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분쟁은 조정되고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틀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를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법과 그 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을 정치라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도 위로부터의 통치만을 정치로 보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항쟁 및 그 밖의 활동도 정치라고 본다. 다만 여기서는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파악하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⑵ 이에 반하여 정치는 국가만으로 한정되는 인간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생활의 제(諸)형태, 이를테면 회사·노동조합·교회·학교·가정 등 어디에서나 발생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해 나가는 통제의 작용도 모두 포함한다는 견해가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관계를 거번먼트(government)라 하여 국가는 공적인 거번먼트인 데 대하여 그 밖의 것은 사적인 거번먼트라고 설명하고 있다.
⑶ 정치를 모든 대립을 조정하고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시키는 작용으로 보는 점에서는 ⑴·⑵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특히 사회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항쟁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활동을 정치의 본질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것에 따르면 자기편에게는 가장 우호적인 단결과 협력을 제공하고 상대편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곧 정치의 형태이며, 정치는 스스로의 의지에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상대방을 통제하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질서를 유지·강화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자연히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⑷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정치를 계급적 시각에서 고찰하고 있다. 국가는 특정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권력기관이며, 국가의 통치는 적대적인 여러 계급의 저항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권익에 필요한 질서를 유지·강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모든 대중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부단히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다양하고도 조직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이러한 지배와 저항을 본질로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⑴ 고대국가:정치는 일반적으로 인류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원시사회에 이미 권력적인 지배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사회가 빈부의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발전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회질서의 유지가 공권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정치현상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대국가가 최초의 정치형태이며 거기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였다. 데모크라시(democracy)가 태동된 아테네에서도 노예는 전혀 권리를 갖지 못하고 단지 노동을 통하여서만 사회생활이 가능하였다. 민주주의는 비교적 부유한 자유시민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노예 및 농민대중의 반란은 고대국가의 정치불안의 요소로 항시 존재하였다. 이를 외부에 대한 정복으로 해소하려는 의도 때문에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Politica》에서도 정치의 목적은 최고선(最高善)에 있고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긍정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계급의 철학과 함께 거대한 부(富)를 축적하여 막강한 권위를 가진 교회의 교의(敎義)가 피치자의 순종을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대국가의 형태는 아테네의 민주제, 스파르타의 귀족제, 이집트·바빌로니아·페르시아 등의 군주제, 로마의 공화제 등 수많은 형태가 있었으나, 민주제·공화제를 제외하고는 그나마도 대부분의 정치체제가 피치자인 일반대중의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권리보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⑵ 봉건국가:봉건국가에서는 이미 능률성을 상실한 데다가 반란을 자주 일으키는 노예들로 인하여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으므로 농노제(農奴制)로 옮아 갔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수의 귀족(대지주)에 의하여 행사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군사·재판·일반행정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교회 또한 광대한 교회령(敎會領) 내에서 재판권을 가지고 때에 따라서는 군사력까지도 소유하여 일개의 봉건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봉건제에서 특이하게 나타나는 신분차별적인 지배체제와 전제정치는 교회와 중세기 신학의 역할로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⑶ 절대주의국가:봉건제 속에서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 발달하여 도시 중심으로 성장한 시민계급이 사회의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농민대중의 반항은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져서 봉건국가가 동요하게 되었다. 영주·귀족 상호간의 이기적인 야심과 영토확장을 위한 투쟁은 대중의 희생과 불만을 증대시켰고, 봉건영주의 재정을 궁핍하게 하는 동시에 신흥시민계급의 경제적·사회적 세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봉건적 권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강력한 절대군주가 나타나 시민계급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대신 그들의 경제활동을 보호하며 관료기구에 그들을 등용하였다. 따라서 절대주의국가는 절대군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관료적 전제지배, 상비군의 강화, 상품생산과 교환의 육성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여기서도 피치자인 대중은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N.마키아벨리의 《군주론》, J.보댕의 《국가론》, T.홉스의 《사회계약론》 등은 모두 이 절대군주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사상이었다.
