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보도 태도라는 것.
▲ 고 권승민 군은 만화를 즐겨 그렸다. 평소 철학과 역사 책을 즐겨 읽었던 그의 꿈은 검사였다. ⓒ프레시안(이명선) |
경쟁 위주의 교육이 문제… "스펙,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
현직 교사인 부부는 지금과 같은 학생 폭력과 자살은 경쟁 위주의 교육체계에 원인이 있다고 밝혔다. 경쟁에서 뒤쳐진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권 씨는 "과거와 달리 지금 대입제도가 내신과 수능을 모두 잘해야 한다"며 "교육과학기술부는 과목이 줄어 학생 부담도 작아졌다고 하지만, 열 과목을 시험 보나 네 과목 시험 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과목을 줄여서 부담을 없애겠다고 한 정책이 지금은 학생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스펙으로 결정되는 입시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행 입시 제도에서 학생들의 인성은 지원서에 적힌 스펙으로 평가된다는 게다. 임 씨는 "스펙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사실 (스펙 쌓기가) 쉽다"고 말했다. 특히 '경제적 격차가 학력 격차로 이어지는 교육 현장을 목격하면서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떨어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판결은 나왔지만…
지난 16일 법원의 판결로 승민이의 죽음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이 명확해졌다. 19일 오후 어머니 임지영 씨와 추가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임 씨는 손해배상 소송 결과에 대해 "학교폭력에 대한 학교와 교사 측, 가해학생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어느 정도 인정은 됐지만, 교육청과 대구시의 책임은 기각됐기 때문에 완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재심 청구 등 향후 법적 절차에 대한 질문에 임 씨는 그저 "고민 중"이라고만 답했다. 판결을 앞두고 긴장했었는지, 임 씨는 이틀 동안 먹을 것을 목으로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문득 베란다를 내다보니 풀이 자라고 있더라구요.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며 내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고 뛰어내렸을까. 그때 무슨 생각 했을까. 혹시 그때 엄마가 와서 자기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힘든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죠. 평생 살면서 여기를 가도 생각나고 저기를 가도 생각날 겁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가족들에게 승민이는 지울 수 없는 존재예요. 시간이 지난다고 절대 잊힐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감수하면서 사는 거죠.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안 겪게 해야죠. 그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입력 2012-08-08 오전 7:50:00
내면에 상처 입은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일 게다. 누구나 갖고 있는 깊은 상처의 기억. 여기엔 종종 공통점이 있다. 뿌리를 캐보면 학창 시절의 경험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요즘 논란이 되는 학교폭력 사건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학교는 오래 전부터 꽤나 폭력적인 곳이었다. 주먹질로 코피를 터뜨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다. 마음에 멍자욱을 남기는 것도 폭력이다. 집안 환경, 성적 등으로 줄 세우는 학교 문화,개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는 교사 등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어른이 돼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넓게 보면, 이들 역시 학교폭력 피해자다.
마침, 학교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도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몸이 다친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 역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기 마련이므로, 너도나도 '힐링'을 강조하는 현상은 일단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주먹질과 달리 눈에 띄지 않는 폭력은 가해자를 찾기 어렵다. 상처에선 고름이 흐르지만, 누가 낸 상처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사회 전체가 가해자와 공범이니까. 아파트 평수 때문에 당한 따돌림, 이게 누구 책임이란 말인가. '힐링' 열풍이 때로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다.
학교폭력 연속 인터뷰 기획 여섯 번째로 만난 사람은 현직 초등학교 교사다. 중앙정부와 교육청이 학교폭력 관련 공문을 수시로 내려보내는 올해 1학기를 거치며, 그는 학교에 대한 절망감만 더 깊어졌다. 하필 교육청이 요즘 학교폭력과 관련해 강조하는 단어 역시 '힐링'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는 그가 보기에, 교육청 프로그램 전단에 찍힌 '힐링'이라는 단어는 영 공허하기만 하다. 부모의 소득에 따라 끼리끼리 뭉치는 요즘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려면, '힐링'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질 때, 아이들의 상처는 조금씩이나마 아물어간다.
구조를 바꾸자는 말. 역시 공허하게 들린다는 걸 그 역시 잘 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그게 솔직한 태도라고 본다. 아이들의 내면에 깃든 폭력성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런 폭력성을 잉태한 시간의 무게만큼, 혹은 그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폭력을 지워갈 수 있다. 학교폭력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것,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것. 그게 솔직하지 않은 태도다. 정 교사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교육공동체 벗 펴냄)이 최근 잇따라 특집기사로 낸 내용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학교의 교육 불가능', 그 구조적인 절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용주 서울 백석초등학교 교사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18일, 서울 성산동 '교육공동체 벗'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정용주 교사. ⓒ프레시안(최형락) |
"한두 달 안에 급조된 대책으로 학교폭력 도려낸다는 발상, 우스운 일 "
프레시안 : 학교폭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하지만 막상 학교 현장의 목소리는 덜 소개된 듯 하다. 실제로 어떤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교 폭력 관련 공문도 많이 내려온다던데….
정용주 : 그렇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학교폭력 근절 대책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어차피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몇 가지 없다. 전수조사를 통해 학생들이 학교폭력 경험이 있나, 없나를 파악하는 정도다. 여기에 그동안 거의 열리지 않았던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분기별로 소집하라 게 고작이다.
경찰 차원에서 실적을 높이려는 움직임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계기관들이 학교에서 학교폭력 대책 연수를 한다. 하루는 검사가, 또 하루는 경찰서장이 직접 찾아와 연수를 한다. 학부모와 교사들에게도 연수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한두 달 안에 급조된 대책으로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도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정부가 학교폭력을 너무 기계적으로 정의하고 대응하는 느낌이다. 예컨대 교과부 대책을 보면, '한 아이가 같은 아이와 두 번 이상 싸우면 학교폭력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아이들이 분노를 표현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폭력이야'라고만 말하면, 한계가 뚜렷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수밖에 없다. 폭력이 이런 식으로 해결될까. 아니라고 본다.
현병호 <민들레> 대표의 지적대로 '사과가 썩었는데 그거 그냥 걷어내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다른 사과도 썩었을 수 있기 때문에 상자가 문제인지, 비료와 흙이 문제인지 다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누가 폭력적인지를 짚어내는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련 기사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못 사는 동네 애들과 분리시켜달라는 학부모들, '은밀한 폭력'이 진짜 무섭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이 공론화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책을 내놓은 덕분에, 학교폭력이 조금 줄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용주 : 학생들끼리 휘두르는 가시적인 폭력은 줄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 교사와 학생 간, 또는 학생과 학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폭력'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폭력'은 데이터에 안 잡힌다.
폭력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은밀한 폭력'까이 아울러서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들에게 사회가 전달하는 가치가 문화화·제도화 되어 있는 게 학교다. 교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경우가 있다. 학군이 같아서 잘 사는 지역과 못 사는 지역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 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잘 사는 지역 학부모들이 교육청에 진정을 넣었다. 못 사는 지역의 아이들 때문에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며 학군을 조정해달라는 게다. 결국 못 사는 지역의 아이들만 다니는 학군과 잘 사는 지역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군으로 쪼개졌다. 이건 폭력이 아닌가. 맞다. 학부모와 교사의 폭력이다. 학교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봐서는 안 된다.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학교 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누가 더 학교의 여론을 더 형성하기 쉽겠는가. 더 많이 배운 사람들, 잘 사는 엄마들과 그런 엄마를 둔 아이들이 의견을 형성해 나간다. 당연히 소외되는 사람이 생긴다.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다"
프레시안 : 학교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했을 때도 폭력적인 상황이 생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른들의 경우 말고, 아이들끼리 자율적으로 하는 의사결정이라면 어떨까. 그 경우에도 폭력적인 상황이 생길까.
정용주 : 그렇다. 아이들 역시 순수하지 않다. 아이들도 폭력성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실제로 폭력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스스로 체득한 것일 수도 있고, 부모나 사회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마냥 순수하다면 평화적 감수성을 기르는 게 별로 힘들지 않을 게다. 그게 아니므로, 폭력적 문화에 노출된 것보다 몇 배가 되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아이들의 평화적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다.
학교폭력은 다층적으로 봐야 한다. 굉장히 구조화되고 심화된 학교폭력의 영역이 있고,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한번 싸우고 마는 지속성이 없는 폭력이 있고, 학교끼리 묶인 일종의 카르텔 형식으로 조폭처럼 움직이는 폭력도 있다.
최근에는 머리를 쓰면서 잔혹한 방식으로 학생들끼리 왕따를 시키는 경우가 늘었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중 한 명은 이를 '단속사회'라는 말로 표현했다. 특히 거주지별로 계층이 분화되면서 못사는 지역과 잘사는 지역 아이들의 구분이 선명하고, 못사는 지역 내에서도 일종의 순혈주의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평수, 어떤 아파트에 산다는 기준에 의해 자기들끼리 철저하게 배척한다. 이런 폭력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이런 폭력은 눈에 잘 띄지 않고 크게 이슈가 되지도 않는다.
'학교가 폭력의 숙주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실 학교만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곳도 드물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 사회 역시 뭔가 좀 특이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배격한다. 이런 구조에서 폭력이 싹튼다.
"'학교 착각'에서 벗어나야…"
프레시안 : '학교가 폭력의 숙주다'라는 명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체벌'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교사가 아이에게 공식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인데, 인권 활동가들은 교사의 '체벌'이 아이들로 하여금 폭력에 무디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정용주 : 참 어려운 문제다. 학교폭력을 인권 측면에서 바라보는 배경내 활동가의 지적이 정확하다. (☞관련 기사 "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학교폭력 문제 이전에 체벌 문제가 굉장히 이슈가 됐었다. 그때 교사들이 확인한 게 있다. 일종의 자기 고백인데, 그동안 학교가 '교사는 언제든지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기반 위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체벌의 빈도보다 이런 정서적 기반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가 그걸 건드렸다. '체벌을 교육적인 수단으로 볼 수 없다.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라는 말에 교사들은 심리적 박탈감을 느낀 이유다.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쓸 수 있다는 기반 위에서 학교가 움직이는데, 그걸 금지하면 교사 입장에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오늘의 교육> 특집으로 "언터처블 학교"를 진행하면서 마치 학교가 개인의 발달과 성장을 돕는 '돌봄과 배움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사고하는 현상을 '학교 착각(school illus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학교가 배움의 공간, 평화의 공간이라고 착각하다 보니, 폭력이 발생하면 교사들도 '어떻게 학교에서 폭력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학교가 폭력적인 공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법률 강의, 방관자 문제 못 푼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 담론은 넘쳐나지만, 주로 행정적인 관리를 중시하는 내용이다. 인격적인 만남 대신 행정적인 관리만 강조되는 상황 역시 어떤 면에선 폭력일 수 있겠다.
정용주 :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사실 법률 강의다. '이건 폭력이야. 이건 갈취고, 이건 언어폭력이야. 이걸 하면 학교에 못 올 수도 있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누가 때리고 맞았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나뉘는 상황은 이미 교육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이걸 교사가 수사해서 무엇 하겠나. 이미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약자일수록 철저히 짓밟힌다'라는 생각을 내면화 한다. 그냥 약육강식의 문화다. 폭력 상황에서 다수의 방관자가 생기는 건 그래서다. 방관자의 존재는 피해자 입장에서 그 자체로 가해적 분위기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엄격히 나누고 가해 행위에 따른 처벌을 명확히 규정하는 법률적 해법으로는 이런 방관자 문제를 풀 수 없다.
"지시와 명령만 있는 학교, 그리고 용산 참사"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걸 보면,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만 있다. 그 안에서 이해 관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은 없다. 행정 지침만 있을 뿐이다. <두개의 문>을 보면, '용산 참사 가해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학교폭력 문제도 그렇다. 폭력의 진짜 원인은 감춰져 있다. 일사불란한 체제, 지시 전달만 남은 체제, 일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문화, 이런 학교 문화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진도를 늦게 따라오는 아이에 대해 배려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서로 협력하는 법을 가리치지도 못한다. 지시와 명령만 남아 있는 문화에서 우리가 그 지시와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싸우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게 용산 참사다. 학교 문화 역시 다를 게 없다.
교사와 엄석대는 공범?
프레시안 : 학교폭력의 가해자를 지목하는데만 급급하다 보니, 온통 '일진' 이야기다. '일진'하면 떠올리게 되는 게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인데….
정용주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소재로 모의재판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의 질문이 무척 날카로웠다. 학생이 "(소설 속에서) 엄석대에게 반을 맡겨두고, 선생님은 승진하려고 교무실 가 있었던 것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엄석대의 사례는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밖에서 보면 분명히 학교폭력인데, 교실안에서는 일종의 치안 기능인 경우가 있다. 일진이 그 기능을 담당한다. 교사 입장에선 그 아이 한 명만 관리하면 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앞서 소개한 학생의 반응은 이런 점을 잘 짚은 것이다.
A반과 B반이 있는데 일진이 없는 B반은 급식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반면, 일진이 있는 A반은 소란이 없다. 소설 속 엄석대의 반이 그런 경우다. 또 다른 반 아이들이 A반을 못 건드린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이 치안화 되면서 교사도 생활지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프레시안 : 교사가 엄석대의 숨은 공범인 셈이다.
정용주 : 그렇다. 눈에 보이는 학교폭력의 이면에는 일진 또는 힘이 센 아이들이 엄석대처럼 치안 기능을 하는 현실이 있다. 이는 '복종에 기반한 평화'다. 교사들 역시 이런 식의 평화를 원한다. 시끄러운 것 싫어하고, 토론 싫어하는, 누구 한 명이 결정한 대로 따라만 가는 문화가 교사들에게 있다. 엄석대의 폭력을 묵인한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상담교사, 정규직으로 뽑자"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교과부는 일선 학교에 상담교사를 배치하겠다고 했다.
정용주 : 상담교사를 일괄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교사를 지금보다 더 소극적,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목소리가 교사 사회 일각에서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를 먼저 짚고 싶다.
우선 비정규직 문제가 있다. 교과부 정책은 결국 비정규직 상담교사를 대거 뽑아서 배치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뽑는 게 옳다. 정규직으로 뽑아서 학생의 심리 발달에 대해 일반 교사와 지속적인 협의를 할 수 있어야만, 교과부 정책이 의미가 있다.
상담교사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 '담임교사가 학급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굉장히 이상적인 것이다. 현실에선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히려 속 이야기를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교사들이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엄마들이 '내 자식은 내가 다 안다'고 말하는 게 위험한 것처럼. 교사 스스로가 '내가 학생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학생이 교사와 얘기할 수 없는 것을 조금 더 은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배치돼야 한다. 상담 중 학생이 교사를 비난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옳은 방향이다.
"'담임'만 통하는 일원화 구조 벗어나야"…"상담만능주의 역시 위험"
지금의 학교는 너무 일원화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담임이 개입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이런 일원화된 통로는 문제 해결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는 점에선 문제가 있다. 학교에서도 일원화되지 않은 체계가 작동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 상담교사 배치는 그런 면에서 필요하다.
물론, 상담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도 학교폭력 문제를 상담에 의존하는 모양새인데, 걱정스런 부분이 있다. 관련 내용을 보면 몇몇 단어가 집중적으로 쓰인다. '멘토', '코칭', '컨설팅' 등의 단어가 넘쳐난다. 예컨대 어른은 '멘토'가 되어서 '코칭'과 '컨설팅'을 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폭력을 개인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폭력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네가 잘 조절해'라고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 필요한 면도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상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담을 하면, 결국 답은 치유 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다. 그런데 한 아이의 폭력성이 사회적 문제, 예컨대 빈부 격차 때문에 생겼다면, 문제가 다르다. 이런 아이에게 상담과 힐링으로만 접근하다 보면, 아이에게 해줄 말은 '그냥 적응하고 살아라' 밖에 없다.
학교폭력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곪아있는 문제가 드러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걸 개인 차원, 학교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결국 통계 놀음이 된다. 상담을 몇 차례 실시했고, 폭력 사건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놓고 경쟁하게 된다.
"저항성 사라진 진보 교육감, '멘토' '힐링' 남발 우려스럽다"
프레시안 : '힐링' 유행에 대한 지적이 인상적이다.
정용주 : 요즘 진보 교육감들이 '컨설팅, 상담, 코칭, 힐링, 멘토' 같은 말을 많이 쓰는 게 좀 우려스럽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건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 담론일 뿐다. 어느 순간, 진보 진영도 '이런 상태에서 못 가르치겠다, 바꿔야 한다'라는 저항성이 사라지고 긍정의 주체로 바뀌었다.
교사도, 부모도 계속해서 긍정의 담론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킨다. '긍정적으로 생가하고, 감정을 코칭하고, 스스로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귀착점은 결국 '자기 착취'다. 자기 계발을 계속하게 만드는 셈이다. 한편, 자기 계발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낙오한다.
