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결혼한 지 한 달 된 새신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억짜리 전셋집 잔금 9000만원을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직장 동료들은 "꾀부릴 줄 모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39세 공무원인 정모씨..
"알고 보니 누나들 많은 집에서 막내이자 장남으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습디다. 아버지는 10여년 전 퇴직해 수입이 없었고요. 전세값 대출받아도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공무원 월급이라는 게 수당까지 탈탈 털어도 200만원 남짓한데, 1억을 대출받아 이자 내고 원금 갚고 부모님 드리면 남는 게 없잖아요. 누나가 조사받다가 목놓아 웁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이 많다고 결혼하라고 잔소리하지 말 걸 그랬다'고요."
친구 - "사실대로 말했으면 신부 집에서 충분히 도와줬을 텐데…. '남자라면 당연히 집을 책임져야 한다'고 끝까지 혼자 고민하다 결국…."
정씨의 부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2년 열애 끝에 결혼한 아내에게 정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는 "미안해. 정말 미안해. 행복하게 살아줘" 였다.
그래..ㅆㅂ.. 그녀가 정말 행복하게 살겠다.. 고인에 대해서 유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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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없으면 결혼을 못하는 세상..
왜 이렇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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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들은 "한국 사회가 결혼비용 때문에 집단적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집단적으로 결혼의 본질을 잊고 있다. 사랑해서 결혼해야 하는데, 지금 결혼 과정은 사랑을 놓치고 비즈니스가 됐다. 여기서 각종 사회문제가 다 발생한다. 저출산, 섹스리스 부부, 황혼이혼…."(윤대현 서울대 의대 교수)
"요컨대 한국 사회의 병증이 집약되어 있다. 자기 인생인데 포인트가 남한테 있다."(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
정미영(가명·29·미용사)씨는 갓난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 생모는 미혼모라고 들었다. 기댈 데 없는 처지지만 다부지게 헤쳐왔다. 전액 장학금 받아 대학을 졸업했고, 악착같이 일해 4000만원을 모았다. 사업하는 남자친구가 그런 정씨에게 홀딱 반했다. 예비 시부모도 정씨를 귀여워하며 "애기야, 몸만 오너라" 했다. 오는 10월로 날을 잡았다. 신랑 쪽에서 2억짜리 전셋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씨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길 가다 갑자기 혼절하기도 했다. 평소엔 '명랑하고 꿋꿋한 성격'이라고 자부했다.
"물론 고맙죠. 하지만 마음 편하진 않아요.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마음 아파요. 결혼 과정이 돈으로 시작하고 돈으로 끝나요. 다들 미친 것 같아요."
서울 강북에서 구멍가게 하는 박정자(가명·60)씨는 "딸이 시집 잘 가면 마냥 흐뭇할 줄 알았다"고 했다. 오히려 위장병이 생겼다. 박씨는 지난해 검사 사위를 봤다. 딸은 교사다. 사돈집에서 2억짜리 전세 아파트를 얻어줬다. 박씨가 혼수·예단·신혼여행 비용(5000만원)을 댔다. 남들이 "사위가 검사인데 그 정도면 거저"라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박씨는 "매일 눈치를 보느라 그때 생각은 하기도 싫다"고 했다. 딸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위에 구멍이 뚫려 1주일간 입원하기도 했다.
"사돈이 '루이비통 가방이랑 현금 1000만원만 해오라'고 했어요. 저는 루이비통이 뭔지 몰라요. '한 100만원 하려나?' 했어요. 남들한텐 어떨지 몰라도 저한텐 5000만원이 평생 모은 돈이에요. 그 돈 다 털고도 제가 죄인 같았어요. 사위에게 따로 중형차를 사줬어요. 애도 제가 봐주려고요."
결혼비용 스트레스가 멀쩡한 젊은이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결혼한 지 한 달 된 새신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억짜리 전셋집 잔금 9000만원을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고(故) 정영준(가명·당시 39세·공무원)씨의 직장 동료들은 "꾀부릴 줄 모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담당경찰 A씨는 "그런 사람이 마흔이 가깝도록 전세값을 못 모았다는 게 처음엔 의외였다"고 했다.
"알고 보니 누나들 많은 집에서 막내이자 장남으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습디다. 아버지는 10여년 전 퇴직해 수입이 없었고요. 전세값 대출받아도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공무원 월급이라는 게 수당까지 탈탈 털어도 200만원 남짓한데, 1억을 대출받아 이자 내고 원금 갚고 부모님 드리면 남는 게 없잖아요. 누나가 조사받다가 목놓아 웁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이 많다고 결혼하라고 잔소리하지 말 걸 그랬다'고요."
"사실대로 말했으면 신부 집에서 충분히 도와줬을 텐데…. '남자라면 당연히 집을 책임져야 한다'고 끝까지 혼자 고민하다 결국…."(친구 B씨)
정씨의 부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2년 열애 끝에 결혼한 아내에게 정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는 "미안해. 정말 미안해. 행복하게 살아줘" 였다.
일반 운석은 1g당 2-3달러(약 2천200원-3천300원) 정도의 가치지만, 팰러사이트의 운석은 1g당 30-50달러(약 3만3천원-5만6천원)라 합니다..대략 10배는 비싼 가격입니다. 하지만, 팰러사이트는 석철 운석의 일종으로 미국 내에서도 드물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운석은 쪼개보면 알 수 있는데요..
