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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24일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그는 임기 마지막 날인 이날까지 빡빡한 일정을 이어갔다. 이날 오전 9시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의 라스무센 초대 의장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류옌둥(劉延東)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을 접견하고,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의 친서를 전달받았다. 또 이날 오전 국무위원 등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 방명록에 '水到船浮(수도선부·물이 차면 배가 떠오른다) 더 큰 대한민국, 국민 속으로'라고 적었다. 수도선부는 이 전 대통령이 올해 신년사에도 인용한 사자성어로 '욕심을 부려 억지로 하지 않고 공력을 쌓으며 기다리면 큰일도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논현동 사저 주민들과 만나 "위대한 국민을 위해 일한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이날 오후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를 만나 12조원 규모의 태국판 '4대강'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4대강' 사업 수출을 챙긴 셈이다.

이어 이 전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 여사는 이날 오후 4시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로 돌아갔다. 임기는 이날 자정까지이지만 후임
박근혜 대통령이 이삿짐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미리 비워준 것이다. 이날 자정까지 국가 지휘통신망은 논현동 사저에서 유지됐으며 안광찬 전 국가위기관리실장은 청와대 벙커에서 자정까지 상황을 관리했다.

이 전 대통령 내외는 청와대 본관부터 정문까지 걸어가면서 연도에 늘어선 600여명의 전·현직 직원들의 환송을 받았다. 그는 환송을 위해 나와 있던 안 전 실장에게 "오늘 밤 12시까지 잘 지켜. 12시에 나랑 전화하고 자자"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 내외는 이날 오후 4시 40분쯤 논현동 사저에 도착, 골목길을 가득 메운 1300여 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골목 곳곳에는 '이명박 대통령님 논현동 사저 귀환을 환영합니다. 논현동 주민 일동' 등 환영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가 논현동 사저로 돌아간 것은 11년 만이다. 2002년 서울시장 당선 후 4년간 관저에서 생활했고, 이후 대통령 취임 때까지는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돌아와서 강남 구민이 되고 논현동 주민과 함께하게 된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며 "이제 시민으로 돌아가 손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까 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 인류 미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조용히 하겠다"고 했다. 감회에 젖은 듯 간간이 목소리가 잠겼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개인 사무실을 마련해 회고록 집필과 외국 손님 접견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연말 출범이 목표인 '이명박재단' 설립 준비 작업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 대통령은 국내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 국제 공헌에 주력하는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롤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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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mazon.co.uk/40-Most-Beautiful-Classical-Masterpieces/dp/B0061I4S94



클래식의 문제는..

그걸 다 들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정신적인 여유도 없는 것도 한몫하고..


모든 것들이 다 그렇지만..

클래식도..

클라이막스가 아니라면 잠이 오는 자장가 정도이니..

..

아마.. 내가 은퇴후에나... 찬찬히 다 들어보게 될까?..


암튼.. 40-Most-Beautiful-Classical-Masterpieces 은.. 정말.. 클래식중에서도 좋은 것만 고르고 고른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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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좋아지는 음반이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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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hosun.com/article.html?contid=2013021200048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고봉중·고등학교(서울소년원)는 19세 미만 청소년이 보호 처분을 받고 격리 생활을 하는 전국 11개 소년원 중 하나다. 280여명이 짧게는 6개월부터 길게는 2년까지 격리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소년범들에게 '가족'은 무엇일까. 기자는 소년원 측에 인터뷰 주선을 요청했고, 그중 10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모두 사회에 가족이 있는 아이들이었고, 가족이 없는 아이들은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소년원 관계자는 "소년범 대부분이 결손가족 등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며 "아이들이 가족에 대해 너무 안 좋은 말만 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대부분 아이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 보니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돌아갈 가족이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인터뷰에 응한 아이들은 소년원에서 가족조차 없는 더 불행한 아이들을 만났고, 잊고 있던 가족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가족은 '날 때리는 사람들'이었다는 문용(가명·18)이는 처음 소년원 처분을 받고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사고 칠 때마다 아빠랑 형들이 날 죽일 듯이 때렸어요. 서로 욕하고 미워하는데 안 보게 돼서 잘됐다 싶었지요." 그런데 목포에 사는 아버지, 형들이 매주 한 명씩 번갈아 면회를 왔다. 한 번만 오고 말 줄 알았는데 계속 왔다. 문용이는 "형한테 왜 오냐고 물어봤는데 '네가 막 보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다. 그래도 동생이라 걱정이 되니까 오는 거다'라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엄마 살아계실 때 기억이 나더라고요. 5년 전에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1주일 전쯤 둘이 산책을 나갔는데 엄마가 그랬어요. '우리 문용이, 계속 사고 쳐서 형이랑 아빠한테 맞으면 어쩌지? 엄마 죽으면 이제 말려줄 사람도 없을 텐데'라고요. 돌이켜보니 나는 우리 엄마 죽을 때까지 걱정만 하게 만들었더라고요. 남은 가족한테도 그랬고요." 문용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소년원에도 '모범생'이 있다. 그렇게 달라진 모범 소년범의 변화 뒤엔 대개 가족이 있었다. 소년원에서 제과·제빵기능사에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딴 윤석(가명·18)이가 그런 경우다. 상습폭행·금품갈취로 2년형을 받은 윤석이는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열두 살 때까지 함께 살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만난 아빠는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윤석이는 "없는 것만도 못한 집구석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출을 밥 먹듯 하던 윤석이는 술 취한 아저씨들을 골라 폭행하고 돈을 뺏다 소년원에 왔다.