⑷ 근대국가:도시 수공업 및 상업의 발전, 시민계급의 성장, 해외항로의 개발과 식민지 획득 등으로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봉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근대 민주주의혁명은 부르주아지를 봉건적인 사슬로부터 해방시킨 혁명이었다. 봉건제 내부로부터 성장한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이나 매뉴팩처(manufacture:공장제수공업)는 대규모의 공장생산으로 전환하였다.
자유경쟁원리하에서 모든 상업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자유평등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인 정치사상이 되었다. J.J.루소나 J.로크의 《사회계약론》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등장이 시민사회질서에 적응하는 정치체제의 이론이었다. 자본주의사회의 발전은 국민주권주의의 원리에 입각한 근대헌법제정을 가져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부(富)의 축적과 노동자의 궁핍,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 따른 경제공황을 초래하여 자본주의의 약점을 노정(露呈)시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발표되어 사회주의의 혁명이론 및 그에 따른 정치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자본주의를 대체하지는 못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의 개입으로 경제의 민주화 ·사회화를 이룩하려는 정책이 자본주의 각국에 널리 채택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현대정치는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모순의 해결을 근본적인 과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모든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의 독점적인 자본주의 경제조직, 권력체제와 국민대중의 생활권 및 그 밖의 기본권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기초 하에서 선진제국이 전 지구상에 설정한 식민지, 종속국의 독립과 이미 지구의 3분의 1을 점한 사회주의 국가의 대두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변화된 국제정치의 장에서 어떻게 국제평화를 달성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끊임없는 세계적화야욕과 전쟁의 가능성 속에서 인류를 절멸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핵무기의 위협을 전 인류가 느끼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 오늘날 국제관계 속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국가 간의 무력적 충돌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노력이 창의적 정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가끔 친구와 의견이 달라 말다툼을 할 때가 있지? 맛있는 케이크를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종종 다툼이 생기게 마련이야.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이 정치야. 정치란 생각의 차이나 다툼을 해결하는 활동을 말해. 정치는 어른들만의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거라고.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일이고, 나랑은 관계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아. 정치에 대해 알고 나면 정치가 좋은 세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다툼을 해결하는 활동, 정치 사람들 사이에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혹은 다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결하는 활동을 ‘정치’라고 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엔 수많은 갈등1)이 생겨나.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자기 의견만 주장하면 사람들 사이도 나빠지고 사회도 어지러워질 거야.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꼭 필요해.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다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결하려는 활동이 정치다.
좁은 의미의 정치와 넓은 의미의 정치 ‘정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제일 먼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르지? 이 사람들을 ‘정치가2)’라고도 하니까. 그렇다면 정치는 정치가들만 하는 것일까? 정치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정치가들이 나랏일을 한다고 할 때는 정치를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거야. 정치를 나랏일과 관련된 활동으로만 보기 때문이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하는 일이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정치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할 때는 꼭 나랏일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가정에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정치를 하고 있어.
아직 정치가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고? 정치가 내 주변과 내 생활을 바꾸고 있다는 걸 알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 그럼 정치가 우리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리 주변에서 한번 찾아볼까?
좁은 의미의 정치와 우리 생활 우선 좁은 의미의 정치는 국가와 지역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활동이야. 예를 들어 쓰레기 처리장3)을 우리 마을에 지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 같은 것 말이야. 만약 쓰레기 처리장을 우리 마을에 짓기로 결정한다면 우리 마을의 모습이 바뀌게 되겠지. 이밖에도 정치를 통해 쌀을 외국에서 수입할지 말지, 고속 철도를 건설할지 말지 등을 결정해. 만약 쌀을 수입하기로 결정한다면 논농사를 짓는 우리 집의 소득이 줄어들 거야. 만약 고속 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면 명절 때마다 고향집에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겠지. 이처럼 정치는 우리 주변과 우리 생활을 바꿀 수 있어.