ⓒ프레시안 |
"'횡단보도 교통 지도, 길 건너 사는 아이 부모들만 해야 한다'는 학부모들"
프레시안 : 잘사는 아이들이 못사는 아이들을 배척하면서 생긴 폭력성이 '힐링'이나 '코칭'으로 풀릴 리는 없다. 또 '자기 착취'를 더 이상 할 여력이 없는, 말 그대로 방전되다시피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정용주 : '마을이 학교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 말은 '학교 자체가 배움의 공간이 아니다'라는 지적도 곁들여야만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등교 시간 40분 동안 통학로 횡단보도에서 멈추라는 깃발을 들고 하는 녹색 교통지도를 학부모들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학부모 총회에서 '길을 건너서 등교해야 하는 학생의 부모가 교통지도를 해야지, 왜 모든 학부모가 해야 하느냐'라는 항의가 있었다.
길을 건너서 등교하는 아이들은 맞벌이 가정이거나 조손 가정, 형편이 나쁜 가정이 많았다. 주변 지역 구분이 그렇게 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등하굣길이 위험하다. 그러니까 저항성이 더 강해지는데, 이걸 가리켜서 잘 사는 집 부모들은 '쟤 폭력적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말 자체가 폭력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은 다시 저항성이 강해지고, 결국 악순환이 된다.
"너 어느 아파트 살아?", "평수는 그런대로 좀 사네"
이런 사례도 있다. 목동에 한 중학교가 있는데 외국어고등학교를 1년에 60명씩 가는 학교다. 서울 외곽에 있는 아이들도 외고를 가기 위해 종종 목동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한 아이가 심각하게 다시 전학을 고민하길래 만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목동으로 전학 갔더니 아이들이 '너 어느 아파트 살아?'라고 물었다고 했다. 목동 아파트도 길 건너로 구분되는데, '길 건너 살아'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더 이상 말을 안 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 ○○아파트'라고 말했더니, '그런 아파트도 있어?'라며 '평수는 몇 평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40평이야'라고 답했더니, '아, 평수는 그런대로 좀 사네'라고 했단다. 또 과외를 같이 받는 아이들끼리 서로 뭉쳐 다니는 문화도 있다. 비슷한 경제력과 문화를 지닌 이들끼리의 동질성은 계속 강화되고, 외부를 향해서는 엄청나게 배타적이 된다. 결국 그 아이는 중학교 3년을 오기로 버텼다고 했다. 그 아이가 경험한 폭력이 과연 '힐링'이나 '코칭'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6학년만 돼도 가난하면 학생회장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초등학교 6학년만 돼도 '전교 학생회장은 엄마가 학교에 와서 열심히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못사니까 나는 회장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통한다. 공동체에서의 정치적 참여에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폭력과 불평등, 불합리에 대해 관조자가 된다. '나는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아이들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고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오히려 냉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학교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무의미한 존재로 규정하게 된다. 학교는 그저 의미 없이 왔다 갔다만 하는 곳이 된다.
학교는 이런 식으로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될 수 없어'라고 가르쳐 놓고는, '넌 커서 뭐가 되려고 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이런 학교에서 무슨 소통이 가능하겠나.
"학교폭력은 갑작스런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오늘의 교육>이 초기부터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을 썼는데, 몹시 인상적이었다. 학교 교육의 구조적인 절망을 똑바로 보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희망도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정용주 : 우리는 민주시민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민주시민을 길러 내는 과정은 굉장히 어렵다. 일단 어른부터 민주시민이 아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입시점수로 남을 누르는 경쟁 속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 오직 점수로만 학생을 평가하는 학교 문화에 별 문제의식이 없었고 오히려 수혜자이기만 했던 이들이 종종 교사가 된다. 서로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한 경험도 많지 않다. 팀티칭(team teaching)을 유난히 부담스러워하는 교사들이 많다는 점이 그 방증이다.
학교와 교사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학교는 사실 몹시 폭력적인 곳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니까, 일부 폭력 사건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다. 더 중요한 폭력에 대해선 눈을 감으면서 말이다. 학교폭력은 갑작스런 병증이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문화다. 이런 문화를 지탱해 왔던 시간의 무게가 있다. 그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 무거운 노력을 들여야만 학교폭력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다.
기사입력 2012-06-19 오전 11:25:18
(대구 수성경찰서 이장희 형사과장)
"2009년 4월경부터 2012년 6월 2일 오전까지 A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거나 A군의 가방을 들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행위를 강요당했고, 미술용품, 체육복, 축구 골키퍼 장갑을 갈취당하거나 고막이 나가는 상해를 입는 등 28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6월 18일자 방송 보도 요약)
학생 : 선생님, TV 끌까요?
교사 : 뉴스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요?
학생 : 그냥, 또 한 명이 죽었구나.
10년차 교사인 진냥(가명)의 눈에 학생의 얼굴은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할 만큼 건조해 보였다". 학생들은 누군가 한 명씩 죽을 때마다 "'사람이 죽는 곳에서 내가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마비된 통각을 일깨울까봐" 스스로를 바싹 옥죄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학생들 사이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죽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죽음이 선택지가 된 것'이다.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다'며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 현실을 우동기 대구 교육감의 말대로 '전직 대통령 탓'이라고만 비난할 수 있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12월부터 지금까지 대구·경북 지역에서 자살한 학생만 11명이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례가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와 투신 후 부상에 그친 경우까지 포함하면 십수 명의 학생들이 스스로를 포기했다. 특히 몇 건의 사건은 대구시내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진냥은 현직 교사인 동시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대구지부 활동가다. 청소년 인권 활동가로서 그는 '진냥'이라는 이름을 쓴다. 활동가 진냥이 보기에, 잇따른 학생 자살은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죽음이나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죽음'과 다를 게 없다. 사회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말이다. 진냥은 지금 원해수 감독과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학교>를 제작 중이다.
원해수 감독은 지난해 2월부터 대구에 머물며 학교폭력 문제를 카메라에 담았다. 원 감독은 우리 사회가 학생 자살 문제의 배경을 삭제한 채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행위 중심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원 감독은 2003년부터 동성애자,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여성, 장애인 활동 문제 등 사회적 쟁점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지난 10일 두 사람과 함께 한 인터뷰는 활동가 진냥을 위주로 진행됐다. 진냥은 교육 불모지, 대구에 대해 "참담하다"고 전했다. 그는 죽음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수학 공식화'된 사건 처리는 매번 똑같은 결과만을 낳는다고 비판했다. 정작 '사람이 죽는 곳에서 내가 살고 있구나'라고 자각하기 시작한 아이들의 심정을 어른이, 사회가 보듬어 앉지 못하는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소년들이 분노하고, 울 수 있고 폭발해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지금 작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편집자주>
ⓒ다큐멘터리 <학교> 예고편 영상 중 |
"대구는 집단적 패닉 상태"
프레시안 : 먼저, 대구 지역 민심을 알고 싶다. 지난해 12월 20일 대구 중학생 자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학교폭력에 따른 학생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했다. 당시 대구 분위기는 어땠는가.
진냥 : 중학생이었던 권 모 군의 투신자살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절절한 유서(인터넷 게임 아이템을 키우게 하고, 전깃줄을 목에 걸어 끌고 다니며 부스러기를 먹게 했다는 등)가 공개되면서 말 그대로 참담했다. 당장 대책회의가 잡혔는데, 회의 진행이 안 됐다. 진이 빠졌다. 특히 교육이나 인권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활동가들이었기에 감정적 여파도 더 컸다. 한 3주간은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다. 사실상 집단적 패닉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대구가 다른 지역보다 학교폭력 문제에 더 예민한 것 같다. 계속 자극이 있으니까 당연한 일 아니겠나. 올해 1월 아수나로 전국 총회를 대구에서 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청소년들이 대구 지역 뉴스를 보더니, 당황해 했다. "다른 지역보다 학교폭력과 관련한 뉴스 빈도가 훨씬 높다"는 것이다. 대구는 확실히 버거워하고 있다.
"문제의 배경에는 눈 감는 언론, 가해자에게만 초점 맞춰"
프레시안 : 원해수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지난해 2월부터 현재 대구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본 느낌은?
원해수 : 신문이나 방송 등 미디어들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얼마나 때렸는지'와 같이 행위 중심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또 사람들 대부분이 가해자는 무조건 나쁜 놈이고, 피해자는 '어떻게 하느냐'는 식의 불쌍한 감정만 갖고 있다.
일이 발생한 데에는 분명히 배경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솔직히 화가 났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는 것에 대한 화와 학생들이 죽어 간 슬픔이 공존해 있다. 사실 다큐멘터리 제작 초기에는 그런 감정들이 별로 없었다.
다큐멘터리 제작하면서 주로 탈학교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교란 공간 자체가 사람들이 버티면서 살기에는 힘든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온갖 규칙과 제도만으로도 반인권적 공간인데, 학생들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억압하고 짓누르기만 하는 것 같다.
진냥 : 원 감독이 '배경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최근 2일 사건이 가장 안 좋게 풀리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12월 20일 중학생이 죽었을 때는 교육청이 이 문제를 학교 차원에서 이야기하며, 학교장 책임을 촉구했다. 나흘 뒤(지난해 12월 24일), 고등학생이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때만 해도 경찰이 학교를 직접 조사하면서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이후 사건이 진행될수록 관심 범위가 더 좁아졌다.
특히 이번 사건은 가해자 한명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가해자, 피해자의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학교도 책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상황이다. 결국 가해 학생 한 명에게만 책임을 추궁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와 관련한 고민이나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 학교폭력에 대해 고민이 깊어지고 넓어지기보다는 더 좁아지고 삭제되어가는 느낌이다. 정말 안타깝고 속상하다.
▲ 다큐멘터리<학교>를 제작 중인 활동가 진냥(왼쪽)과 원해수 감독(오른쪽) ⓒ프레시안(이명선) |
2주에 한 명씩, 선택지가 된 죽음
프레시안 : 최근 6개월 간 언론에 알려진 대구 지역 학생 자살 사건만 해도 11건, 자살시도까지 포함하면 13건이다. 2주에 한 명씩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셈이다. (사건 당시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일이 뒤늦게 확인된 경우도 있다. 이를 포함하면, 자살 사건 발생 수치는 더 높아진다. <편집자>)
진냥 : 대구 학생 자살 사건 중 세 건이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 지역은 대학 진학률이 높은 명문 고등학교가 모여 있어 대구에서는 이곳을 일명 '(대구의) 대치동'이라고 부른다. 첫 자살 사건이 일어난 지난해 12월 20일은 일제고사 날이었다. 입증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자살 이유 중 시험 스트레스도 있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인터뷰 한 사람 중 세 명이 그 지역 사람이기도 하다. 또 축구 동우회 활동을 하며 중학교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최근 자살한 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인터뷰했다. 자살한 친구들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친구의 친구같이,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식이다. 이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 '죽음'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지 않겠는가.
지난 2일 자살한 김 모 군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이렇게 얘기했다. "그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죽음이 뭔가 선택지가 된 거 같다." 이 말을 되돌려보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건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 대구·경북 지역 2011년 12월~2012년 6월 중·고생 자살 사례 ⓒ프레시안 |
'사람이 죽는 곳에서 내가 살고 있구나'
프레시안 : 학생들 사이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죽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인가. 말처럼 큰 충격을 받은 아이들도 있겠지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진냥 : 한 학생은 "'그냥, 또 한 명이 죽었구나' 정도로만 생각된다"고 말했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도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할 만큼 건조해 보였다. 반면, 낙엽 같은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학생은 지금 상황이 "되게 어색하다"고 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한 반에서 반 이상의 학생이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라고 하는데, 그때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제 와서 학생들에게 '죽지 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는 학생들이 '시험 성적 때문에 죽고 싶다' 같은 압박을 받을수록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을 버티기 위해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오히려 문제를 더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군대에 간 사람들이 군대 인권 침해에 대해서 더 둔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같다. 관련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스스로 살아가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명씩 죽어가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사람이 죽는 곳에서 내가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마비된 통각을 일깨운다고 본다. 물론 이런 이유로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살을 더 고민하는 사람도 생긴다.
너무 힘들다. 언론도 힘들고, 보는 사람도 힘들고, 청소년도 힘들고, 활동하는 사람도 힘들다. 열심히 활동을 해도 또 사람이 죽는다. 적어도 사람이 죽지는 말아야 하는데, 사람이 죽을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친 것에 대한 자괴감이 든다. 이런 마음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22번째 죽음이나,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죽음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누군가를 살리지 못하고 죽게만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다큐멘터리 <학교> 예고편 영상 중 |
우동기 교육감 '베르테르 효과'? 사건 회피 꼼수
프레시안 : 지난 5월 2일 우동기 대구 교육감이 YTN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부터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삶의 한 방법으로,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고 있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우 교육감의 말처럼 대구 지역의 잇따른 학생 자살이 일종의 '베르테르 효과'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진냥 : 우동기 교육감의 그 말에 굉장히 분노하는데, 당시 YTN 기획의도가 '베르테르 효과'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대구 학생들의 계속된 죽음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유는 베르테르 효과와 자신의 참상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심지어 죽음을 걸고 하는, 죽음으로써 (우리 사회 교육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데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고, 독립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연약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죽는 것까지도 따라 죽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로 학교폭력의 원인, 배경 등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려는 것이다. 배경을 모두 삭제시키고 절단해 내는 일이다. 일련의 사태가 설혹 따라 죽은 것이라면, 따라 죽는 이유도 고민해야 한다. 우동기 교육감이 '청소년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라서 죽는 것'이라는 말로 문제의 배경을 절단한 채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만 하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일 학생들이 그저 '따라 죽는 것'이라면 시민들이 이렇게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오히려 비웃을 것이다. 누가 봐도 지금의 학교가 청소년들이 못 버틸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분하는 것이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는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이다. 동조자살(copycat suicide) 또는 모방자살이라고도 한다. <편집자>)
'수학 공식'이 된 학교폭력, '그 후'
프레시안 : 누군가의 자살로 학교폭력 실체가 드러나면 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수사하지만, 학교 내에서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진냥 :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전후라는 개념이 벌과 징계밖에 없다. 학교 게시판에 보면 학교폭력에 대한 게시물이 굉장히 많은데, 내용이 두 가지밖에 없다. '신고하라'는 것과 '신고 당한 사람이 처벌받는다'는 것. 요즘 학교 홈페이지에도 팝업으로 다 뜬다. 학교폭력이 '수학 공식화'되고 있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교에서 피해자 걱정도 크지만 가해자에 대한 것도 굉장히 안절부절 해한다. 가해자도 굉장히 예민해진다. 물론 가해자에게 필요 이상의 징계, 책임전가 조치는 피해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문제 제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공식적인 프로토콜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학교폭력 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청에서 생산되고 있다. 말 그대로 도식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도식화대로 따라가면 더 이상 문제가 커지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의 처리는 그렇게 하더라도 이후에 여러 가지 것들이 만들어지고 살이 붙어나가는데 '이후'라는 것이 전혀 없다.
대구지역은 작년 초에 일반상담교사를 다 없애고, 상담실도 다 '입시상담, 진로상담'으로 바꿨다. 대구교육청이 '상담'의 콘셉트 자체를 다 바꾼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20일 사건이 일어난 이후, 상담교사를 대부분 새로 배치했다. 교육청이 '상담 인력을 배치하겠다'고 했을 때 중·고등학교만 700개에 달하는데, 전문 상담인력이 36명에 불과했다. 문제 제기가 되니까 교육청에서 대학생 등 자원활동가를 배치해 인력을 보충하겠다고 했다. 대학생 자원활동가로 지금 사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발상 자체가 학교폭력 문제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드러내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학교> 예고편 영상 중 |
'학교에서 사라지는 학생들'
프레시안 : 학생 간 폭력의 경우 '일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단화·조직화 되어 있어 해결이 쉽지 않다고들 말한다.
진냥 : 학생 간 폭력의 특수성은 학교를 졸업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어떤 학교에서 일진이었던 사람이나, 빵 셔틀을 돌던 사람이나 졸업하면 더 이상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물론 반년에 한번쯤 만날 수는 있지만, 학교 때처럼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즉, 학교를 그만두면 되는데 학생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못 하고 있다.
알려진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이 굉장히 모범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직장에서 직장 상사가 괴롭히면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직장을 옮긴다. 그런데,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못하고 버티다, 버티다 죽는다. 지금의 학교가 얼마나 강고한 곳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학교 때 학교 내 몇몇 친구들이 무서워서 전학 가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 '전학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전교 1등 하면 (전학)시켜주겠다'고 했다. 지금 청소년들의 절망감이 그때의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피하고 싶은 존재가 있는데 학교 밖으로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학교란 '링' 아래로 내려올 수 없다. 학교에서의 삶이 그 학생 삶의 전부이고, 학교를 놓는다는 것은 삶 자체를 놓는 것이니까 학교 안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을 놓는 것이다.