윤석이를 바꿔놓은 것은 아빠와 여동생이 꼬박꼬박 보내 준 편지였다. "편지가 올 때마다 자기도 보여달라는 애들이 많았어요. 당연히 안 보여줬지요. 나중에 알았는데 걔들은 편지 보내줄 가족이 없더라고요." 윤석이는 "나는 걔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았는데 똑같이 사고 쳐서 여기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 창피했고, 아빠랑 동생한테도 미안했다"고 말했다. 없는 것만도 못했던 집구석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후 윤석이는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경찰서에서 만난 아빠가 '내가 너를 혼낼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땐 대꾸도 안 했어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지금도 마음에 걸려요." 윤석이는 "미안하다는 말은 쑥스러워서 못하겠다. 여기서 나가면 가장(家長) 역할을 톡톡히 해서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년원에서 측량사 자격증을 딴 홍중(가명·19)이는 차량 상습절도로 소년원에 왔다. 홍중이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내가 잘사는 줄 알았다. 그게 좋았다"라고 말했다. 홍중이가 세 살 때 이혼한 부모는 남매를 보육원에 맡기고 각자 새살림을 차렸다. 홍중이가 중학교 때 아빠와 엄마를 차례로 찾았지만, 둘 다 '미안하다'는 말뿐 함께 살자고 하지 않았다. 누나를 남겨두고 혼자 보육원을 뛰쳐나온 홍중이는 그때부터 차를 훔치고 돌아다녔다.

경찰에게 붙잡혀 들어온 소년원, 편지를 나눠주는 시간에도 홍중이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중이에게도 편지가 왔다. 누나였다. 그 후 누나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퇴소가 한 달도 안 남은 홍중이의 편지 모음 봉투는 누나 편지로 가득 찼다.

"누나가 편지에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우리가 이해하자. 너랑 나랑 잘살면 된다'예요. 아직 엄마, 아빠는 이해 안 되고 용서도 안 돼요. 그런데 우리 누나, 하나 남은 가족인 나까지 속썩이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앞으로는 누나한테 든든한 동생이 되고 싶어요."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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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피임약이 지난 9일로 판매 50주년을 맞았다. 1960년 이날 미국 식품의약국은 제약회사 시얼(Searle)이 여성호르몬 이상 치료제로 개발했던 에노비드(Enovid)의 피임 효과를 인정하고 경구피임약으로 판매를 허가했다.

에노비드는 1998년 세계 지식인 포럼인 '에지'가 선정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 121개'에 뽑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콜린 블래이크모어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변화시킨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했다.

먹는 피임약 전과 후의 세상은 달라졌다. 임신과 육아에 묶여 있던 여성들이 스스로 임신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임신의 공포에서 해방되면서 성(性)도 개방됐다. 단순 신약(新藥)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든 현상이 된 것이다.

경구피임약 개발은 남자들이 했지만 약이 발명되기까지 험난한 여정은 마거릿 생거가 헤쳐나갔다. 생거는 최초로 산아제한운동을 제안한 간호사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생거는 1879년 9월 미국 뉴욕주 코닝에서 가난한 석공(石工)의 딸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생거의 어머니는 18차례 임신을 거쳐 11남매를 낳았다. 생거는 여섯째였다. 생거는 태어나자마자 방치돼 죽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숱한 아기들을 보며 자랐다. 당시 콘돔이 있었지만 고가인 데다 남자들은 이를 기피했다.