정치는 우리 주변과 생활을 바꾼다.
넓은 의미의 정치와 우리 생활 넓은 의미의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어. 교실 청소를 누가 할 것인가를 정하는 학급 회의도 정치의 한 예야. 학급의 반장이나 회장을 선출하여, 학교 전체 회의에서 학급을 대표하게 하는 것도 정치에 속하지. 그뿐 아니야. 정치는 우리 동네나 우리 집에도 있어.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반상회, 가족 여행지를 결정하는 가족 회의도 넓은 의미의 정치라고 할 수 있어.
정치는 생각의 차이나 다툼을 해결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정치 - 갈등을 해결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초등사회 개념사전, 2010.7.12, (주)북이십일 아울북)
특별 인터뷰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
수백명의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반세기 가까이 경남 거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다져온 전성은(70) 선생을 만났다. 인터뷰는 10일 오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의 거고 농장에 있는 전 선생의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전 선생은 경남 거창고의 4대 교장이다. 1956년 거창고를 인수해 일으켜 세운 아버지 전영창(1916~1976) 전 교장의 뒤를 이어 41년간 거창고와 샛별초등학교, 샛별중학교에서 교사와 교장 생활을 했다.
전성은 교장이 학생들한테 가르친 거창고의 ‘직업선택의 십계’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등은 성공을 교육의 최우선 목표로 하는 한국 교육계에 큰 울림을 줬다. 그가 메디치 출판사에서 펴낸 ‘교육 3부작’ 시리즈는 한국 학교 교육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권 <왜 학교는 불행한가>(2011)와 2권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2013)에 이어, 완결편인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가 최근 발간됐다.
2003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전 선생을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20년간의 장기 교육계획을 세우고 2년 만에 위원장직을 내려놨다. 노 전 대통령은 훗날 “전 선생님의 말씀대로 교육개혁을 했으면 우리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해졌을텐데 그 방향으로 과감하게 나가지 못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전 선생은 현재 비영리 봉사 단체인 ‘하나를 위한 음악 재단’과 ‘사랑의 빛’ 재단 이사직을 맡고 있다.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힘을 쏟고 있다.
“얼마 전에 케이비에스(한국방송) 세월호 참사 특집 프로그램을 봤는데, 우리 모두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 부처님이 하실 말씀이지 언론이 할 말이 아니에요.”
노무현 정부 때 교육혁신위원장을 지낸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이 무겁게 입을 뗐다. 2006년 현역 은퇴 뒤 ‘교육 3부작’ 집필과 성경 번역에 몰두해 왔으나, 교육계의 큰 어른으로서 보수 언론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모두의 책임론’을 쏟아내는 걸 지켜볼 수 없어서다. 전 선생은 정의와 불의, 참사의 역사적 해석, 종교와 교육, 지방선거 투표 같은 난해한 문제들을 작심한 듯 엮어 ‘권력집단 책임론’으로 뀄다.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 들어서고, 정의롭지 못한 기업이 판치고, 종교와 교육마저도 성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그 죄, 그 업의 결과가 참사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참사를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학계·언론 엘리트들이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행동할 때라는 조언을 빼놓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가 충격과 분노, 자책에 빠져 있는데요.