프레시안 : 하지만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학교를 그만두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조금 해결될 수 있어도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 해결이나 대안으로 보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진냥 : 일단 스스로 목숨을 버릴 확률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 아닌가. 학교폭력에 시달리거나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이 종종 전학을 택한다. 그런데 전학은 꼬리표처럼 서류에 늘 따라붙는다. 심지어 올해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학교폭력 대책 일환으로 학생 징계 사항을 학생생활지도 기록관리카드에 기록하라고 했다. 학교폭력 문제로 전학을 가면 사실상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학생들이 이미 자퇴를 하거나 대안학교를 가는 식으로 탈학교를 하고 있다.
자살 말고도 학교에서 사라지는 학생들이 많다. 한해에 2~3만 명이 공교육에서 이탈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이기 때문에 2~3만 명이라는 수치가 공식적 통계로 추산된 것은 아니다.(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 중에는 자아실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도 있지만, 소위 '학교'를 부정하는 학교가 더 많이 설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나오는 학생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학교가 사람이 버티지 못하는 공간이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은 2011년 한 해 동안 학업을 그만둔 초·중·고교생이 7만6489명이라고 밝혔다. 고등학생의 경우는 2008년부터 학업 중단자 수가 꾸준히 늘어 2011년에만 3만8787명이 학교를 떠났다. 하루 평균 106명꼴이다. <편집자>)
'학생'으로 획일화된 정체성, 개성과 다양성은 실종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의 원인에 대해 많은 분이 '관계'를 지적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폭력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 당국의 대책이나 대안에는 '관계'가 배제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진냥 : 학교에서의 삶이 그 사람 삶의 전체인 것이 문제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직장에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삶 등 삶의 여러 다양한 면이 있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한테는 학생의 정체성밖에 없다. 심지어 요즘에는 가정 내 가족관계도 부족해지다 보니,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이라는 정체성도 없다. 관계라는 게 있어야 그 관계에 비롯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생기는데, 청소년들은 학교 말고는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기가 파워 있는 사람이 되거나, 짓밟히는 사람이 됐을 때 자신의 삶 전체가 그렇게 느껴진다. 딱히 다른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분이 학생 간 폭력에서 또는 학교폭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담시간을 늘리든 예체능 수업이 늘어나든 모든 것이 학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한 사람 다양하고 풍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본인에게 존재해야 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개성'이다. 그런데 한 사람에서 '학생'이라는 정체성만 계속 부각되어 있는 상황에서 학교폭력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사람에게 좀 더 다른 삶, 학교 밖의 다른 삶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문제 해결법이라고)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교 안에 있는 사람으로 계속 사고하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 부분을 놓치는 것 아닐까.
ⓒ다큐멘터리 <학교> 예고편 영상 중 |
"우리는 학교에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프레시안 : 교육 주체, 구성원이라고 하면 교사-학부모-학생을 꼽는다. 그러나 교사와 학부모로 무게중심이 많이 쏠려 있고, 학생들은 늘 배제되어 있다. 학생이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자신의 정체성도 확고해지지 않겠는가.
진냥 : 프랑스 교육을 다룬 <클래스>(로랑 캉테 감독 / 2008)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는데, 학생의 성적을 내는 과정이 우리와 많이 달랐다. 여러 과목의 선생님들이 모여 회의처럼 진행이 되는데, 학생의 시험 성적뿐 아니라 다른 수업에서의 자세와 태도까지 통찰력 있게 평가했다.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평가활동이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학생이 평가위원으로 참석해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험과 성적에 관해서는 학생이 절대 관여할 수 없다. 교사만의 불가침 영역인 셈이다. 초등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공간을 같이 쓰다 보니, 학생들이 교탁 위 물건에 절대 손을 못 대게 한다. 성적을 내고 있을 수도 있고, 시험문제를 출제 중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선까지는 오지 말아라'라고 주의를 주곤 한다. 초등학교지만,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업무이다. 그래서 성적과 관련해서는 학생은 늘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었는데, 영화에서는 학생이 성적을 평가하는 데 주요한 구성원이었다. 정말 센세이션했다.
교사들이 "이 학생은 수학 점수를 'B'를 줘야겠다"라고 하자, 학생이 "그 친구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자기가 보기에는 'A제로' 정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수학 점수만 보면 B일수 있지만, 노력의 정도로 봤을 때 A제로를 받을 만큼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는 우리 교육에서도 상호 평가라든지 자기 평가를 반영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입시체제가 강고하다 보니 실제 평가에는 반영이 잘 안 된다. 그런데 프랑스에선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 실제 상호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평가'라는 교사의 가장 고유한 업무에도 학생의 참여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생활에도 학생 참여권이 없다.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학내 갈등이 일어났을 때 사건 해결의 접근법은 철저히 교사 권력 중심이다. 학생의 발언권과 참여권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그 문제를 가장 많이 알고, 결국 그 문제를 고쳐야 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학생 참여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사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인터뷰에서 학생들이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발언권이 없다.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학교폭력 문제 해결법은 바로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발언권을 주고, 귀 기울여 주는 것. 엄기호 씨(<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저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가 "학생들은 학교 구성원이긴 하지만 '성원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라고 말하는데, 그게 (문제 해결의) 핵심 아닐까.
어른의 분노보다는 아이들의 분노가 먼저
프레시안 : 교사로, 또 활동가로,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학생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부모 중에는 여전히 자식인 학생과의 대화가 가장 어렵다고 호소하는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청소년들과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냥 : 지난해 반 학생(당시 초등학교 6학년, 현재는 중학생)을 인터뷰했는데 학교에서 매일 맞는다고 털어놨다. 오히려 인터뷰 중에는 안 울다가 인터뷰가 끝난 뒤, 왈칵 울음을 쏟아냈다. '네가 뭘 잘 못 했다고, 매일 맞느냐'라고 물었더니 계속해서 '내가 잘못해서 맞았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화를 냈다. 오히려 피해자가 담임교사인 나에게 화를 내야 하는데, 내가 맞은 피해자에게 화를 낸 것이다.
우리가 학교폭력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그날의 나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화내며 가해자든, 피해자든 '도대체 너희는 뭐가 문제냐'라고 소리치고, '너희 좀 잘할 수 없느냐'라고 질책한다. 부서지고, 상처받고, 죽어가는 사람은 학생들인데 밖에서 화내고 밖에서 참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얘기할 수 있는 공간도 없고, 잘 못 한 것도 결국은 그들이다.
활동가로 상담할 때도 보호자에게 당부한다. 보호자가 감정을 내세우면 당사자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죄책감만 들 것이다. 학생이 울도록 해주고, 학생 앞에서 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정 울고 싶으면, 저에게 오세요'라고 말한다.
당사자인 학생이 아닌 우리에게 지금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소위 어른들이라면 감정을 추스르고, 덜 참담해하고, 덜 분노하고, 안에서 당하는 청소년이 분노하고, 울 수 있고 폭발해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독립다큐멘터리 <학교>는 '부서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학교에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부서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원해수 감독은 "학교폭력이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형태가 다르다"며 답답해했다. 그래서 <학교>는 학교폭력을 둘러싼 오해와 착각들을 학생들의 인터뷰로 담아낼 예정이다. 시민 공동제작 방식으로 내년 2월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레시안 : <학교>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만들게 됐나. 원해수 : 대구 장애인 단체 활동을 기록하다 학교폭력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학교'라는 공간을 주목하게 됐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의 '지금의 학교가 폭력을 더 확장시킨다'라는 말처럼, 지금의 학교가 없으면 학교폭력은 이렇게 확산되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과연 학교를 졸업하면 우리 삶은 좀 나아지나'라는 생각이 있다. 대한민국 굉장히 폭력적인 사회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강정도 그렇고, 평택쌍용자동차에서 노동자가 죽어나갈 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한민국, 학교라는 거대한 숲은 제대로 안 보고, 나무만 보니까 문제가 해결은 되지 않고 이야기가 쳇바퀴 돌 듯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10~20분 정도 짧은 영상만 만들었는데, 이번엔 30~40분 중편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용에 따른 무겁고 우울함까지 겹쳐 완성까지 개인적으로 심신이 복잡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20분 미만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학생들을 만날수록 '학교폭력이 구조적인 문제구나'라는 생각에 '학교라는 숲을 좀 더 잘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프레시안 : <학교>의 부제에 '부서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어떤 의미인가? 진냥 : 학교가 '폭력의 숙주'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학교가 부서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배출해내는 곳이다. 그래서 이 사회 전체가 부서진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회가 폭력에 둔감하고, 평상을 유지하며 잘 살 수 있는 구조가 된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학교가 인큐베이터인 셈이다. 부서지는 사람들을 배출해내는 공장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의 학교는 유하 시인의 시 "학교에서 배운 것"(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중)에 나오는 말처럼 '침묵하는 법, 비교하는 법, 굴복시키는 법'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시민 공동제작 방식으로 모금 활동에 나선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시민들 참여는 어떤가. 진냥 : 만들어지지 않은 영상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무모한 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준다. 학교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고민이나 생각을 들을 때마다 '같이 만드는 공동 작업이구나'라는 생각에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지난 2일 사건이 월요일인 4일 날 크게 보도되면서 일반인들의 참여가 늘었다. 한 분은 "할 게 이것밖에 없다"며 "나는 빠지고 (제작자들을) 가혹한 길로 내모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과 돈의 무게, 그리고 죽은 친구의 여파라서 정말 무겁게 다가온다. <학교>제작에 800만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500만 원을 웹을 통해 모으고자 한다. 5월 말부터 시작했고, 현재 서른 명 정도가 참여해 약 100만 원이 모였다. 후원해주는 모든 분의 이름을 엔딩크레딧과 DVD에 수록할 예정이다. (<학교> 블로그 http://brokenpeopl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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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6-10 오후 4:30:49
올해 초 김 군은 A4 용지 세 장 분량으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김 군이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매일 잡혀가는 모습이 나올 것"이라는 김 군의 말처럼 "OO 초등학교 앞CCTV"만 알고 있었다.
인권교육센터 '들'의 배경내 상임활동가를 만난 건 그래서였다. 폭력의 반대편이 있는 개념이 인권이다. 죽음으로 몰고간 폭력을 'CCTV'만 알고 있었다는 현실은, 동시에 우리의 학교가 얼마나 폭력에 무감각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인권이 그저 교과서 속 개념으로만 여겨지는 학교 현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하다 인권교육센터 '들' 설립을 주도했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에도 참가했던 배경내 활동가는 학생 인권에 대한 보장이 학교 폭력을 줄이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언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다. 학생 인권 보장이 교권 약화를 낳고, 이는 다시 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통제를 완화해서 학교 폭력을 더 심각하게 한다는 게 보수 언론의 주장이다. 하지만 배경내 활동가는 가해자 일부를 솎아내서 처벌하는 방식의 학교 폭력 대책은 오히려 폭력의 방관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본다.
학교 공동체 전체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작업이 우선이라는 것. 인권에 무딘 교사와 학생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무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맞을 짓'을 한 학생을 때려도 된다는 생각,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혀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통하는 학교에서 힘이 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번에 자살한 학생은 3년 전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진 뒤에 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지독한 괴롭힘이 3년이나 이어졌지만, 주변에선 아예 몰랐거나 설령 알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폭력에 무덤덤한 학교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아이들이 '주류 엘리트', 요컨대 사회에서 강자로 통하는 어른이 되기만을 바라도록 몰아가는 교육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무시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한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약자에게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험 점수 경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닥치고 시험 공부'라는 말이 공공연히 통하는 학교에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건 그래서 어쩌면 필연이다.
배 활동가가 정부의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약자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곳에서 '폭력은 나쁘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는 것. 오히려 아이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지난 1일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는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배경내 활동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했다. <편집자>
▲ 인권교육센터 '들' 배경내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
"폭력은 '괴물'만 휘두르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 교육과학기술부가 만든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때론 인권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폭력을 예방하는 대책이 반(反)인권적이라면 상당히 역설적이다. 마침,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썼다.(☞바로 가기 : "여자애가 '호모'라고 놀려서 때렸다는 남자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
배경내 : 교육부의 '학교폭력 근절대책'에 따라 올 3월부터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학생의 폭력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을 폭력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기록한다는 것인데, 이는 폭력을 가진 인자들의 징후를 미리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 대책이 전제하는 것처럼, 폭력이 특별한 몇 사람, '괴물'들만 저지르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이번 대구 자살 사건의 경우, 가해자는 내성적인 성격에 성적도 상위 20퍼센트 이내였다고 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편집자>)
폭력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특정 개인의 속성을 발견해서 특별히 관리하는 방식으로 예방되지는 않는다. '관계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흔히 인권을 개인 단위로 행사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인권이 보장된다'라고 했을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인권 친화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대책은 이런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문제가 있는 개인'을 찾아내면 된다는 식의 대책은 의미가 없다.
"차별 해결 없는 폭력 해결은 불가능"
크게 세 가지를 질문해 보자. 먼저, 폭력의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찾을 것이냐? 무엇이 폭력을 키우고 있는가? 두 번째, 폭력의 피해가 왜 그토록 치명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사람이 왜 증언자가 되지 않고, 방관자 혹은 동조자가 될까?
먼저 첫 번째 질문이다. 폭력은 우연히, 개인적으로, 비이성적인 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해서 행사되는 게 아니다. 폭력의 대상을 발견하고, 행사되는 과정에 폭력의 원인이 있다. 한마디로 '차별'이다. 그래서 차별의 문제를 명확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차별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힘의 서열 관계를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폭력은 늘 강자와 약자 사이의 '차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지금 학교폭력 대책에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그래서 학교폭력의 뿌리를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폭력 가해자인 학생들을 만나면, 대부분 "걔(피해자)가 맞을 짓을 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맞을 짓을 했다'는 말은 폭력을 행사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을 경미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을 때 자기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맞을 짓을 했으면 때려도 된다'라는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다.
"'맞을 짓' 했으니까?…폭력 피해자는 두번 운다"
프레시안 : '폭력이 아예 없는 세상'은 어차피 불가능한 것 아닌가.
배경내 : 그렇다.근본적으로 폭력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폭력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폭력이 발생하는 빈도를 약화시키거나,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다루는 힘이 강해지거나, 아니면 피해자에게 남는 흉터나 상처가 덜 치명적이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 가지일 것 같다.
학교에선 맞아도 되는, 쓰레기 취급을 당해도 되는, 심부름해도 괜찮은 아이로 여겨지는 학생이 꼭 있다.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문화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생겨난 데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네가 잘못했으니까 맞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학생들이 폭력 피해자가 됐을 때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이는 앞서 말한 세 가지 질문 가운데 두 번째와 관계가 있다. 우리가 폭력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도, 폭력이 피해자에게 덜 치명적이게끔은 할 수 있다.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에선 이 대목이 빠져있다.
"아이들은 왜 폭력을 방관하기만 했을까"
이제 앞서 말한 세 가지 질문 가운데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왜 아이들은 폭력 사건의 증언자가 되지 못할까. 왜 방관자 혹은 동조자가 될까. 앞서 한 이야기와 맞물린다. '맞을 짓'이라는 게 있다는 문화 속에선 아이들이 굳이 도덕적 긴장을 무릅쓰고 폭력 사건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공부나 해라"라고만 하는 학교 문화 역시 이유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해 결코 '해결자'로 초대되지 않는다. '어른들이 해결해줄 테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는 식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죽고 나니, 화풀이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는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느냐"라고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늘 공부 외의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던 어른들이 이렇게 돌변하면, 아이들도 당황스럽다. 이런 식으로는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증언자로 나설 수가 없다.
폭력 자체를 근절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일종의 탄성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폭력 피해에서 회복할 수 있는 탄성 말이다. 이런 탄성을 키우려면, 어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일관돼 있어야 한다. 언제는 '맞을 짓' 하면 때려도 된다고 하다가, 학생들끼리 생겨난 폭력 사건에선 무조건 때리면 안 된다고 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 "'쓰레기' 취급을 당해도 싼 사람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보내야 한다.
"'안도감' 때문에 때린다"
ⓒ프레시안(최형락) |
배경내 : 물론, 학교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주 복합적이다. 아이들이 폭력 피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 가운데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다'라는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맞을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약하니까 맞았다'라는 생각도 있다. 이 대목도 잘 살펴야 한다.
범죄자들이 폭력을 휘두를 때, 그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안도감'이라고 한다. '쾌감'이나 '우월감'이 아니다. 왜, 안도감일까? '내가 때리는 동안에는 맞지 않는다'는 안도감이다. 많이 맞은 사람은 남을 때려서 안도감을 얻으려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논리가 폭력 피해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는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다만, 폭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을 부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자기보다 (폭력의 서열에서)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서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호모라고, 동성애자라고 놀림 받았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때리고 강간한 사건이 있다. 강간으로써 자기가 남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소수자로 배척된 경험이 새로운 약자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 경우다.