결혼한 후 맨해튼으로 이사한 생거는 1912년 간호사로 일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새디 작스라는 여잔데, "혼자서 낙태를 하려다가 하혈이 심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치료를 끝낸 후 작스가 물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동행한 남자 의사가 대답했다. "섹스를 절제하면 된다." 몇 달 뒤 작스의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생거의 눈앞에서 새디 작스는 또다시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어 있었다. 생거는 훗날 "자포자기에 빠진 여성들을 위험천만한 낙태로부터 구원해야겠다고 저절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1914년 생거는 '여성들의 반란'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우편으로 배포했다. 피임의 방법과 산아 제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정부는 이 책자를 포르노물로 규정했다. 생거는 영국으로 1년 동안 망명했다. 생거 대신 남편이 책자를 직접 돌리다가 음란물 유포죄로 구류를 살았다. 1916년 생거는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사춘기의 성, 자위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그 해 생거는 뉴욕 브라운스빌에 세계 최초로 '가족계획 클리닉'을 개원했다. 9일 뒤 경찰이 압수수색을 실시했고 생거는 30일 구류형을 받았다. 역시 포르노물 유포죄.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생거에게 동조자들이 생겨났다.

1918년 뉴욕시는 생거에 동조하는 명사(名士)들의 여론에 밀려 클리닉을 허용했다. 1921년 생거는 '미국산아제한연맹'을 결성했다. 1923년 마침내 여성 의료진과 직원으로 구성된 첫 번째 합법적인 산아제한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거부(巨富) 록펠러 가문이 그를 후원했다. 1921년부터 1926년 사이에 생거의 조직으로 쏟아진 편지는 100만 통이 넘었다. 피임 방법을 묻는 엄마들 편지였다.

1936년 마침내 피임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풍속 교란 방지법이 개정됐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피임 정보를 제공받게 된 것이다.

1939년 생거는 뉴욕 할렘가에 근거를 두고 '니그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니그로(Negro)'는 당시 흑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성에 대한 무지와 빈곤으로 피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흑인 여성들을 교육했다.

생거의 고민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불편한 피임도구, 그러니까 여성의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각종 피임도구 없이 간편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굳이 비용을 치르며 병원까지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1950년 생거는 15만달러를 먹는 피임약 개발 기금으로 내놨다. 1934년 그레고리 핀커스라는 생물학자가 호르몬을 조작해 토끼의 배란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근 20년이 지난 1953년 생거가 핀커스를 찾아갔다.

"사람도 가능하지 않은가." 핀커스는 제약회사 시얼사(社)에 개발을 제안했다. 사회적 비난을 예상한 시얼사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1957년 이 회사 연구원 하나가 우연하게 피임효과가 있는 물질을 개발한 것이다. 핀커스는 그 물질을 자기 연구소로 가져와 실험에 몰두했다. 처음부터 먹는 피임약이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게 뻔해 여성호르몬 이상증 개선제로 시판했다. 에노비드는 3년 뒤 FDA가 이 약의 피임효과를 인정하면서 정식으로 경구피임약이 됐다.

시얼사는 그 덕에 시장을 독점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시판 3년 동안 미국 여성 120만명이 에노비드를 구입했다. 1965년 연방 대법원은 정부가 임신이라는 사적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국의 모든 주에서 피임약이 합법화됐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생거는 여성 해방의 시대를 생전에 목격하고 1966년 9월에 87세로 죽었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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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hosun.com/article.html?sname=smart&contid=2013012100224

 

"독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조국과 미국 내 한인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출신 사업가 박형만(74)씨와 윤병인(73)씨는 지난 10일 LA 주재 총영사관에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일 LA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해외 진출이 드물던 1960년대에 남들보다 먼저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봉사할 기회도 먼저 얻게 됐을 뿐"이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했다.

◇'막장 정신'으로 성공… "재산 절반 사회 환원"