한쪽을 쪼개보면 감람석이라 불리는 초록빛 광물에 철제 니켈이 초콜릿 과자의 초콜릿처럼 박혀있는 아름답고 독특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8월의 탄생석의 하나인 감람석은..
이브닝 에메랄드라고 불리기도 하고.. 페리도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부부의 행복, 친구와의 화합 등을 의미하는 아름다운 보석..
왜 비싼지 알 수 있군요....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달동네의 재개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낡은 것을 부수고 철거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능사일까요?
새롭게 만든다.. 좋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벌어도 새집을 마련한다거나 .. 집을 새롭게 꾸미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당연히 국민 모두의 세금으로 그들에게 새집을 지어준다거나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이런 달동네에.. 아파트에서 얻는 편리함을 응용해서 공공시설을 동네 가운데에 배치하면 어떨까요?
결국은.. 저런 공공시설이 들어서면 문제가 생깁니다.. 길이 생기고 저런 시설들이 들어설 위치의 선정도 그렇고.. 우선 그것들이 들어설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피해도 말입니다. .. 들어서고 나도.. 공공시설은.. 관리비를 내야 하는데. 징수하는 것도 쉽지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형평성 문제가 생기고... 특히나 오픈형태이기 때문에 외부인들의 이용에 의해서 관리도 쉽지가 않고 보수 유지비가 높게 나올 것입니다..
결론적으로...개발을 위해서는 다수의 피해자냐.. 소수의 피해자냐의 문제 일뿐... 어느 쪽의 희생이 없이는 더 나은 삶이나 환경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관에 도색만 예쁘게 하면 해결될까요?
글쎄요....
감정초교 앞 감천고개에서 내려다본 감천동 정경. 건물 외벽에 곱게 칠한 푸른색은 어느덧 조금씩 빛이 바랬다. 하지만 오밀조밀 모여 붙은 집집마다 가난하되 인정 많은 산동네 주민의 삶이 배어 나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들이치는 봄날. 행선지를 부산으로 정한 건 한 장의 흑백사진 때문이었다.
어느 산동네 사진이었다. 다랑논처럼 좁고 긴 단층집 수십 채가 다닥다닥 산비탈을 메웠다. 그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유일한 단서는 사진 옆에 적힌 '부산, 1957'이란 메모뿐이었다.
누군가 사진 속 장소를 일러줬다. 1957년 부산시 사하구에 형성된 '태극도 마을'. 지금은 '부산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감천동 문화마을이었다. 부산 토박이인 그가 구수한 사투리로 설명을 보탰다. "부산에는 산동네가 엄청 많데이. 한국전쟁 때 전국에서 온 피란민이 다 이런 데서 살았다 카더라."
감천동이 지금 모습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건 1957년 즈음이었다. [부산시 제공]시계 태엽을 1950년 여름으로 되감았다. 경기도에서, 충청도에서, 멀리 이북에서 보퉁이를 이고 진 피란민이 꾸역꾸역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금세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3년이나 이어졌고, 포격에 떠밀려온 피란민에게 부산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피란민은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 몰렸다. 국제시장에는 부산항을 거친 온갖 물건이 드나들었다. 자갈치시장 일대 크고 작은 어시장은 늘 일손이 모자랐다. 적어도 시장에선 굶어죽을 걱정은 적었다. 시장이 밀집한 중구는 주변에 산이 많았다. 시장에 삶을 내맡긴 피란민은 자연히 산동네 주민이 됐다. 얼기설기 세운 판잣집은 산을 타고 꾸역꾸역 기어올랐다.
"부산은 8부능선까지 전부 동네지예."
부산에서 만난 이북 피란민 2세의 말이다. 그는 50여 년 전 실향민이 된 부모를 따라 부산에 왔다. 그가 다섯 살 되던 무렵이었다. 그의 가족은 동구 범일동 안창마을에 정착하는가 싶다가, 다시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옮겨갔다. 산동네에서 산동네로, 남루한 삶이 계속됐다. 새벽녘 산동네 사람들은 별빛에 의지해 시장에 나갔다가 하루 해가 저물어야 가까스로 허리를 펴며 비릿한 한숨을 내쉰다.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태반이 60대 이상 노인이다.
그러나 감천동 문화마을은 입구부터 거대한 갤러리 같았다. 신진 작가의 재기발랄한 벽화며 설치물을 3년 전부터 조화롭게 배치한 덕택이다. 그러면서도 거미줄처럼 얽힌 사통팔달(四通八達) 골목과 공동우물 등 마을의 옛 모습은 훼손하지 않았다. 감천동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부산 산동네는 지금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구봉산~구덕·천마산~엄광산 중턱을 잇는 산복도로(山腹道路) 주변이 생기를 되찾고 있다. 산복도로는 부산 달동네에 난 길을 이은 산 중턱의 도로로, 부산에서 산동네를 상징하는 길이다. 지난해 시작된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도 제2, 제3의 감천동 문화마을을 조성하겠다는 부산시의 의지다. 10년에 걸쳐 산복도로 전체를 문화관광 명소로 가꾸겠다는 다부진 포부가 담겨 있다. 부산의 달동네를 여행하는 건, 부산의 살아있는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