"학교 폭력 대책, 어려운 가정에 대한 편견 조장 말아야"
프레시안 : 하지만 걱정스런 면도 있다. 최근 학교 폭력이 쟁점이 되면서, 가정 및 사회의 구조적인 면에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자칫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 <중앙일보>가 강력 범죄자들의 어린 시절을분석해 통계를 냈더니, 이혼·가정 내 불화 등 부모로부터 폭력에 노출된 경우가 66.7퍼센트였다고 보도했다. '폭력 가해자는 문제 가정에서 나온 괴물', '이른바 문제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위험하다' 등의 편견이 생긴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다.
배경내 : 폭력 문제에 대해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잘못이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서 꼭 폭력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절대 우리 부모 같은 존재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또 폭력성의 원인이 꼭 가정 때문인 것만도 아니다. 이른바 '정상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성을 띠는 경우도 많다. 폭력을 배우는 곳은 가정 외에도 아주 다양하다.
중요한 건, 폭력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약자에게 폭력을 재생산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폭력이 줄어든다.
어차피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를 만나건 아이들이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어른으로 자라게끔 하는 일은 학교와 사회가 할 수 있다. 학교가 할 일은 그것이다. 내가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수 있게끔 하는 것, 폭력의 방관자로 머무르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게끔 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과학기술부가 만든 학교폭력 고위험군 분류 기준이 참 안타깝다. 이 기준은 '가난한 집 아이들은 폭력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라는 편견에서 출발한다.
이런 분류 기준이 오히려 가난한 집 아이들에 대한 차별적인 낙인효과를 낳고, 결국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폭력의 피해자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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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가정 탓, 가정은 학교 탓, 그도 안 되면 게임 탓"
프레시안 : 폭력의 구조적 이유를 찾는다면서, 실제로는 사회, 경제적 약자들에게 폭력의 원인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책임한 짓이다.
배경내 : 자기 자녀가 가해든, 피해든 폭력을 경험했다고 하면, 부모들이 깜짝 놀라면서 보이는 반응이 있다. "우리 아이가 뭐가 모자라서?"라는 것이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폭력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다는 편견 때문이다.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자녀의 폭력 사건은 대단한 충격이다. 동시에 이 경우는 해법을 찾기도 몹시 어렵다.
하지만 '가정 내 문제'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관계'다. "이 친구한테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만한 사람이 있었을까"가 "부모가 그렇게 길렀느냐?"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다. "누구든 간에 의지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학교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대접받았나?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나?"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자기 책임을 벗어나는 방식, 서로 뺑뺑이 돌리는 것, 요컨대 학교는 가정 탓하고, 가정은 학교 탓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친구 탓하고, 정 안되면 게임 탓하고, 이렇게 핑퐁게임을 하는 것은 이제 멈춰야 한다.
"폭력 앞에서 쪼는 건 당연, 문제는 그 다음"
프레시안 : 앞서 한 말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아이들이 왜 학교폭력의 방관자가 될까'라는 질문이다. 학교폭력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 부분은 많이 안 다뤄진 것 같다.
대안교육 전문지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씨는 "싸울 때 제대로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이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을 키우는 것이라면, 학생들이 눈 앞에서 뻔히 벌어지는 폭력을 '나 몰라라' 하는 어른으로 자란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로 가기 : "'일진' 솎아내며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아이들 입장에서는 '맞을 짓이다'라고 생각해서 폭력을 방관할 수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어? 저거 맞을 짓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방관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다. 보수언론 식으로 진단하면 "일진 애들이 너무 흉포해서, 무서워서 그렇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배경내 : 누군가가 힘을 괴팍하게 휘두를 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쪼는' 것은 당연하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것을 탓하면 안 된다. 그럼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진짜 중요한 문제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니까 아이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친다 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한계가 있다. 폭력 문제를 '나 홀로 맞서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권 문제에선 '당사자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 개개의 개체로만 다루는 것이다. 이 경우, 폭력의 목격자들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같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의 학생들의 삶에서는 사라진 경험 중 하나다. 이런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을 모아 서명을 받고, 집회를 열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은 '함께'여서 용기를 낸다"
폭력 앞에서 겁이 나다가도, 누군가가 "저건 잘못인 것 같은데?"라고 지적하고, 주위에서 "맞아, 맞아"라고 호응을 해주면 상황은 바뀐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상황에 개입하게 된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용기 있는 게 아니다. '함께'여서 용기를 낼 수 있다. 이처럼 함께 용기를 낸 경험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의 학교는 이런 관계들을해체하게끔 되어 있다.
지금 학교 환경에서는 폭력과 불의 앞에서 "네가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얘기하도록 장려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여럿이 얘기하면 "대표가 혼자 말해"라고 말한다. 집단적으로 문제를 푸는 경험을 통제하는 것이다. 학교는 한편으로는 집단주의적 문화를 강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그룹을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중성이 있다.
학생이 학교 폭력의 증언자가 되기 힘든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입장에선 증언자가 되는 게 위험한 일에 '연루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가 결국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느껴야 한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에 대해 함께 문제를 풀어간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학생 인권에 대한 보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이 일방적인 훈육 대상에서 벗어나 인권을 지닌 주체로 인정받아야 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잘못했어요. 사과하세요…상황이 '탁' 터지면서 서로 '실'이 이어지는 경험"
얼마 전 충북 음성에서 과학 교사가 학생 두 명을 불러서 중력의 원리를 설명한다며 서로 잡아당기기 했는데, 몸집이 큰 여학생이 수치스러워 울었다. 그때 지켜보던 한 학생이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사과하세요"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가해 교사와 피해 학생에게만 국한됐던 당사자성이 '선생님이 사과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얘기한 용기 있는 학생 덕에 상황이 '탁' 터지면서 서로 '실'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맞아요, 선생님이 사과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게 됐고, 결국 선생님이 여학생에게 사과했다.
(지난달 17일 충북 음성의 한 중학교 과학 교사가 '중력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몸집이 뚱뚱한 학생과 왜소한 학생을 불러 서로의 손을 당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몸집이 큰 학생이 수치심에 울음을 터트렸고,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교사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일이 '학생들이 과학 수업 중에 실수한 교사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게 만들었다'라고 소문이 나면서 충북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21일 충북 교육계와 교과부는 교사가 자세를 낮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달랬던 모습이 '무릎을 꿇었다'고 와전된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학부모들은 "교사가 무릎을 꿇으면서 학생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 교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것 아니냐"라고 비난 했고, 보수 진영은 이를 '교권 침해'로 몰아갔지만, 잘못된 사실 관계에 기반한 주장이었다. <편집자>)
"잘못은 피해자에게 했는데 반성문은 교사에게. 그리고 상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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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시간'이다. 예컨대 학생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하자. 사건을 차분히 들여다 보고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교에선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폭력 사건이 눈에 띄자마자 "야, 네가 잘못했다"라며 교사가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 지정해준다. "사과해, 사과 안 해? 그럼, 너 잘못했어. 벌점!" 아니면, "너 잘못했으니 맞아야 되겠구나"라며 (친구를) 때렸다고 (교사가 학생을) 때린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됐다.
그런데 이 방식이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친구를 때렸는데, 반성문을 내는 것은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잘못했다'며 반성한다. 또 친구를 때려서 벌점을 받았는데, 교무실 청소하고 상점을 받아 잘못이 상쇄된다. 이런 게 지금 학교에서 이뤄지는 훈육 시스템이다.
학교에서는 벌을 준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어진 끈을 끊어놓고 있다. 걸리면 재수 없을 뿐이고, 교사가 두려워서 숨기거나 피할 뿐이다. 학생들 입장에선 '우리가 함께 이 상황을 책임지고, 함께 가해자에게 벌을 줘야 한다'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다. 벌주는 사람(교사)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끼리 책임지게 하는 방식을 생각해봐야 한다.
"'신경 끄고 공부나 해!'…폭력의 방관자로 자라는 아이들"
그래서 현병호 발행인의 말처럼 '제대로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폭력과 불의에 대해 제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쨌거나 "아!"하고 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같이 아프고 힘들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폭력 상황이 자기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해하는 '해석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공부나 해"라며 학생들이 서로의 관계, 문화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의 방관자'로 자란다.
프레시안 : 학생들은 폭력을 당해도 '(부모나 교사에게) 얘기를 안 하는 게 낫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배경내 : 사실 어른들은 목격자인 학생들에게 상황이 그렇게 심각해졌는데도 말을 안 했다며 굉장히 분노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잃고 나서는 안타까워하면서 "왜 우리에게 얘기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돼 있나.
아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얘기할 것 같은가. 부모?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먼저 해결하려 한다. 문제가 발생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주위의 친구들과 얘기해보고 정 안 되면 부모에게 가는 게 순서다.
"폭력 당하며 왜 말 안 했냐고?…어른들은 아이들 얘기 들어줄 준비 돼 있나"
보통 아이들에게 "그래, 너 그렇게 힘들었을 때 어떻게 했니?" 하고 물으면, "얘기할 사람이 없었어요"라고 답한다. 학교폭력 피해자나 가해자의 가정이 도덕성과 권위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라면, 아이 입장에선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더 어렵다.
학교폭력 문제를 말할 때 이런 관계성 속에서 (학생들의) 말이 터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에 대해 성찰하는 어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머리 교육'이 참 싫다.
(교과부는 '학교폭력 근절 대책'의 일환으로 지난 2월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교과부 전 직원이 매주 수요일을 '밥상머리 교육의 날'로 지정해 출퇴근 시간을 30분 일찍 앞당겨 자녀와 함께 식사 및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교과부는 다른 부처와 유관기관 등에도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밥상머리 교육'에 적극 동참해주도록 권고할 계획이다. <편집자>)
"'밥상머리 교육'이 학교폭력 해법?…밥 먹다 체한다"
프레시안 : '밥상머리 교육', 그게 그렇게 나쁜가?
배경내 :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는 발상은 사람을 단세포로 보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같이 밥 먹는 순간이 기쁘려면, 그 관계에 동등성과 존중감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역이다.
교과부 밥상머리 교육 지침을 보면, '대화할 수 있도록 밥을 천천히 먹는다'거나 '밥상을 함께 차린다'가 있다. 하지만 실제 가정의 현실은 아주 다르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밥상을 차리는 가정이 얼마나 되나. 아이들 입장에선 '밥상머리 교육'이 대화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훈계만 늘어놓거나 부모가 궁금한 것만 질문한다고 여긴다. 자꾸 그러면, 아이들은 밥 먹다가 체한다.
교과부가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어른이 있고, 이 어른이 아이와 밥을 같이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표하면 아이들은 악한 마음을 먹었더라도 "예"라고 하게 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을 단세포적으로 본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정작 부모들은 아이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건너 뛰고서는 '밥상머리 교육'이 의미가 없다.
"너 오늘 학교생활 잘 했냐? 선생님 말씀 잘 들었고? 친구랑은? 성적은?" 이런 질문만 쏟아진다면, 아이 입장에서 '저 사람이 나한테 애정과 관심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잘못했나? 책 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나?'라며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밥상머리 교육'은 엄마-아빠-자녀로 구성된 정상 가족 모델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한부모 가정 등 다른 학생들을 더 외롭게 만든다. 사람들이 외로울 때 주위에서 알아주지 못하면 외로움이 더 증폭된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다.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 대화하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대화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학교에 의한 폭력'은 어쩔 건가?"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이라는 낱말은 이제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됐다. 하지만 '학교 폭력'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학교 폭력이라면,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체벌 역시 학교 폭력일 게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학교 폭력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만 다룬다.
배경내 :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처음 거론됐을 때 '학교 폭력이라는 말 자체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폭력'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인가? 학교에 의한 폭력인가?
물론 현실에서 통용되는 개념은 둘 다 아니었다. 그냥 '학생들끼리 하는 폭력'이 '학교폭력'이었다. 그런데 이 폭력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학교 밖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일련의 사태들을 '학교 폭력'이라고 부르면서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학교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폭력이 감춰지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학교 폭력은 나쁘다'라는 학교 당국의 이야기를 학생들은 조롱하게 된다. 학교 폭력 방지 서약식을 하면서도 학교가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인 웃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학교폭력방지법'에 담긴 학교 폭력 개념이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학생과 학생 간 폭력으로 한정하니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해당되지 않게 된다. 또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고만 했을 때는 학교 밖 폭력이 포함되지 않고, 탈학교 학생이나 성인이 연루된 폭력 역시 전혀 다뤄지지 않게 됐다.
지금은 '학교 내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폭력'으로 '학교 폭력'의 법적인 개념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폭력'은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다. 이 법적 정의로는 그것만을 한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학교 안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은 종류가 다양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도 있고, 교사 상호 간에 벌어지는 것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학교의, 학교에 의한, 학교에서의 폭력'이라는 것으로 개념을 들여와서 지금의 '학교 폭력' 개념을 흔들어야 한다.
"매를 든 교사의 말만 듣는 아이들, 그 이유 때문에 체벌 금지해야"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을 아이들끼리 때리고 따돌리는 것에만 국한하는 것은, 전형적인 보수 언론의 프레임이다. 이런 구도에선 체벌 문제, 지나친 경쟁 문화, 학생 간 서열화, 시험만 잘 치면 면죄부를 주는 풍토 등이 감춰진다.
보수 언론은 이런 프레임을 통해 학교 폭력 문제를 교권 실추 논란과 연결 짓는다. 실제로 일부 언론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했다며 크게 보도한다. 또 학생인권을 강화했더니, 교권이 위축돼서 학교폭력이 더 기승을 부린다라고도 보도한다. 그런데 실제 교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교사들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오랫동안 해 왔던 경험을 듣고 싶다.
배경내 : 교사들의 생각을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다. 체벌을 긍정하는 전통적인 교사관을 신념으로 유지하는 교사들도 있다. 또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또 신념으로서는 체벌이 잘못됐다고 믿고, 그래서 '필요악' 개념으로 체벌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매 순간을 모면하는 방식으로 버티는 교사들도 있다. 그리고 인권과 교육을 결합하며 학생인권의 적극적 옹호자가 돼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사도 있다.
이 가운데 앞의 경우와 마지막 경우는 소수다. 다수는 '나는 안 때린다. 그러나 체벌은 필요하다'처럼 애매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체벌을 교사가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마지막 안정장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에게 체벌할 권한이 있을 때 '학생들이 교사를 얕잡아 보지 않는다'라는 생각, 그래서 체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자. 학생들이 매나 몽둥이 앞에서만 주눅이 든다면, 과연 교육의 여러 문제가 풀릴까. 이런 학생들은 몽둥이를 든 무서운 교사가 아닌 다른 교사들에게 대들게 된다. 몽둥이를 든 교사 앞에서만 학생들이 말을 듣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매를 내려놔야 한다.
반면, 체벌 금지라는 시대의 흐름에는 따르기는 하되 수고로움은 감수하기 싫다는 '방관자' 유형의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다. 보수 언론은 흔히 '학생인권 개념이교실이 들어오면서 교육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교사가 늘어난다'라고 보도한다. 이런 교사들이 바로 '방관자' 유형의 교사들이다. 예전에는 자는 학생이 있으면, "야, 일어나!"라고 하면서 뒤통수 한 대 치고, 아니면 말고 정도였던 교사들이 (학생인권 조례 제정 이후에는) '그래? 그게(안 때리는 게) 대세니까'라며 자는 학생을 아예 안 깨운다. 이런 경우는 답이 없다. 우선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권에 바탕한 교육이 자리잡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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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친화적 교실에서 학교 폭력 문제를 푸는 법"
분명한 것은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방식으로는 폭력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생인권을 고민하는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체벌하면 안 된다"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다. "학생인권이 예전에는 무시되어 왔었는데, 이제 인정되면서 여러분에게 가해지는 어떤 모욕도, 체벌도, 폭력도 안 된다. 그렇게 되게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다.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도와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이 바로 체벌이 금지된 이유다.
교사는 "지금부터 그래서 학생을 체벌해서는 안 되고, 어떤 선생님도 (체벌은) 절대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변화가 생긴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선생님, 제가 어제 OO 했는데 나쁜 것 아니예요? 인권침해 아니예요?"라며 자기들이 경험한 관계를 인권이라는 '거울'에 비춰보게 된다. 아이들이 고자질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저런 것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며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 폭력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
폭력의 방관자가 되지 않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문화는 이런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한 교사에게 들은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한 학생이 의자로 친구를 때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반 학생과 같이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었으면 좋겠니?"라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드러난 사건은 의자를 휘두른 것이지만, 의자를 집어든 학생은 사실 수개월 동안 피해자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가만히 있었지만, 사태에 대한 판단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교사의 질문으로 비로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학생들 다수가 '의자를 던진 친구가 다친 사람을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다친 친구도 의자를 던진 친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자를 휘두른 사건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는 그 이전부터 가해자였던 것. 그래서 다친 친구도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반 친구 모두가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한 압력이 된다. 다친 친구가 처음에는 자심이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결국 의자를 집어든 학생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지켜만 봤던 같은 반 친구들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학생들 사이에, 그리고 학생과 교사 사이에 '폭력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이 된 것은 바로 '학생인권조례'다.