박형만씨는 충남 공주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2년 만에 중퇴한 뒤 서울 은평구의 한 공장에 미화원으로 취직한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다 27세이던 1964년 7월 파독 광부가 되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씨는 "5개월 뒤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고생한다'고 말한 연설을 들었다"며 "그날 많이 울면서 '정말 잘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힘든 광산 일을 마치고 오후 3시에 다시 인근 축사로 출근해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계약된 3년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2만4000마르크를 모았다. 서울에서 아파트 3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걸 당시 남편을 잃고 고생하던 누나에게 대부분 보냈습니다.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미국 LA로 건너갔습니다. 막장일을 하고 나니 어딜 가도 겁날 게 없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청소하며 시간당 1.45달러를 버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종이컵 공장으로 옮겨선 하루 12시간씩 연장 근무를 해 주당 200달러를 벌었다. 독일서 만나 결혼한 부인 이숙희씨도 간호사로 취직해 월 1200달러를 벌어 왔다. 적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월세 65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2년여 만에 3만달러를 모아 주류(酒類) 상회를 열었고 이어 주유소를 냈다. 박씨는 현재 건물 24채를 가진 자산 1억달러대의 부동산 임대업자가 됐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그에게 미국인들이 '한국 유대인(Korean Jewish)'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고향인 공주의 저소득층 417명에게 총 2억4255만원을 기부했다. 자선사업을 더 크게 하기 위해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만희복지재단' 설립도 추진 중이다. 그는 "재산의 절반인 5000만달러를 출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소해서 모은 돈, 교포사회에 써

윤병인씨는 1965년 개인사업을 접고 독일로 간 직후 막장 천장에서 떨어진 돌에 손이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6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은 그는 더 이상 광산 일을 할 수 없었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 빈손으로 귀국할 수 없다며 떠올린 것이 미국행이었다.

 

1966년 LA로 건너간 윤씨는 하루 4시간만 자고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오전에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고 오후에는 선반 공장에서 기계를 깎았다. 1년2개월 만에 9000달러를 모아 주유소를 샀다. 돈은 벌 만큼 벌었다고 생각한 윤씨는 1974년 귀국했지만 사기를 당해 모은 돈의 70%가 넘는 2만달러 이상을 날렸다. 2년 만에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남은 돈으로 항공기 청소 용역사업을 시작했다.

"고객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군말 없이 한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직원들이 청소를 끝낸 항공기는 반드시 제가 직접 마지막 점검을 했습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36개 항공사가 LA국제공항, 샌프란시스코공항, 새너제이공항에서 윤씨에게 일을 맡겼다. 연매출이 1800만달러까지 올랐다.

재기에 성공한 윤씨는 LA 지역 한인 사회를 위해 뛰고 있다. 2007년 LA 사우스베이 한인상공회의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무렵 사우스베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한인 소상인들은 한·미 간 사업 관행과 문화 차이 등으로 시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사례가 많았다. 그들이 윤씨를 찾아가 "우리의 창구가 돼 달라"며 도움을 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무실 월세와 운영비에 들어가는 월 3000달러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그는 "소상인들 사정이 그리 넉넉할 것 같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작년엔 두 사람과 재미 서독동우회장 김창수씨가 각각 1만달러(약 1060만원)씩 3만달러를 내 현지에 한인 노인회관도 만들었다. 독일 또는 한국에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또는 흉상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LA 지역 교민들이 뜻을 함께해 지금까지 1만달러 가까이 모았다. 두 사람은 "오늘의 우리와 대한민국이 있게 한 역사의 출발점을 기리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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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가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이 영화는.

..

대학생들의 첫사랑이야기가 달콤하게 녹아있다.

 

..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과정은 매우 치밀하게 연결되어

아주 매끄러운 진행을 보여준다..

 

또한... 어쩌면 뻔한 결말을.. '그래도..'  '혹시나..'..

아마도 헐리우드식 결말에 익숙한 나는..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그런지...영화의 끝부분... 검은 화면이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노래를 듣고 있었다...

 

..

 

'어쩔수 없는...'

..

 

그렇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실패하는 것처럼..

.. 그건... 미숙한.. 성숙하지 못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한 그녀는..쌍년으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첫사랑을 잊은 남자는.. 잘 살 수 밖에..

 

그또한 어쩔 수 없는...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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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면 누구라도 호감을 갖게되는 베토벤 바이러스는... Banya 라는 그룹에서 클래식을 변형한 것입니다.

 

 

Banya 는 헝가리 무곡,  캐논을 베토벤 바이러스 처럼 변형한 것이 있지만...

 

베토벤 바이러스 만큼의 임팩트는 없는 것 같습니다..그래도 헝가리무곡은 추천합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remix 버전을 포함해..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

 

그외엔 조금 주관적이긴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라의 OST로 나온  베토벤  Piano sonata  N0.8 in C Minor OP. (Pathetique) 3악장..도 초반부분은 비슷한 감이 있습니다.

 

 

국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OST의 passion도  비트가 있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용재오닐의 쇼스타코비치 왈츠 재즈 모음 2번 연주곡도 나름 추천합니다.

 

쇼팽의 왈츠 제 10번  작품 69의 2도... 비트가 약간 변주된듯한 느낌으로 듣는다면 비슷할 수도..