“나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돈은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돼 있어요(마태복음 6장).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면 정의예요. 건강한 사회, 사람이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사회, 서로 공존하는 사회가 되려면 도덕이 하나 필요해요. 그 도덕의 이름이 정의인 거예요. 다른 도덕들도 필요하지만 정의가 무너지면 소용없어요. 어떤 의미에선 정의만이 유일무이한 도덕이에요. 다른 것들은 덕목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아요. 그리고 돈을 추구하면 정의는 무너지게 돼 있어요.”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된 선박 사용 연한 연장이나 ‘언딘’으로 상징되는 구조작업 민영화 등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한국 사회의 병폐인 물신주의가 한꺼번에 폭발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경제성장을 신처럼 떠받드는 한국 사회는 ‘정의 없는 세상’이에요. 정치의 목적은 정의 구현이에요. 경제의 목적은 공정한 분배에 있어요. 문화의 목적은 개인이 삶의 기쁨과 신비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예요. 그런데 부는 특권계층에 몰려 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사느라, 아파트 하나 장만하느라 젊은 시절을 다 보냅니다. 이건 정의가 아니에요. 경제성장은 정의를 추구하다 부산물로 얻어질 때에만 건전한 건데 인권까지 희생하고 얻어지는 경제성장은 망국의 길이에요.”
-우리 사회에 대형 참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건 왜일까요?
“참사를 역사적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해요. 우리는 멀게는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서도 ‘한 사회를 지탱해주는 가치가 정의이고, 정의가 무너지면 망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다 4·19 때 독재정권에 맞서 먼저 피흘린 사람들은 청계천 거지들과 학생들이었고, 애들이 정의를 바로 세우려던 걸 군홧발로 짓밟고 박정희 군사정권을 탄생시킨 게 어른들이었지요. 유신체제 이후 애들이 끈질기게 감옥도 가고 사형 선고도 받고 그러다 문민정권이 들어서나 싶었는데, 4·19를 짓밟은 자의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든 게 이 나라 어른 세대예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 화재 같은 인재는 세월호 침몰과 마찬가지로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참사예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수사를 통해 원인을 밝혀야죠. 하지만 국민적 차원에서는 참사를 역사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해요. 씨랜드 참사 때, 컨테이너 건물에서 유치원생들이 타 죽었는데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그 피해를 이번에 다시 아이들이 입은 거예요.”
-결국 정의 없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였다는 뜻인데, 그런 사회를 만든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건가요?
“당연히 경제성장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정한 정치·경제·학문·종교·언론 엘리트들의 몫이에요. 이 책임을 우리 모두한테로 돌리면,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권력집단의 잘못을 교묘히 감추게 돼요. 종교적으로 우리 모두 회개하자고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적·종교적으로 볼 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분석해야 해요.”
-세월호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처럼 대형 참사의 원인을 ‘기업의 탐욕’에서 찾기도 하는데요.
“나는 반대해요. 청해진해운을 법적으로 처벌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에요. 철저히 밝혀서 처벌받을 사람은 받아야죠. 다만 권력집단의 네트워크가 부의 편중을 추구하다 보니까 이런 결과가 초래됐다는 걸 알아야 해요. 기업의 무한 이윤추구 경쟁이 문제라고 해버리면, 그 가치를 결정하고 또 그걸 막지 않은 ‘네트워크화된 권력집단’에 책임을 안 묻게 돼요.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게 되는 거예요.”
온 국민이 자책감 느끼고 있지만 ‘모두의 책임’이란 말엔 동의못해 ‘기업 탐욕’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권력집단의 책임 면하게 하는 꼴
경제성장을 신처럼 떠받들게 한 권력집단이 정의없는 사회 만들고 그 사회가 세월호 등 잇단 참사 불러
정의·불의 구분법 가르치는 종교 정책이 미치는 영향 가르치는 교육 두 기둥 바로 서야 ‘정의 사회’ 가능
유족 고통 함께 슬퍼하는 것 넘어 사회문제로 승화시키는 공감 필요 선거로 함께 공감하고 책임 물어야
-정의가 바로 선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종교와 교육은 한 사회에 정의를 세우는 두 기둥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둘 다 제구실을 못하고 있어요. 종교는 한자로 으뜸 종(宗)에 가르칠 교(敎)예요.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큰 가르침이에요. 종교에서는 불의를 죄라고 해요. 기독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천국에 못 간다, 불교에서는 극락에 못 간다고 해요. 하지만 박정희 시대부터 교회도 절도 성장과 성공을 신으로 섬겼어요. 지금도 성장·성공에 저항하면 대형 교회, 대형 사찰이 못 되지요.”