"학생인권 보장, 학교 폭력 해결의 출발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학생 인권만 중요하냐고. 교사 인권, 부모 인권도 중요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권은 원래 가장 약한 사람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법이다. 교사, 학부모 등과의 관계에서 약자는 학생이다. 그리고 약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면, 상대적으로 힘이 센 사람들의 인권 역시 보장된다.
이런 힘이 가능해지려면 폭력에 대해서 알고 있고, 계속 성찰할 수 있는 자석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의 철학이고, 그 철학의 핵심이 학교-학생이든 교사-학생이든 '폭력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서로에게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은 그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학생인권에 대한 보장이 학교 폭력의 완전한 해법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면은 꽤 있다. 아이들 중에는 '튄다'라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꽤 있다. "넌 너무 나대! 넌 너한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입고 다녀?"라는 식이다. 사회가 강요한 획일적인 기준을 아이들이 그대로 내면화 한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과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은 같은 흐름이다. 학생인권에 대한 각성이 학교 폭력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한 이유다.
학교 폭력 문제를 풀기 힘든 이유 중에는 아이들이 사과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학교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벌을 줄 따름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사과의 방식이라고 배운 게 무릎을 꿇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자존감을 꺾는 것들뿐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존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학교가 보다 인권친화적인 공간으로 바뀐다면, 아이들은 보다 다양한 사과의 방식을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 폭력 문제르 푸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문제에서 떼놓으면, 문제 해결능력도 못 키운다"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이 쟁점이 되자 교육당국은 '학교폭력은 나쁘다'라는 메시지만 되풀이한다. 그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궁금증만 깊어진다고 말한다.
배경내 : 학교폭력을 주제로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제작한 <눈(을 감은)사람? 눈(을 뜬)사람!>(연출 홍서연)이라는 토론 연극이 있다.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들과 토론하는 방식이다. 관객들이 극 속 상황으로 직접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지'라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상황이 꼭 그렇게 전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예상치 못한 다른 방향과 계속 만나게 되고, 다른 상황이 펼쳐지면서 생각 못했던 지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사실 이렇게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 초대되는 경험이 중요하다. 인권교육을 하며 만난 교사 한 분이 "금지하는 규칙이 나쁜 이유는 학생들을 문제로부터 떨어트려 놓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있어야 문제 해결 능력이 생긴다"라고 했다.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지금까지 문제를 정의하는 것도 학교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학교가 일방적으로 가르쳤다. 학생은 어쨌든 규칙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생들을 문제에서 떨어트려 놓는 방식인 것이다. 학생이 직접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해 보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
기사입력 2012-05-27 오전 10:23:17
그런데 왜, 학교폭력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사법부의 대책을 보며 종훈이처럼 외치고 싶어질까.
"정말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하시네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 <주먹을 꼭 써야 할까?>(이남석 지음, 사계절출판사 펴냄) ⓒ사계절 |
지난 14일 이남석 작가와의 인터뷰는 2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듯 했다. 왕따 '남순'이 일진이 되고, 군 수색대 경험을 거쳐 심리학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극복한 10대 '남순'이 40대 '남석'이 된 지금, 그는 폭력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우선, 그는 학교폭력 문제 대책에 '일인칭이 없다'고 지적했다. "왜 아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대책은 단지 '이만큼 노력했어'라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요즘 아이들은 안나푸루나 빙벽, 영하 40도에 맨몸으로 매달려 있"는데, 대책과 해결 방안은 여전히 구식이라는 지적이다. 학교 일진은 과거 동네 노는 형, 주먹 좀 쓰는 형이 아닌 조직화된 세력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러다가 나 자살하는 것 아냐? 이러다가 나 일진한테 당하는 것 아냐?'라는 공포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더 왕따 시킨다". "내가 좀 덜 다치려면, 내가 좀 덜 피해 보려"면 친구조차도 일회용품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폭력적인 행동을) 버렸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강요에 의한 선도가 아닌 '넛지(Nudge, 특정 방향으로 살살 밀다)' 방식으로 시간을 두고 기다리며,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믿으라고 충고했다.
이남석 씨는 <원샷원킬>,<주먹을 꼭 써야 할까?>,<논리를 찾아라!>와 같은 청소년 심리학책뿐 아니라, 자신의 전공 분야인 인지과학과 관련해 <무삭제 심리학>,<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 등을 쓴 하이브리드형 작가이다. 심리학 전공자로 WCU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IS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진행한 이남석 작가와의 인터뷰 전문. <편집자>
"학교폭력, '일인칭'은 없고 '삼인칭'만 많다"
프레시안 : <주먹을 꼭 써야 할까?> 작가 소개에 '폭력의 피해자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방관자와 가해자로 고등학생 시기를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상담을 하던 중, 날로 심해지는 청소년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가해자만을 선도해서는 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있어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를 보면, 대부분은 제3자가 보고 듣는 입장이다. 정말 학생들-가해자와 피해자의 목소리는 안 나오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왜 아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게 내 생각이다. 어른들이 대책을 세운다면서 처벌하고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는 피해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는 약한 이미지가 생긴다. '누군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을 때 그 아이는 나쁜 짓을 했으니까 혼나야 하지만, 그동안 나는(피해자는) 무엇을 해야하냐'를 물어보지 않는다. '그래, 너 고생했어'라며 안아준다.
아이들에게는 '우리'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해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책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너희들 가해자잖아, 너희들 피해자잖아, 너희들 방관자잖아'라며 나누기만 한다.
아이들이 '우리'로 묶이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떤 '큐(Q, 사인)'를 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을 분절시키는 큐로, 굉장히 안 좋은 것이다. '아이들이 폭력적이니까 우리 체육 한번 해볼까' 라면서 체육 시간을 두 배로 늘리는 게 대책이라고 한다. 만약 체육을 못하거나 싫어하는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심리적으로 안 좋은 에너지를 풀라는 취지일 텐데, 실제 나온 대책에선 취지가 사라졌다. 예컨대 스트레스를 미술이나 음악으로 푸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 대책은 스트레스 푸는 방식도 그저 한 가지다. 어떤 경우건 획일적인 방식은 안 좋다.
미국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쓴 <넛지(Nudge)>라는 책이 한때 화제가 됐다. 이 책에 나오듯 '팔꿈치로 툭툭 찔러도 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걸 정부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순간,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획일적인 대책 강요보다는 '팔꿈치로 툭툭 찌르는' 게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을 주제로 토론을 시키면, 다들 말을 잘 한다. '서열화된 사회가 문제'라며 전문가들이 할 말까지 다 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는 빠져 있다. 이처럼 구조적인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알리바이만 견고해진다. '봐, 시간 많이 걸려. 학교 폭력은 당장 해결 못 해'라는 알리바이다.
"다들 알리바이만 만든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너무 구조적인 문제로만 보면, 결국은 나, 또는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 같다.
이남석 : 걸핏하면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학교 폭력은 자기는 관계가 없는, 문제아 같은 몇 명의 가해자와 찌질한 피해자의 일인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학교폭력 문제로 외부 강연을 할 때 "폭력적인 나를 행복하게 하는 법"이란 주제로 한다. '내가 왜 폭력적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 안의 폭력을 보면, 남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화나면 때릴 수도 있지'가 아니라, '화나서 때리면 후회한다'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화나면 때릴 수도 있지'까지만 생각하고, 다음이 없다. 자기 스스로도 후회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른바 전문가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난 알아'라고 하는 순간, 인지적 오류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전문가일수록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계속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사실 제대로 안 해 보고 '잘 안 될 거야, 뻔해' 라고만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왕따 '남순이', 때리는 맛에 눈 뜨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 피해자라고 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남석 : 7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1971년 음력 10월생, 양력으로 12월생이어서 70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몸집이 작았다. 당시에는 생일 별로 출석 번호가 배정됐는데 나는 36번이었고, 뒤를 이어 여학생들은 37번부터 시작됐다. 유일하게 여자 짝꿍이었고, 별명도 '남순이'였다.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여자와 같이 앉는다는 사실만으로 그냥 '왕따'였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쭉 왕따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고구려-백제-신라를 몰랐다. 공부를 못했다. 선생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무척 어렸기 때문에 나머지 공부를 하다 4학년 때는 지체장애인이 있는특수반 옆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저능아라며 포기한 경우였다. 그래서 학급문고만 열심히 읽었다. 기본 교과 과정도 모르고, 신체적·지적으로 미달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하위로 쳐졌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때쯤 몽정을 했다(2차 성징을 겪었다). 그런데 나는 한 살 일찍 학교에 갔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사춘기를 겪고, 폭풍 성장을 했다. 160cm 초반이었던 키가 1년 만에 174cm가 됐다. 전에는 맞기만 했는데, 키가 큰 후로는 때리는 아이의 주먹을 막게 됐다.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방어한다고 한 행동이 때리는 게 됐다. 신체가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해진 것이다.
과거에 피해자였기 때문에 지금은 남을 때리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폭력을) 당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성격이 나쁜 거였지만 난 당했으니까, 복수다'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종훈이처럼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기분이 나빠서 싸웠지, 원한이 있어 싸우지는 않았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서는 힘보다는 '얼마나 독기를 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데, '복수'라는 생각으로 독기를 품으니 해결됐다. 주먹 서열도 팍팍 올라가고, 으스대게 됐다.
그러다 보니, 롤라장(롤러 스케이트장)도 다니게 됐다. 롤라장에 다니면서는 내가 원하던 것보다 더 놀게 됐다. 당시에는 '일진'이라고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몇 명이 얻어맞고 오면 다시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혼내주고 오는 식의 동네 차원이었다. 지금 같은 일진 네트워크는 없었다. 충남 예산에서 살았는데 온양에 가서 혼내주고 오는 정도였다. 그때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보다 더 폭풍 성장한 아이들이 생겼다. 174cm의 키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라서 여기저기서 다 모였다. 나보다 힘이 센 아이들 틈에서 그냥 조신하게 지냈다. 나는 그냥 '깐죽이'가 됐다. 또 공부를 잘하면 그냥 놔두는 편이었다. 혼자 머리 기르고 야간 자율학습 빠진 채 나이트에 가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 중학교 때 어울리던 아이들 중 고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나이트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만 가면 될 것 아냐'라는 생각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사회적 불만을 데모로 풀었다. 가장 안 좋은 행태였다. 결국 수색대에 지원해 군대에 갔다. 해병대보다 더 멋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는데 400명 중 200명, 절반 정도는 일진이었다.
군 생활 중 하루에 두번 전원투입 시간이 있었다. 이때 보급받는 수류탄과 총알 300발이면, 언제든지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동료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는 상상말이다. 수색대 12명과 국방부에서 파견된 4명인 16명이 벙커 생활을 했는데, 어차피 모두 실탄을 갖고 있는 상황에선 힘의 논리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논리로 언제든 서로를 죽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벙커 안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벙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진실되느냐'의 게임이 됐다. 그때 경험이 책에 많이 반영됐다.
휴가를 나오면 으레 싸움이 붙었다. 웬만한 사람들과는 싸움이 안 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서웠다. 남자다운 게 아니라, 범죄자에 더 가까워진다고 느끼게 됐다. 매일 사람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면서도 군대 내에서는 동료끼리 굉장히 잘해줬다. 내 안에서 불협화음, 부조화가 일어났다. 군 생활 마지막에 벙커 생활하면서 책을 읽게 됐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고민했던) 답들이 모두 책에 있었다. 이후에는 과거 강한 척했던 내 모습이 오히려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제대하고 복학했더니, 교수님 아들 중에 '일진'이 있다며 (아이 상담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인데, 처음 만나자마자 사흘 동안 치고받고 싸우기만 했다. 그렇게 싸우기만 하다가 아이를 안 만났더니, 오히려 아이가 겁을 먹었다. 그때 알았다. '이 아이도 정말 외로웠구나.'
자기가 강하게 보이면 (주변에서) 다 받아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나면 또 외로워진다. 이 아이 이후에 만난 다른 일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다 행복하지 않구나.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경기도 분당에서 서울송파구 가락동으로 원정을 와서 주먹으로 (그 지역을) 평정한 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아이조차도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아이가) 당당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폭력으로는 아무도 행복한 아이가 없었다.
가출청소년 '쉼터'에서 만난 아이들도 나름대로 일진이었는데, 다들 같은 고민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들과 내 경험이 똑같았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사회적 불만에) 어떻게 개인적으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러니까 (때려도 된다)'라고 반응하면 폭력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리면 안 된다)'라고 반응한 아이들은 비폭력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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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아이를 '갖고 노는 존재'로만 여기는 아이들"
프레시안 : '그러니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구분이 인상적이다
이남석 :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그러니까'라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때리고, 그러니까 맞았다는 게다. 피해자는 '처음에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이상해졌어요. 나는 자살할 용기는 있지만, (그 친구에게) 반항할 용기는 없다'고 한다. 지금 자살한 아이들의문자 메시지를 보면 다들 이런 마음이다.
어른들은 모범생이 일탈하면 스트레스 해소라고 본다. 공부에 대한 대가로 뭐든지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인 아이들 대부분은 공부를 잘 못한다. 이 아이들이 '일탈'을 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존재 가치가 다 없어진 뒤다. '넌 공부 아니어도, 듬직하니까 나중에 뭐라도 될 수 있어'가 아니라, '너 나중에 뭐 되려고 그러니?'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와, 선생과, 부모만 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일탈'마저 (손에서) 놨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상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생각밖에 없고 '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없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게 된다. 영화 같은 데서 본 '괴로우면 자살이잖아'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내가 왕따 안 당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대리물로 삼는 일회용이다. 학교 안에서 반 친구면 뭐하나, 학교 성적에 따라 다 나뉘는데…. 그래서 일탈 행위를 함께 할 친구도 없다. 내가 일탈할 때 힘이 좀 세면, 옆에 있는 아이를 갖고 노는 존재로 데리고 오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내가 좀 덜 다치려면, 내가 좀 덜 피해 보려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자기 이권(利權)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 '신상털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굉장히 집요하다. 예전에는 툭툭 치면서 '야, 꺼져'라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일주일을 데리고 다니면서 때린다. (과거와) 다르다. 그런데 제시된 해법은 여전히 같다. 어른들은 '우리 때는 더 심했어'라고 말하지만 다 필요 없는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은 안나푸루나 빙벽, 영하 40도에 맨몸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과 '타이타닉 현실주의'
프레시안 :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처한 '객관적 현실'을 주로 얘기한다. '옛날에도 주먹 쓰는 애들은 있었잖아'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현실'만 들여다봐서는 요즘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이해하기 힘든 듯 하다. 아이들이 처한 '심리적 현실'을 봐야 할 텐데….
이남석 : 맞는 고통보다도 맞기 직전이 더 무섭듯이 지금 아이들에게는 가상의 공포가 더 무섭다. 주사 맞기 전 주사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한 것처럼 아이들은 '이러다가 나 자살하는 것 아냐? 이러다가 나 일진한테 당하는 것 아냐?'라는 공포에 오히려 다른 아이를 더 왕따 시킨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특히 학기 초, 조금만 특별한 게 있어도 무조건 왕따 취급한다. 그래야 나에게 화살이 안 오니까.
그런데 정부나 사회는 '근본 대책'이라며 아이들에게 안 긁어내도 될 것을 긁어낸다. 지나치게 구조적인 접근은 부작용을 낳는다. 잠재의식 속에 '그러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불우한 아이들일수록, 외로운 아이들일수록'이란 의식 속에 '그러니까, 나도 때려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자리잡는다. 왜? 화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때리니까'가 작용하는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사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 다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폭력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환경문제와 같다. '우리 자연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잖아'라는 것. '우리 아직 빙하에 부딪히지 않았잖아'라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와 같은 입장이다. 폭력이 곪을대로 곪아서 터진 뒤엔 이미 늦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서 현대 문명 시스템 속의 인류를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 비유했다. 사람들은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들어 진부하다는 생각에, 이미 배가 빙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엔진을 멈추고 배를 세우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주로 위기에 처한 환경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쓰인다. <편집자>)
정부는 폭력 문제 대책을 논의하자면서 폭력만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건 가장 급이 낮은 교육이다. 가장 안 좋은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주먹을 쓰는 대신 그림을 그렸더니 좋아졌어요' 같은 이야기를 얼마나 했느냐고 묻고 싶다.
과정과 결과 모두 행복이라는 것이 강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넛지(nudge, 팔꿈치로 살짝 찌르다)'다. 사람은 설계한 대로 살 수 없다. 반기문 총장이 중학생 시절 영어 공부할 때 유엔 사무총장을 바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게 가다 보니, 지금 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자리에 오른 사람을 보면, 운이 좋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유는 설계한 대로 안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폭력 대책은 아이들이 미리 설계된 대로 살라고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자식 인생설계 좀 하지 마시길…"
프레시안 : 다양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들었다. 또 교사들도 많이 만났다고 했다. 폭력 문화에 젖은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충고할 게 있다면….