 

 

장화홍련의 OST인 이병우님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도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트가 있어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Area 88 cyber trace ost 의 첫곡인  mission (FUGA)orignial extened mix 곡으로... 비트가 살아있는 멋진 곡입니다... 이게 가장 베토벤 바이러스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할까요..

 

 

일본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의 OST 인 Resolver 도 제 생각엔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

 

국내 곡으로는  드라마 초한지의  OST인 윤건의 성냥팔이 소녀

 

윤상 3집의 '결국 흔해 빠진 사랑애기,  Back to the real life 의 비트도... 유사한 분위기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차에서 들어보면... 쿵 쿵 쿵... 하는 비트가 아주 좋습니다...

비장미를 느껴보고 싶다면 위의 곡들 추천합니다.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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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hosun.com/article.html?sname=smart&contid=2012123100257

"새해엔 아이들과 함께 해돋이 보러 강원도 속초로 갈 거예요. 'ITX (준고속열차)'를 타고 가서 생전 처음 동해 바다도 보고, 눈썰매도 타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27일 오후 경기도 부천 역곡역에서 만난 김행균(51) 역장은 다음 달 22일로 예정된 새해맞이 여행 얘기를 꺼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인천 지역 5개 보육원 아이 300명과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속초로 가는 1박 2일 기차 여행이다. 김 역장은 "여행도, 바다를 보는 것도 처음인 아이들이 많아 일출 시각부터 간식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김 역장이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섯 번째 기차 여행이다. 2001년 1월부터 작년 1월까지 다섯 번의 여행에 1600명 넘는 아이가 김 역장을 따라나섰다.

김 역장의 기차 여행은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2001년 당시 3년째 인천의 한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김 역장은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김 역장은 "부모만 있었으면 여기저기 다녔을 아이들이 바다 한번 본 적 없다는 말을 듣고 함께 새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첫 여행은 소박했다. 보육원 아이 50명과 무궁화호를 타고 정동진에 가서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김 역장은 "바다를 보며 연방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본 뒤 매년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꿈은 김 역장이 서울 영등포역 운용팀장으로 있던 2003년 열차 사고를 당하면서 중단됐다. 그해 7월 25일 김 역장은 기차가 들어오는데도 플랫폼 근처에서 놀고 있던 다섯 살 아이를 구하다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이 잘렸다. 이 사고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김 역장은 '아름다운 역무원'으로 불렸다 본지 2003년 7월 26일 A9면〉.

김 역장은 이 사고로 5번 이상 수술을 받았다. 발목이 잘린 왼쪽 다리는 의족을 끼우기 위해 무릎 아래까지 절단했다. 발등이 잘린 오른쪽 다리는 인공 피부를 덧씌우고 특수 신발을 신겼다. 진통제와 수면제 없이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김 역장은 재활 치료 후 1년 만에 역으로 복귀했다. 김 역장은 "날 돌아오게 한 건 당시 함께 기차 여행을 갔던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사고 후 종일 병실에 누워 있었어요.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편지를 들고 병문안을 온 거예요. 눈물이 났습니다. 빨리 일어나서 다시 아이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한 아이의 편지에 '저는 해가 뜨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저는 저 태양처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저도 역장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김 역장은 복귀 후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만난 유명 인사들에게 '기차 여행'에 대해 설명하며 기부금을 모았다. 2006년 초에는 한 방송국 협찬으로 킬리만자로 등반도 했다.

그는 2010년 전후 신종플루 등이 유행한 때를 제외하곤 2007년부터 매년 1월이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기차 여행을 떠났다. 매년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 2500만원은 코레일과 아동복지연합 등의 지원금에 그의 사비를 보태 마련했다.

김 역장의 '기차 여행'이 계속되면서 아이들의 편지도 이어졌다. 지금까지 받은 편지만 1200통이 넘는다. 김 역장은 "대학생이나 직장인이 된 아이들도 감사하다며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김 역장은 지금도 절뚝거리는 다리로 역사 곳곳을 누빈다. 직접 선로에 내려가 사고사한 시신을 수습한 건만 10건이 넘는다. 그는 "내 사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처참하게 삶의 마지막을 맞은 분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9년 전 자신의 사고를 회상하던 김 역장은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뛰어들었고, 역무원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살린 아이와 아이 부로모부터 사고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대신 수많은 분의 위로와 관심을 받았잖아요. 민망하게 팬카페까지 생겼고요. 그 아이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습니다. 제 두 아이처럼 어디서든 잘 크기만 바랄 뿐이에요."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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