-다른 한 기둥인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제도교육은 유사 이래로 지금껏 권력의 시녀였어요.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힘을 합쳐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뭔지를 선언하는 게 학교교육이에요. 일제 때는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는 게 학교교육의 목적이었어요. 이승만 정권 때는 반공, 박정희 정권 때부터는 반공과 경제성장이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교육의 목표들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자아완성, 인격형성, 인재양성 모두 문제가 있어요. 자아완성이란 원래 나와 가족을 넘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완성’인데,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 때 자아완성이라는 개념이 들어왔어요. 그걸 성공으로 착각해요. 학교에서 인격과 정신을 교육하면 안 되고 종교에 맡겨야 해요. 역사적으로 학교의 정신교육은 일제 때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들었고, 군사독재 땐 국민교육헌장을 가르쳤어요. 인재양성이라는 건 권력이 부려먹을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거예요. 1명의 인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10만명이 뼈빠지게 1명을 먹여살리는 거예요.”
-교육 목표가 잘못됐다면 현행 교육정책도 문제가 있을 텐데요?
“서울대 갈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대신 고급 노동자가 될 수 없는 조건의 아이들을 책임지는 직업교육이 최우선시돼야 해요. 법대 가고 의대 가는 시험 잘 보는 아이들, 부잣집 아이들은 국가가 걱정 안 해줘도 알아서 잘살아요.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어요. 아울러 학교에서는 ‘지적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해야 해요. 지적 능력이란 학문할 능력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권력집단의 정책이 자신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가릴 수 있는 판단 능력이에요.”
-종교와 교육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의는 어떻게 세울 수 있나요?
“연대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요. 다만 지난 10년 가까이 이른바 진보 진영, 민주화 진영을 지켜보면 연대가 잘 안 보이긴 했어요. 권력집단은 네트워크화가 잘 돼 있고 말 안 해도 서로 다 알아서 해요. 케이비에스가 굳이 말 안 해도 지방선거에 영향을 덜 끼치도록 세월호 참사를 보도해야 한다는 걸 아는 것과 같아요. 그에 맞서 우리는 네트워크화가 아닌 연대를 해야 해요. 예를 들면 월급을 굉장히 많이 받는 정규직 노동자 집단이 있고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집단이 있다고 쳐요. 한 사회가 생산한 결과물이 균등하게 돌아가는 걸 공공의 이익이라고 할 때, 연봉이 많은 노동자들이 양보하는 게 연대예요. 권력집단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해도 네트워크만큼은 절대로 안 깨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정의를 갈망하는, 정의가 필요한 세력은 그게 잘 안돼요. 물론 그게 잘 안되니까 신이 필요하겠지요.”
-세월호 참사로 전국민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우려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번 참사를 보며 가슴 아파해요. 다들 타인의 고통을 알아요. 그 고통은 도둑놈도 느끼고 살인자도 느끼고 다 느껴요.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개인적으로 느끼는 타인의 고통을 감정적으로 표출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사회적 문제로 승화시켜야 해요. 타인의 아픔에 사회적으로 동참하는 것, 그것이 공감이에요. 마음이야 최종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왜 안 아프고, 유족 앞에서 라면을 먹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왜 안 아프겠어요. 먼저 회개와 자성을 하고 그걸 사회화해야죠.”
-‘공감의 사회화’ 방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책임을 묻는 방법은 선거예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제를 안다고 해서 유권자들이 엄청 찍어줬잖아요. 그 결과가 이거예요. 경상도는 경상도당, 전라도는 전라도당, 충청도는 충청도당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갖다놔도 뽑아줘요. 이건 정의가 없는 세상이에요. 무엇이 정의인지 가르치는 종교도 없고, 무엇이 자기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가르쳐주는 교육도 없는 사회예요. 나는 교회에서 설교할 때 표 한번 잘못 찍으면 지옥 간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거든요.”