이남석 : 어른들은 자꾸만 설계하려 한다. 목표를 겨냥해서 백발백중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목표는 너무 멀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폭력적인 행동을) 버렸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제시한 위닝 포인트(winning point, 만족감을 느끼는 지점)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너 지금은 참아. 공부 잘해서 대학 가면 예쁜 여자 친구 만날 수 있어'라는 식이다. 이래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내가 뭔가를 참았다면,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심리학 이론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대학에 간 뒤에야 보상이 있다? 아이들 입장에선 폭력 행위를 참을 만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어른들은 아이들의 심리적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 현실에만 관심을 둔다. 하지만 객관적 현실은 평온해보여도, 심리적 현실은 자살 일보직전인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하는 충고가 기껏 '나도 옛날에 그랬어' 수준이다. 이런 충고가 아이들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예술작품을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식이 담긴 책은 한계가 있다. 내용을 이해하려면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너무 멀다. 모든 예술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길 기대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어차피 살아갈 날이 많고, 예술에서 감동을 느낄 기회 역시 많지 않은가.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가 매번 맛있어서 먹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맛에서 감동을 느끼는 한두 번은 있기 마련이다. 그거면 됐다. 아이들이 예술에서 감동은 한두 번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꼭 필요하다.
"세기의 천재가 노년에 내린 결론 '그냥 방황해'…자유의지를 믿어달라"
프레시안 : 어른들이 제시한 위닝포인트가 너무 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남석 : 어른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어른들에게 시간은 종적 개념이다. 인생이 한줄로 그어져 있다. '아이들이 이 지점에 오면 이걸 느낄 텐데' 하는 식이다. 반면, 살아온 날이 적고 살아갈 날은 많은 아이들에게 시간은 횡적 개념이다. 다양한 가능성이 수평적으로 열려 있다.
시간을 종적 개념으로 보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자꾸만 설계해 주려 한다. 이런 어른들에게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권하고 싶다. '그냥 방황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설계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설계한 게 꼭 좋은 것도 아니잖아. 그냥 방황해'라고 말하는 책이다. 세기의 천재라는 사람이 노년에 자기 삶을 돌아본 결론이다.
인생설계는 부질없는 짓인데, 많은 어른들이 그걸 모른다. '성공하려면 몇살에는 무얼 해야 하고, 또 몇살에는 무얼 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는 '아이들은 뭐가 중요한지 몰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어른들이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오히려 폭력이다. 청소년기는 자아 주체성을 유연하게 가져야 할 때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라'라고 권유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한번은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잘 봐준다고 하면서 교묘하게 설계하려 드는 것이다. 인생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 그것이 할리우드 영화처럼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사입력 2012-05-14 오전 11:01:36
지난 7일 오후 김선옥 교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꿈틀학교를 찾았다. 상추와 깻잎이 심어진 꿈틀학교 앞마당에는 웃자란 아이들과 선생님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교사의 "갈 거야, 안 갈 거야?"라는 추궁에 아이는 "봐서요"라며 시큰둥하게 답했고, 곧바로 교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 꿈틀학교 앞마당에는 상추와 깻잎, 고추, 토마토 등 다양한 채소가 심어져 있다. 아이들은 산책이나 채소 심기 등의 벌을 받는다. 김선옥 선생님은 '이런 벌칙이 지나치게 분출된 아이들의 에너지를 식혀준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아이들만의 놀이 문화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아이들이 "노래방 가고, 술 마시고, 싸움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전한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보다 난폭했다. 학교폭력의 주범이라는 '일진'은 이미 '조직화'되어 있었고, '좆, 씨팔' 같은 용어는 아이들의 일상어가 됐다. '관심 좀 가져주세요'라며 자살을 시도하고, 강한 자극만을 쫓으며 또래와의 성관계도 놀이로 인식한다.
경찰은 학내 '일진'을 격리해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김 교사는 "어이없다. 교도소를 만들겠다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다양한 수업을 통해 힘의 분산, 즉 아이들 사이에 서열을 갖기 어렵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힘이 분산되면 서열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꿈이나 비전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에게 "5년 후, 10년 후 자기 모습을 상상하거나 그릴 수 있게" 아이의 장점을 계속 일깨워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꿈틀거리다, 꿈을 짜는 베틀, 꿈의 틀, 꿈을 틔우다'라는 의미인 '꿈틀학교'는 미인가, 비기숙형 대안학교다. 2002년 5월, 학교를 떠난 아이들을 위해 시민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김선옥 선생님은 2000년 꿈틀학교를 준비 단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앞서 그는 1995년 가출 청소녀 단기 쉼터인 '행복한 우리집'과 서울시립 신림청소년 쉼터 '우리세상'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 1980~90년대 철거촌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계기였다. 집에서 돌보지 못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부방, 탁아소 활동을 했다. 당시 상담을 통해 집으로 돌려보낸 아이들이 다시 가출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결국, 보다 안정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꿈틀학교다.
그는 "학교와 사회에서 일탈한 아이들을 위한 자립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꿈틀학교를 만들게 됐다"며 "탈학교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폭력학교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꿈틀학교는 진로 특성화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라는 점을 강조했다.
다음은 꿈틀학교 김선옥 교사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꿈틀학교 김선옥 선생님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최근 대구 지역에서만 7건의 청소년 자살 사건이 있었다. 학교폭력, 왕따, 청소년 자살 등을 다룬 뉴스가 쏟아진다.
김선옥 : 슬프다. 애들이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죽는다는 것은 삶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삶의 끈을 '탁' 놔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용기로 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런 에너지가 없어서 마지막에 죽음밖에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심정은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는가.
꿈틀학교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온다. 외국에 나갔다 적응하기 힘들어 오거나, 대안학교 출신 아이들이 대안 교육 과정으로 오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일반학교 적응이 힘들어서 온다.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고, 학교가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른바 비행 청소년들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의미가 없다. 학교에서도 이 아이들을 너무 싫어한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여러 학교를 전전한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면, 환경 자체가 확 달라지기 때문에 숨 막혀 한다. 도저히 학교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들을 많이 만났겠다. 꿈틀학교에서는 폭력 사건이 발생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나.
김선옥 : 꿈틀학교에서는 폭력을 절대적으로 금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폭력이) 습관화된 아이들이 많다. 조사를 뺀 대부분이 욕이다. '좆, 씨팔'은 욕도 아닌 일상적인 언어이다. 주먹을 사용했던 아이도 많이 있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아이들이 오기 때문에 부딪히다 보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고, 대부분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꿈틀학교에) 들어올 때부터 폭력을 원천봉쇄한다. 어떤 형태, 어떤 강도냐에 상관없이 폭력은 원천적으로 금한다. 이건 원칙이다. 한번 폭력을 휘둘렀을 때는 벌을 주고, 두 번째는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한 대 맞는 게 차라리 쉽다'라는 아이들…"
프레시안 : 어떤 벌을 받나
김선옥 : 벌은 보통 아이들이 선택하는데, 걷거나 흙을 만지게 한다. 아니면, 폭력 문제에 대한 포스터를 그리거나, 자기 생각을 발표하게 한다. (폭력이) 왜 나쁜 것인지를 인지하고, 내면을 정화하는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이것(폭력을 금지하는 원칙)을 어겼네. 어떻게 할래? 어떻게 책임질래?" 하고 물으면, 폭력을 계속해왔던 아이들은 딱 한마디로 말한다.
"아, 맞을 게요."
아이들은 차라리 맞고 끝내는 게 쉬웠던 것이다. 그냥 한방 때우고 마는…. 그래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다시 이야기한다. 잘못한 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맞는 것은 책임지는 방법이 아니다. 왜 잘못 했는지를 생각해보고 다시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인간관계에서 말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긍정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꿈틀학교에 오기 전에는 반성문을 쓰거나 몇 대 맞고 해결을 봤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법인지'를 알게 하려고 체벌하는 것인데, 이런 체벌은 왜곡된 관계와 습관을 고착화시킨다.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방법은 절대 쓰지 않아. 그런 것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무엇이 잘못됐고,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정확하게 얘기해라."
폭력은 에너지가 과도하게 분출된 경우이기 때문에 혼자 앉혀 놓는 것보다는 걸으면서 '내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건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이것은 돼, 이것은 안 돼'를 스스로 정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어도 두 번 이상 폭력을 써서 퇴학당한 아이들도 있다. 꿈틀학교 11년 동안 4명 정도 있었다.
"선생님은 너무 질겨요"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렸는데, 친구에게 그 아이를 손봐주라고 했다. '이런 경우가 폭력일까, 아닐까'를 놓고 아이들과 공개 토론을 했다. 그런데 "걔가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좋다, 그러면 맞을 짓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자. 우리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니까 맞을 짓을 정리하자"고 했다.
"누가 눈을 흘긴 것, 누가 '너는 모자라 보여'라고 말한 것 등 1부터 100까지 '맞을 짓'에 대해 정하면, 그 행동을 했을 때 누가 때린 것에 대해 학교에서는 폭력으로 거론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토론해서 정해라. 그러면 선생님들은 받아들이겠다. 같이 토론하자."
이렇게 세 시간 정도를 토론했다. 그랬더니 "선생님 맞을 짓이라는 게 어디에 있어요?"라고 하길래,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함께 사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결론이 나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사람들 생각 속에서 (자기 생각을) 객관화시키는 경험이 없었을 뿐이다.
결국, 아이들이 '(맞을 짓이라는 것은) 없다. 이 경우도(친구를 부추겨 폭력을 행사한 것도) 폭력이다. 벌 받아야 한다. 앞으로는 이것도 폭력으로 간주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긴 토론으로 아이들 진이 다 빠졌다. "선생님들은 너무 질겨요"라고 하더라.
함께 문화를 만들고, 개념을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를 때리고도 때린 게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짜증 나요, 짱 나요!"
인간관계 즉,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그 방법(맞는 것) 말고는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없다. 다른 게 표현하면, 자기표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있지만, 심리적·정서적·지적으로도 굉장히 변화 무쌍한 때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굉장히 아름답고 섬세한 감정을 배우고 익혀 발달시켜야 하는데, 공교육에서는 그런 시간이 없다. 무조건 국·영·수만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자기감정을 이해하거나 자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너 어때?"라고 물으면, 화나건 슬프건 충동이 생기건 아프건 한 마디로 얘기한다.
"짜증 나요, 짱 나요!"
사실 그 감정도 다 다른 것이다. 각각의 감정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야 자기표현도, 사람들과의 소통도 다양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모른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겠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대안 없이 "짱 나요!"로만 일색 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물어본다.
"너는 지금 화난 거니? 속이 상한 거니? 약이 오른 거니? 아니면, 너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거니? 여기에 따라서 네가 표현할 수 있는 게 달라질 수 있어. 슬프면 위로받아야 하고, 화나면 화난 것을 풀어야 하고, 속이 상하면 달래줘야 하고. 그런데 그걸 모르고 네가 무조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다른 사람과 싸워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 너를 자꾸 후지게(형편없게) 만들 뿐이야."
이런 이야기들을 자꾸 해준다. 그래서 꿈틀학교 선생님들이 잔소리가 좀 심하다. 폭력적으로 놀았던 아이들일수록 딱 잘라서 얘기하거나 무섭게 얘기하면 단번에 제재는 된다. 그러나 센 방법은 그다음에 계속 센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아이는 왜곡된 관계를 회복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짜증을 내고 힘들어한다. "그냥, 벌주세요. 한 대 맞고 말래요"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긴 씨름이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이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건지, 자기는 어떤지'에 대해 아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먹을 쓰던 아이들이기 때문에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곤조곤 끊임없이 얘기했다. 이게 힘인 것 같다. 계속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그 아이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것. 어떤 아이들은 2~3개월이면 되지만, 또 어떤 아이는 1년, 2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아니면 졸업하고 나서 '아, 그때 선생님이 그런 게 뭔지 알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통 방법과 인간관계를 새롭게 개선하지 않으면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작은 학교가 답이다
프레시안 : 어찌보면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학급당 학생수가 많은 현실에선 적용하기 힘든 방법 같다.
김선옥 : 그래서 학교 자체가 소규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아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이들이 (서로를) 알고 "아, 쟤는 옆집의 누구 친구야, 누구 동생이야, 옆집 살아, 우리 아파트 살아"처럼 '아는 관계'가 있으면 함부로 하지 않는다. 이웃 간의 관계도 (연계돼)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로를) 아는 관계'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냥 알기만 하는 관계면 (폭력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이 학생 수 120명이던 곳에서 400명인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120명일 때에는 '노는 아이들'이 있어도 다른 아이를 왕따 시키거나 괴롭히는 수준이 굉장히 미약하다고 한다. "쟤 우리 옆집,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3학년 누구 동생 누구야"라는 말로, 관계가 형성되면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관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400명이다 보니, 거의 모른다. 노는 애들의 왕따나 괴롭힘의 수준이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것처럼 심각해진다.
좋은 관계를 갖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성장기에 자기감정이나 상태를 잘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방법, 좋은 방법을 선택해서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던 아이라도 꿈틀학교에 오면,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겠나. 관계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굉장히 세심하게 볼 뿐 아니라, 담임을 맡지 않은 선생님들도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선생님이 관심을 두고 아이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이상 (폭력적으로) 나가지 않는다.
ⓒ프레시안(최형락) |
폭력과 자살 문제는 가정과도 맞물려 있다. 부모들도 소외되고 외롭지만, 아이들도 굉장히 외롭다. 아이들과 '공부' 외에 다른 콘텐츠로 대화하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대화가 기본적으로 공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이들은 대화를 할 수 없어 외롭다.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이들 대부분은 그런 외로움을 컴퓨터를 하면서 해결한다. 자기를 완전히 대상화시키고, 소외시켜 관계를 단절한다. 감정이 흐르는 소통 자체를 차단하는 형태로 철저하게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아니면, 또래집단 간의 그룹을 만들어서 비행이나 폭력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
학교폭력의 원인이 만화나 웹툰?
프레시안 : 학교폭력과 관련해 흔히 나오는 얘기가 폭력적인 웹툰이나 게임 때문이라는 게다. 실제로 이런 보도도 많이 나온다.
김선옥 : 웹툰과 게임이 폭력성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된 건 어느 정도 사실일 게다. 게임을 통해 계속 총을 쏘며 (상대방을) 죽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게임 상황을 현실로) 갖고 오고 싶어 한다. 폭력적인 아이들일수록 인터넷 중독이 많이 일어나는데, 게임 속에선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관계는 그렇지 않다. 서로 맞춰야 하고, 배려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러나 게임이나 웹툰이 아이들을 폭력으로 내모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폭력성을 증폭하는 한 요인 정도일 뿐이다.
우리학교에도 PC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에게 "너, 왜 이렇게 PC를 많이 하니"라고 다그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서로 불편하기만 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것 자체를 봐주고, 관찰한다. 그러다 가끔 "컴퓨터를 한 서너 시간 했네? 많이 했네. 총 쏘는 게임 했네"라며 인지를 시켜준다.
동시에 아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확장시켜준다. "기계를 좋아하네, 컴퓨터를 이용해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네"라며 컴퓨터로 하는 일 중 (아이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확장시켜 준다.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고 할 때 (컴퓨터에) 90을 쓰고 일상생활에 10을 쓰던 것을, 다른 영역을 넓혀서 (컴퓨터에) 50만 쓰면 (이용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의 확장이 훨씬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체물, 대안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거 재미있는데 안 해볼래? 이거 좋은데 안 해볼래?"라면서 다른 활동을 시킨다. 그렇게 노선을 바꾸는 거다. 컴퓨터만 했던 경로에서 약간 이탈을 시키는 방법이다.
용 문신 '일진'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화'가 문제
프레시안 : 요즘 최대 화두가 '일진'이다. 언론을 보면 '일진이 얼마나 흉포한가'를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선옥 : 어려운 문제다. 요즘에는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 가면 갈수록 아이들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안쓰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되는 건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진짜 유전자에 문제가 있나'라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진짜 심각한 것 같다. 어떤 때는 너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온몸에 용 문신을 한 아이를 봐도, 전에는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심각해졌다. 과거에 '일진'들은 학교에서 슬리퍼 신고, 신발 꺾어 신고, 껌 좀 씹고, 조금 심하다고 해도 칼 좀 씹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직폭력배와 고등학교, 그 윗선에 윗선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더 심각해지고, 무서워졌다. 그래서 너무 답답하다.
고등학교 1·2학년이 되면 선배와 졸업생을 통해 윗선 '누구누구'와 연결이 된다. 제일 큰 형들 나이가 스물일곱·스물여덟 정도 된다. 그들만의 아지트가 있는데, 아지트에 갔다 온 아이들은 그 조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진다. 한 아이가 사진을 보여줬는데, "여기는 바(bar), 술 먹는 곳. 여기는 룸(room), 쉬는 곳, 여기는 성관계 갖는 곳"이라고 하더라. 술도 사주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한번 갔다 온 아이들은 조직에서 발을 빼기가 어려워진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패싸움하고, 오토바이를 타겠지. 그다음에는 알바(아르바이트) 한다고 그러겠지. 그리고는 형들 모임에도 나가고, 형들이 시키는 것을 하게 될 거야. 형들 업소에 나가 단란주점 삐끼(호객꾼)부터 시작해서 술자리 세팅하고(준비하고) 아가씨들 관리도 하겠지. 그렇게 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니? 몇 년 안 걸려. 2~3년일 거야. 그렇게 되면 어느 수준부터는 네가 마음을 바꾸고 싶어도 바꾸기 힘들 거야. 이런 생각해 본 적 있니?"
선생님들은 할 수 있는 것은 정보를 주는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이에게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니?"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졸업생 중에도 업소(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아이가 있는데,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 아이도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꿈틀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공교육에서도 '학교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문화적인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최근 '혁신학교'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예·체 교육을 한다고 한다. 뮤지컬 등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자극(폭력과 음주 등의 자극)이 아닌, 재미있는 긍정적인 자극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폭력적인 것 외에) 대안이 없다. 재미있는 게 없다. 아이들이 모여서 놀 거리가 없다. 노래방 가고, 술 마시고, 싸움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 말고는 놀아본 거리가 없다. 성관계 같은 것은 굉장히 강한 자극인데, 이 단계까지 가면 짜릿한 쾌감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놀이가 없다.
그래서 꿈틀학교는 문화예술 공연을 많이 한다. 전문가 선생님이 가르치는데, 어설프게 해서는 아이들의 쾌감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런 쾌감도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 전문가에게 맡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인생의 목표를 다시 설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학교의 문화나 환경, 교육적인 접근 방법이 바뀌어야 해결된다. 대안학교에서는 폭력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런 아이들(폭력적인 아이들)이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프레시안(최형락) |
"교도소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프레시안 : 정부에서 '일진'을 조사해서 격리하거나,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며 단속하게끔 한다고 한다.
김선옥 :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은 "쟤는 (분위기가) 위협적"이라며 무서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꿈틀학교는 문화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또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이 폭력적인 아이들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일반학교에서는 그런 힘이 없다. 선생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아이들은 더더군다나 힘이 없다. 그래서 학교 문화가 중요하다.
학교 문화가 먼저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폭력적인 아이들을 따로 모아 대안학교를 만들겠다는 발상이 제일 어이없다. 교도소를 만들겠다는 건가, 아니라면 뭘까?
프레시안 : 삼청교육대?
김선옥 : 그러게나 말이다. 순간적인 변화는 있을 수 있다. 100명이 들어가면 서너 명은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기존의 왜곡된 관계를 단절해서 다른 대안적 방법으로 아이가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똑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바닥까지 함몰시켜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잘 못 됐다.
우리의 전통적인 지혜를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시집살이 많이 한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가 (나중에) 똑같이 (시집살이를) 시킨다. 폭력은 대물림된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또 폭력을 행사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폭력으로 해결하던 아이들을 똑같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빠른 시간 안에 시끄러운 것을 순간, 한두 달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해결책은 아니다.
프레시안 : '일진'이었던 아이들이 꿈틀학교에 와서는 폭력을 쓰지 않게 됐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꿈틀학교만의 힘이면서 다른 문화, 다른 관계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된다. ·
김선옥 : 폭력적인 방법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계속 주의를 받는다. 반면, 다른 것(다양한 문예 활동)을 할 수 있어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다른 칭찬과 피드백이 오기 때문에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기회나 용기가 생긴다.
"서열을 분산시켜야 한다"
프레시안 : 기존 학교에서도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김선옥 : 학교가 너무 '공부, 공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교와 선생님들도 있을 테지만. 아이들이 '(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인간 취급한다'고 표현한다. 학교 문화 자체가 경쟁과 서열화 문화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인간 취급을 못 받는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 국·영·수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들은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다른 것으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줘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를 잘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나 매체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것 외에는 (자기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몇몇 아이들은 그것은(공부를 잘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래도 나 튀고 싶어. 학교에서 나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어"라며 주먹을 쓰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할 수 있는 영역을 늘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교육에서는 대안학교의 교육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데, 문을 조금 열어놨으면 좋겠다. 일선학교에서 (폭력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대안학교와의) 자매결연 등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기를 좀 더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교육 내용 자체를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다양성 있는 교육으로 획기적으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꿈틀학교는 소규모(학생 27명, 상주 교사 5명, 외부 전문 강사 25명 정도)라는 게 장점이다. 일반학교도 다양성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폭력 써클 아이들이 끼리끼리 담배 피우는 것 말고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생기면 (학교폭력은) 확실히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
또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다양한 수업을 통해 힘의 분산 즉, 아이들 사이에 서열을 갖기 어렵게 해야 한다. 개개인별로 잘하는 부분이 생기면, (힘이) 분산되면 서열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사랑의 매'는 억지다"
프레시안 : '서열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일반학교에서는 서열을 매기는 방법이 몇 가지 안 된다. 공부, 싸움, 집안의 재력, 외모 등 네다섯 가지 정도인데, 만약 다양해진다면 아이들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많아지고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김선옥 : 그렇다. 꿈틀학교에서 주먹을 써봤자 돌아오는 건 없다. 그걸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문화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열어준다. 아이들을 줄 세우지 않으니까 자연스레 폭력도 사라진다.
프레시안 :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 현병호 발행인의 글 중 '싸움과 괴롭힘은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싸움은 생기기 마련이라고 본다. 하지만 괴롭힘은 다르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고, 이건 명백히 나쁜 것이다. 어른들이 학교폭력 문제에 무덤덤한 이유가 싸움과 괴롭힘을 구별 못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은 늘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는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싸움과 괴롭힘, 각각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김선옥 : 싸움이라는 건 힘이 대등하거나 약간의 차이가 있을 때 서로 오가는 가운데 싸움이 발생한다. 그러나 괴롭힘은 굉장히 일방적이거나 힘의 우위가 분명할 때 생기는 것이다.
싸움에 대해서서는 선생님들이 참견하기보다 그냥 물어본다. 이 방법밖에는 없다.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다. 아이들끼리 투닥거려서 선생님에게 오거나 관찰되더라도, 아이들끼리 스스로 해결하면서 지혜를 갖는 것이 성장에서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괴롭힘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여자아이들의 경우 한 아이가 마음에 안 들면, 홈페이지에 그 아이를 게시하고 서너 명이 일종의 '뒷담화'를 한다. 역시 폭력이다.
폭력이 왜 나쁜지 공감하게 해줘야 한다. 상대방이라면 어떤 마음일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개념을 정리해준다. "좋은 방법일까, 아닐까. 어떤 영향을 줄까"를 이야기하고 이해하게 한다.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폭력이 왜 나쁜지를 잘 모른다. 그게 왜 나쁜지를 제대로 알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도 있다. 오토바이가 사흘 동안 한 장소에 매여 있었는데, 아이들이 잠금장치를 끊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생각 안 했다. '오토바이가 그냥 서 있으니까, 내가 좀 타면 어때'라는 식이다. 그 상황을 옆에서 본 아이들도, 이미 자기네 문화 집단에서는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잘못된 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사과 편지는 단체로 쓰게 한 다음, 오토바이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 편지를 붙이라고 했다. 사나흘 지켜보며 사진도 찍어오라고 했다. 도둑질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서너 명의 아이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때리고 폭력을 행사한 것도 마찬가지다. '쟤가 맞을 짓을 해서 때렸지, 내가 저 아이를 인간적으로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바꾸는 게 관건이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러면, 뭐 대안학교 보내면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하지만 대안학교라고 해서 당연히 폭력이 없으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해법일 게다.
김선옥 : 그렇다. 학생부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들을 때리는,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식이다. 그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학교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대처하는 문화가 없어져야 한다. 특히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때리지 말아야 한다. 그건 교육이 아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딱' 때리는 순간,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물론 교육적 매는 있을 수 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못 하면 세 대를 맞겠다'고 약속했는데 어겼을 경우,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억지다.
'로또 당첨'이 꿈인 아이들, 유흥가로
프레시안 : 학교폭력에 대해 인터뷰를 하다보면, '자존감'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이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해야 일탈하지 않는다는 게다. 그런데 꼭 그렇기만 할까. 예컨대 유흥가에서 '삐끼'를 하는 청소년 중에는 자신들의 존재감이나 조직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저 '돈'이 필요해서인 경우도 많지 않나. 청소년 문제 역시 '돈' 문제와 떼놓고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프레시안(최형락) |
유흥가에 나가는 아이들 중 대부분은 집안 형평이 어렵다. "공부할 수 없어요. 전 돈 벌어야 해요"라며 현실적이다. 이 아이들은 미래라는 것을 보장받을 수 없다. 항상 결핍 상태에 있었고,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은데, 청소년들이 알바해서 돈을 벌기란 제한적이다.
외모와 화술이 되는 아이들은 더 쉽게 (유흥가를) 접하게 된다. 특히 가출한 여자아이들은 백팔 백중 몸 파는 곳으로 간다. 며칠 전, '강남 텐프로 클럽(고급 룸살롱)'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났다. 한 남자가 강남에 60평짜리 아파트와 생활비를 준다고 했다며 자랑하더라. 이 아이를 설득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프레시안 : '내 몸이 곧 돈'이라는 생각을 너무 일찍 해버린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들린다. 몸이 돈으로 금세 환전되고, 그 돈의 힘으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아이들, 어떻게 해야 할까.
김선옥 : "지금은 힘들어도 고생을 해야 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해"라는 말에는 "5년 후, 10년 후에 OOO가 될 거야"라는 비전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유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그래서 꿈틀학교에서는 "넌, 이런 장점이 있다"고 계속 얘기해 준다. 노래를 조금이라도 잘하는 아이를 보면, "앞으로 멋진 가수가 되겠네, 홍대 앞에서 노래도 하겠네. 미리 사인받아야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오버야, 왜 그래"라고 하다가도 선생인들이 6개월 정도 계속 칭찬해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 내가 노래를 잘하네. 가수가 될 수 있겠다"라며 "가수될 거예요"라고 이야기한다.
자기만의 브랜드,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처음에는 "몰라요, 몰라요"라고 하던 아이들도 "너는 이런 모습일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긍정적인 자기만의 '상(象)'을 계속 만들어 주면 달라진다. 현재 자기 모습은 굉장히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힘들 게 지금 이런 거 계속해야 해요?"라고 투덜거린다. 투덜거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역시 아이들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 미래 자기의 자화상을 긍정적으로 그리게 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가출 청소년 쉼터에서 일하던 시절 만난 15살 아이가 있다. 본드 흡입을 굉장히 심하게 했다. 정신병원도 대여섯 군데를 다녔고, 뇌의 상당 부분이 죽어서 발작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런데 아이가 운동을 잘했다. 그래서 잘하는 운동을 계속 강화시켜줬다. 그랬더니 17년 만에 꿈을 이뤘다. 코이카(KOICA,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를 통해 태권도 자원봉사자로 1년 동안 베트남을 간다.
한 달 전쯤 만났을 때 자기는 중학교 때부터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외국어도 못하고, 다른 공부도 못해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다. 이후부터 넌 완전히 달라질 거야"라며 영어 신청서 작성을 도와줬다. 한참 상태가 안 좋았을 때도 "나는 유명한 태권도장 관장이 될 거야"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진찰을 받았을 때만 해도 소뇌가 30퍼센트만 살아 있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태권도를 계속했고, 그 결과 결실을 본 것이다.
자기의 긍정적 자화상을 그리게 해야 한다. 강점 중심의 접근을 하는 것이다. "너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너 이것 잘하네, 이거 좀 더 확장시켜 보자, 좋아하는 이것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 너는 5년 후, 10년 후에 분명히 OOO가 될 거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 스스로 자기 장점을 부각해서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게 꿈틀학교의 핵심이다.
담배, 술, 성관계 말고는 놀이 문화가 없다
프레시안 : 폭력과 성관계로부터 자극적인 쾌감을 경험한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다양한 꿈을 키워주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김선옥 : 자존감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 안 된다. 특히 여자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대안적인 놀이 문화가 있어야 한다. 거친 아이들끼리 모이면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성관계 갖는 것 외에는 다른 문화가 없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놀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또 자기들끼리 서로를 팔기도 한다. 그 안에서 강자, 약자가 존재한다. 강자는 조건만 맞으면 약자에게 (성관계를) 시키고 돈을 챙긴다. 자기 몸을 함부로 한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윤간하고, 또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을 추행하기도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른들의 부정적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대안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중요하다. '쉼터'에서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교육이 있다.
"섹스는 인간관계다. 그리고 쾌락뿐 아니라 생명도 중요하다. 너희들은 이 세 가지를 다 느끼니? 다 느낀다면 네 성관계는 인정해줄 수 있어. 서로 원해서, 대등한 인간관계에서 맺는 성관계가 아니라 그냥 '대주는' 관계라면,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놀이로 하는 성관계라면, 그건 너를 파괴하는 거야."
자존감은 거저 생기지 않는다. 서로를 소중하게 대하는 관계를 경험해야 한다. 다양한 놀이를 하며 다양한 즐거움을 느껴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또 상대방이 소중한 줄 안다.
/이명선 기자,성현석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학교폭력'을 말하다]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 "사과가 썩은 것은 사과 탓?"
이명선 기자,성현석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4-24 오전 7:11:48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가 25억 원을 들여 실시한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뜯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조사에서 포항의 한 중학교는 전교생 923명 중 단 1명만 '우리 학교에 일진이 있다'고 답을 했는데, 일진 인식비율이 100%로 처리됐다. 이런 사례가 부지기수다. 학교별 응답률이 20%대로 낮은 탓이다. 게다가 당초 학생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결과를 공개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앞으로 진행될 조사는 더욱 신뢰성이 떨어지게 됐다. 학생들이 솔직한 대답을 안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전국 1만1500명의 초‧중‧고‧특수학교 교장을 대상으로 23일부터 실시되는 '학교폭력 근절 특별연수'만 해도 "전형적인 전시행정", "교육자치 훼손"이라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지난 3일 이명박 대통령이 "교과부는 교장 교육을 잘 시켜라"라고 지적하자 1주일 만에 전체 교장을 대상으로 급조된 계획이어서 "5,6공화국 때도 없던 전수(全數) 연수"라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한들, 이리 요란할까. 이런 가운데 <프레시안>은 "사과가 왜 썩을까요?"라는 물음을 던진 대안교육 전문지 격월간 <민들레>에 주목했다.
"사과가 썩었다며 말이 많습니다. 썩은 사과 때문에 나머지 사과까지 문드러질까 걱정들입니다. 썩은 사과만 골라내면 나머지 사과는 괜찮을까요. (…중략…) 문제는 썩은 사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썩게 만드는 사과 상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토양이 부실하거나 비료만 줘서 쉬 썩어버릴 만큼 무른 사과가 된 것인지도. 사과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쯤 사라질까요."(<민들레> 79호, "표지 이야기")
학교폭력 문제는 '일진'이라는 '썩은 사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과 상자와 흙, 비료 등 사과를 생산하는 근본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또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폭력이 학교에 난무한다면,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학교가 서 있는 자리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닐까.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청소년들의 버팀목이 돼 왔던 <민들레>에 주목한 이유다.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은 지금의 학교를 진단하며 '자존감'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는 "학교폭력의 밑바탕에는 아이들의 자존감 결여가 있다"고 말했다. 현 발행인이 말하는 '자존감'은 '자존심'이나 '우월감' 등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는 많은 아이들이 "우월감은 있어도 자존감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성적이 좋거나, 아파트 평수가 넓거나, 외모가 뛰어나서 한 가지라도 내세울 게 있으면 그나마 버티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으면 그야말로 (왕)따가 된다"라는 이야기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자존감이 없는 아이들이 우월감으로 버티는데, 일부 아이들은 그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다. 또 다른 아이들은 자신을 긍정할 근거가 모조리 허물어지면서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 정부의 정책대로 '썩은 사과'만 골라낸다고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까. 지난 20일 서울 동교동 <민들레> 사무실에서 현 발행인이 전한 우리 학교, 우리 아이들의 '슬픈 사과 이야기'를 정리했다. <편집자>
▲ 현병호 <민들레> 대표 ⓒ프레시안(이명선) |
"문제는 자존감, 자기 삶이 행복하지 않으니 폭력 휘둘러"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됐다.
현병호 :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이 없는 것 같다. 학교폭력의 가장 밑바탕에는 아이들의 자존감 결여가 있다. 지금 학교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자존감을 갖기 힘든 구조다. 우월감을 가질지 모르지만, 자존감은 없는 상태다. 못하는 애들은 못하는 대로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대로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만 있다.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 삶을사랑하는 10대의 꽃다운 시절을 잘 사는 아이들이 없다. 자기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성이 나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기본 패러다임이 경쟁구도이지 않나.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세상은 어차피 적자생존이다'라는 논리가 교육의 패러다임이 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 논리를 옹호하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경쟁력이라는 게 과연 지금 이 경쟁 시스템으로 생겨나느냐'라고 말이다. 경쟁력은 경쟁으로 생기지 않는다. 해법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경쟁 시스템이 문제다. 한국 학생들이 '피사(PISA,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는 최상위권 점수를 받는데, 같은 조사에서 학업 만족도 부문은 꼴찌 수준이다. 다른 조사를 통해 드러난 행복지수 역시 꼴찌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교사 처우가 아주 좋은 나라로 꼽힌다. 그런데 교사들의 만족도는 역시 최하위권이다. 아이들의 상황과 교사들의 상황이 그대로 닮았다.
교사들도 자존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직업에 대한 만족감,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바닥인 것이다. 그야말로 학교가 교사와 아이들과 삶을 낭비하게 하는 구조다. 아이들은 적어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낭비하게 하고, 교사는 교사대로 학교에서 평생을 보내는데 참 불행하다.
"자존감 없는 아이들, 학교만 나무랄 수는 없다"
현병호 : 아이들의 자존감이 바닥인 상황은 학교의 책임도 있지만, 가정의 책임도 있다. 아무리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부모가 아이들을 지지해주고 존중해준다면 아이는 바르게 자란다. 민들레를 찾는 아이 가운데 (정규 교육과정) 12년을 마치고, 지금 21살인 친구가 있다. 학교에 짓눌린 흔적이 전혀 없다. '자존감이란 게 저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친구다.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부모님의 교육철학이 정말 단순하다. 그 친구 어머니는 "아이한테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준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이면 자기 역할은 충분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아본 아이는 자기를 존중할 줄 알 것이라는 얘기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정말 자기답게 살 수 있게 존중받은 것이다. 수학 성적을 20점, 30점 받으면서도 전혀 스트레스를 안 받았다고 한다. 그 친구는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대신 '수유+너머' 등을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 지금 출판 인턴으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상태다. 대학을 졸업한 친구보다 낫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살게 도와주는 게 부모가 하는 최선의 교육인 것 같다. 학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가장 좋을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것을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를 놓고 학교만 나무랄 수 없는 것 같다.
'2011 OECD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조사 결과 OECD 23개 회원국 중 한국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 22위인 헝가리(86.7점)와 20점 이상 큰 차이가 났다. 2010년 OECD 국가의 자살률 현황을 보면 한국은 표준인구 10만 명당 28.4명으로 1위를 기록했다. 청소년 자살률도 상위 그룹에 속해 있는데, 한 해 동안 초등학생 3명, 중학생 53명, 고등학생 90명 등 전국적으로 청소년 146명이 자살했다.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친구의 괴롭힘으로 중학생이 자살한 이후, 지난 2월에는강남 8학군 고교생이 성적 압박을 호소하며 투신 자살했고, 최근 4월에는 경북영주와 안동에서 중학생 두 명이 잇따라 자살했다. 전문가들은 친구의 괴롭힘과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지난 21일 <서울신문>이 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받아 분석한 결과, 서울시내 학생 1000명 중 5명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초구 7.4명, 양천구 7.2명, 강남구 6.8, 송파 6.1명 순이어서 학업열이 높은 지역수록 우울증에 걸린 학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식물이 생기 찾듯 변한다"
프레시안 : 최근 청소년의 자살이 잇따랐다. 그 중 한 이유가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이다. 피해 학생 입장에선 지금 경험한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현병호 : 민들레를 찾는 아이들 중에도 학교에서 겪은 괴롭힘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경우가 있다. 이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서히, 확실히 변한다. 교사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친구와의 관계가 달라진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해 간다. 처음에는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식물이 생기를 찾아가는 것처럼 변한다. 자신감이든 자존감이든 결국은 사랑을 받으면서 변하게 된다.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를 조금씩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게 치유인 것 같다. 결국은 사랑이다.
사실은 부모가 제일 확실한 치유자인데, 부모가 그 역할을 잘 못하면 주면 다른 사람들이 해줘야 한다. 민들레에서는 부모 상담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모도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가 학교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다른 관계를 경험하며 아이는 상처를 회복한다.
"학교를 '땡땡이' 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가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은 과거와 달리 '학교를 안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보편화됐다는 점이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에선 숨통이 조금 트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가 있다. 학교를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아직도 많다.
의식이 있고 학력이 높은 부모들은 학교 교육을 상대화할 수 있다. 오히려 학교를 절대화하는 쪽은 소외계층이다.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교 졸업장을 바라기 때문에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이 학교교육을 더 절대화한다. 딜레마다.
내가 지금 이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뭔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야 한다. 현재 위탁형 학교가 있는데, 퇴학 조치당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가기에는 힘들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정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력 인증이 되는 학교 밖 피난처 같은 곳이 생기면 좋겠다. 민들레에서 단기 1년 과정의 '틈새학교'를 제안했다. 최근 곽노현 교육감 인터뷰를 했는데, 서울시교육청에서도 그런 구상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피난처 공간이 절실하다.
민들레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를 자퇴하고 온다(민들레는 탈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한 여중생은 학교 가기 싫을 때면 민들레에 왔다 가기도 한다. 학교를 땡땡이치고도 잘 보낼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 만들어지면, 아이들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는가.
곽노현 교육감은 <민들레> 80호 "대화_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듣는다"에서 "학업중단 위기에 놓인 재학생들에게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고,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는 지자체, 지역사회와 연계한 지원체계 속에서 적절한 대안을 연결시켜 줄 필요가 있다"며 "이런 총괄적인 지원체계 구축이 '책임교육 네트워크'라는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94쪽) 곽 교육감은 특히 덴마크의 애프터스쿨에서 착안한 <민들레>의 '틈새학교' 제안에 "자존감이 낮고 실패 경험이 많은 아이들에게 좋겠다"며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정규교육 차원에서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는 입장을 보였다.(96쪽) |
"학교에 경찰 부르는 게 학교폭력 대책? 아이들 표정을 보라"
프레시안 : 폭력은 결국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라서 다른 좋은 관계를 경험하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언론보도나 정부 입장 등을 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진단하는 느낌이다. 오히려 학교폭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학교폭력이 심한 학교를 인터넷에 공개한다는 게 정부 방침인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더 꺾이지 않을까. 학교폭력 문제를 대하는 언론, 정책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듯하다.
현병호 : 학교 자체가 이미 폭력학교다. 시스템 자체가 폭력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일부 가해자를 솎아낸다고 해도 (학교폭력 문제는) 또 나올 것이다. 지금 정책 방향은 그야말로 임기응변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꼭 해야 할 것를 꼽으라면, 솔직히 막막하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는 좀 뚜렷하게 보인다.
우선, 학생들을 성적으로 서열화하지 말아야 한다. 성적 순위를 게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됐다. 또 학교 서열 매기는 것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폭력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고 여긴다면, 서열화와 폭력이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진짜 문제는 교육 문제를 교육적으로 풀지 못한다는 점이다. 비교육적인 상황일수록 교육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비교육적 상황을 비교육적으로 풀고 있다. 학교가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교에 경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교 폭력 문제를 교육적으로 풀 생각은 안 하고, 아이들을 치안 행정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다고 학교폭력 문제가 풀릴까. 절대 아니다. 실제 교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경찰이 학교에 와서 '이럴 때 신고해라'라며 교육을 했던 사례를 들려줬다. 당시 아이들의 표정이 정말 머쓱했다고 한다. 현실성도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범죄자 취급해서 문제를 더 키울 뿐이다.
"대안학교에도 폭력 사건은 터져…비교육적인 것을 교육적으로 푸는 게 교육"
프레시안 : 대안학교에선 폭력 사태를 어떻게 푸나.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가벼운 주먹다짐은 일어나기 마련인데….
현병호 : 대안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 사건은 일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교육의 기회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온갖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입장은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은 명백히 비교육적이다. 그러나 비교육적인 것일수록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게 교육의 원칙이다. 그렇게 볼 때, 학교 폭력을 둘러싸고 요즘 나오는 주장들은 기본적인 교육 철학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행정적인 조치가 필요한 대목도 있다. 한국 학교는 학급당 인원수가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교사 수를 대폭 늘려서 교사 대 학생수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학교 규모도 줄여야 한다. 행정 영역에서 필요한 건 이런 조치들인데, 엉뚱한 주장만 나온다.
ⓒ프레시안(이명선) |
"'인생 살아볼만 한 것이구나' 느끼게 하는 게 대책"
프레시안 : 학교폭력으로 상처를 받은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병호 : 추상적인 얘기지만, '인생이 살아 볼만 하구나'라는 걸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아닐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게 나쁜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조금씩이나마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 결국은 '만남'이다. '교육은 만남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꼭 교사가 아니어도 어른들이나 또래들과 좋은 만남을 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
그렇다면 만남이 가능한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런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가 하는 게 문제다. 앞서 언급한 '틈새학교'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지금 다니는 학교 안에서 문제를 풀지 못하고 학교 바깥에서 해법을 찾으면, 학교에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현병호 : '틈새학교'가 1년 과정으로 되는 게 낫다고 보는 것도 그래서다. 덴마크의 '애프터 스쿨(after school)'이 그런 예인데, 중3과 고1 가기 전에 가는 자유학교의 한 유형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열려 있다. 지금 위탁형도 그런 유형이긴 하지만, 딱지(문제아)가 붙지 않게 해야 한다. 오히려 지금은 교류학습이나 현장체험 정도의 한 달 과정으로 잠시 응급조치를 할 수도 있겠지만, '틈새학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모델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주말학교, 방학학교 등 여러 가지 모델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덴마크 '애프터 스쿨'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가기 전 잠시 쉬어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다. 주로 다양한 문‧예‧체 활동과 캠핑 등 야외활동, 그리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사귀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며 진로를 생각해 보게 한다. 두 달에 한 번 방학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 갈 수 있다. |
"웹툰이 학교폭력 조장?…<조선> 논조가 오히려 폭력 키워"
프레시안 : <조선일보>가 학교폭력 문제의 원인으로 폭력 웹툰을 지적했다. 온라인 게임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현병호 : 1퍼센트 정도 영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속 편한 소리다. '사과가 썩은 것은 사과 탓이다'라는 논리다. 오히려 <조선일보>가 학교 폭력에 기여하고 있는 바도 크다. (웃음) <조선일보>는 아이들을 서열화하도록 부추기는 논조다. 결국 5퍼센트를 위해서 95퍼센트를 들러리 세우는 구조를 찬성하는 것이다. 사실 그야말로 폭력적인 구조다. 그리고 학교폭력은 이런 폭력구조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른들의 사회가 이미 서열화 돼 있다. 아파트 평수로 서열화 돼 있고, 입고 다니는 옷의 브랜드로 서열화되어 있다. 그게 아이들에게도 전이됐다. 아이들 역시 성적이 좋거나, 아파트 평수가 넓거나, 외모가 뛰어나거나 한 가지라도 내세울 게 있으면 그나마 버티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으면 그야말로 (왕)따가 되는 것이다. 자존심의 평수가 아파트 평수와 비례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 다르다. 자존감은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런 자존감이 바닥이고, (사회 구조가) 성적, 외모, 재산으로 자존심만 세우게 되어 있다. 그런 자존심조차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몰리는 것이다.
"싸움인가, 괴롭힘인가?"
프레시안 : 학교 폭력을 둘러싸고 나오는 온갖 진단과 처방을 접하며 답답했던 점 중 하나가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이 뭔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학교 폭력이라면, 교사가 아이들에게 하는 체벌은 학교 폭력인가, 아닌가. 감정 조절이 서툴고 말과 글로 싸울 능력이 없는 아이들끼리 벌이는 주먹다짐도 학교 폭력으로 분류해서 단죄하는 게 옳은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단순한 주먹다짐과 물리적 폭력 없이 영리하게 괴롭히는 경우 사이에선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인 걸까.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 담론은 후자을 방치하게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싸움과 괴롭힘은 다른 것 아닌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도 구성원 사이의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괴롭힘이 없는 사회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싸움이 없는 사회라기보다는 괴롭힘이 없는 사회일 것이다. 괴롭힘은 분명히 막되, 싸움은 잘 풀어내는 길을 가르치는 게 진정한 교육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다.
<민들레> 79호에 실린 현 발행인의 글을 읽고 반가웠던 것은 그래서였다. "학교폭력과 폭력학교"라는 글에서 현 발행인은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싸움과 괴롭힘으로 구별했다. 그리고 싸움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괴롭힘이라는 게다. 이런 접근 자체가 반가웠다. 당시 글에서 현 발행인은 알바니 프리스쿨의 사례도 소개했다. 이 학교에선 몸싸움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병호 : 싸움은 일종의 대등한 방식 즉, 만남의 방식인 셈이다. 지든 이기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코피가 터진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존감에 상처를 입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괴롭힘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과 괴롭힘은 다르다.
제대로 싸우는 일이라면, 오히려 교육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나만 해도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비겁했던 거다. 겁이 나기도 하고. 스스로 비겁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아이들이 싸움을 경험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전혀 해롭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괴롭힘은 심각한 문제다. 괴롭힘을 당하면 증오심이 쌓이고, 이 증오심이 아주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그냥 싸움을 한 친구는 이기든 지든 간에 그렇게 증오심을 갖진 않는다. 괴롭힘과 싸움이 다른 지점이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몸싸움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서로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싸움이 공정하고 또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면 계속하도록 허용한다. 가까이에 어른 한 명이 있으면서 안전한지 확인도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결투에서 서로 완결의 느낌을 갖고 화해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48쪽) 프리스쿨 설립자 메이의 표현대로 '경험의 정치역학'이라 불리는 지점에 아이들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40여 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침 좀 뱉는 친구가 자존심을 건드릴 때도 피하기만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하는 말은 흔히 비겁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된다. 싸워서 코피가 터지더라도 제대로 싸워보는 것은 성장과정에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부당함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자존감을 키워준다. 고등학교 시절 공설운동장에 전교생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서는 쌍욕을 해대는 교련 선생에게 분노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뒷담이나 깐 것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다. 힘없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권력욕의 왜곡된 표출이다. 오른쪽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내어주라는 예수의 비폭력 가르침은 자칫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말이다. 맞짱 뜰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뺨을 때리는 자를 위해서도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보다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맞짱을 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은 쉽사리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다. (<민들레> 79호, "학교폭력과 폭력학교" 가운데 일부) |
ⓒ프레시안(이명선) |
맞으며 자란 아이는 결국 때린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면 보수 진영은 종종 학생인권조례를 문제 삼는다. 학생인권조례가 체벌을 금지하는데, 체벌을 막으면 거친 아이들을 단속할 수 없어서 학교폭력이 더 심해진다는 논리다. 이게 과연 옳은 주장일까.
현병호 :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자란 아이가 커서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높다. 교사한테 맞은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이 익숙한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보다 약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돼 있다. 위계를 당연시하고, 그걸 폭력으로 유지하는 구조가 문제다. 체벌로 아이들을 바로잡겠다는 발상은 군사문화의 산물일 뿐이다. 교사는 장교, 고학년은 병장쯤으로 여기는 것 아닐까.
프레시안 : 학교폭력을 둘러싸고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초점이 '일진'인 가해자에게 맞춰져 있다.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춘 진단이 드물다.
현병호 : 성폭력도 마찬가지이듯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학교 안에 그런 역량이 있다면 (학교폭력)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문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종의 치유센터가 필요하다. 치유 역량이 있는 현장에 피해자를 맡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다.
가해자에게만 초점을 맞춘 담론은 분명히 위험하다. 대부분 '일진'이 누구인지를 찾아내서 그들을 솎아내자는 주장이다. '일진'끼리 모아놓으면, 그곳은 평화로울까. 또 '일진'을 솎아낸 자리에선 계속 평화가 유지될까. 그렇지 않을 게다. 새로운 가해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몸을 풀어줘야 마음도 풀린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단 괴롭힘 같은 것은 없지만 드물게 왕따도 생겨나고 주먹다짐도 일어난다. 그럴 때 흔히 묵언수행, 108배 등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수행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애쓰는데, 연좌제에 가까운 이런 문화는 일종의 전체주의 경향을 띠고 있어, 아이들로 하여금 공동체 문화에 질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폭력성의 뿌리는 아이들의 성장과정 만큼이나 다양해서 한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나 폭력성은 그 본질에서 사랑과 다르지 않은 에너지다. 어린 나이에 자기성찰의 힘으로 에너지 변환의 연금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순진한 기대다.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발효되는 폭력성은 다른 출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파괴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하듯이 어린아이들의 경우 발버둥치면서 분노의 에너지를 마음껏 표현하도록 어른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십대의 경우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에너지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포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분노와 증오는 마음만 굳게 하는 게 아니라 몸의 근육도 경직시킨다. 몸을 풀어주는 게 마음을 푸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경우 레슬링 같이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운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민들레> 79호, "학교폭력과 폭력학교" 가운데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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