거창/글·사진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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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필자 본인이 종이 사전, 그것도 국어사전을 굳이 한번 들여다보겠다고 나선 것은 ‘무하마드 깐수’라 불렸던 정수일(78)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가 국어사전하고 무슨 상관일까?
그는 한국어를 똑바로 쓰려고 간첩으로 수감돼 감옥에 있는 동안 2000쪽이 넘는 국어사전을 매일 대여섯 쪽씩 1년 3개월 남짓 읽어 독파했다고 한다. 모 신문기사의 이 사실은 필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명색이 글을 쓴다는 기자로서 근본적으로 한 명의 한국 사람으로서 말이다.
요즘은 대부분이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이나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주로 이용하고 있어 종이사전은 더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종이 국어사전들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민중서림과 두산동아 현재는 이 두 출판사가 시장을 거의 양분하고 있다.
▲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은 네 종류로 다양한데, 비닐(PVC)과 가죽장정, 특장판, 특수장정이 있다.
내용은 모두 같지만 이렇게 외형을 다양하게 만든 것은 사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용도별 필요에 따라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특수장정은 성경책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선물할 수 있게 제작됐고, 특장판은 노인 등 작은 글씨를 보기 힘든 사람을 위해 크게 책상용으로 만들어졌다. 크기가 같은 비닐(PVC)과 가죽장정은 사람들이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내지는 어떤 종이가 쓰일까? 바로 주로 쓰이는 박엽지다. 사전 내지는 무게가 덜 나가고 얼비치지 않고 잘 찢어지지도 않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신경 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제일 비싼 종이인 박엽지가 사용되는 것이다.
수록된 내용은 앞의 일러두기와 뒤의 한글 맞춤법, 문장 부호 등 부록 외에 표제어 153,909개, 파생어 등 부표제어 3,803개, 관형구 2,783개로 총 160,495개로 이루어졌다.
현재 제6판까지 개정된 상태인데, 개정할 때는 국립국어원 자료 등을 참고하거나 사전 편집부에서 서점을 방문해 분야별 신어를 수집하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며 이를 수정 보완해 반영한다.
▲ 두산동아 ‘새국어사전’
두산동아 ‘새국어사전’은 형태가 두 가지인데, 장년층과 노년층 등 글자가 크고 시원스러운 사전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탁상반달색인과 탁상색인으로 나뉜다.
또한 사전 내지는 민중서림과 같은 박엽지를 사용하고, 표제어는 약 15만 3천 개가 수록돼 있다.
특히 두산동아는 2004년 개정판 제5판을 발간한 이후 매해 수정판을 펴내고 있는데, 중요 신어 추가, 국립국어원의 여러 사항을 반영해 표준국어대사전 국악 관련 전문어 정비 사항을 반영한 전문어 수정과 표준어 39개 추가 인정 사항을 반영하는 등 매해 수정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 2012년판은 주로 2011년에 추가 인정된 표준어 39개를 반영해 펴냈다.
두산동아 어학콘텐츠팀 정병호 차장은 “언어와 문자는 그 나라 문화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므로, 국민들이 좋은 국어사전을 늘 가까이 두고 이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믿음직하고 안정적인 종이사전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말 기반을 닦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무하마드 깐수’가 정수일이 되기 위해 괜히 국어사전부터 펼쳐 들었겠는가?
"한자어를 한자로 적지 않으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한글로만 생활하는 국민 대다수가 사실은 문맹이다."
초등학교 한자교육이 '부활'할 조짐을 보인다. 지난 2월 새누리당 일부 국회의원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내놨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초등학교 교과서는 20년 전으로 돌아간다.
한글학회나 국어단체연합,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단체들은 '한자 숭배자들'이 초등학생들의 어깨에 한자 암기라는 짐을 얹으려 한다고 쓴소리를 냈다. 낱말을 한자로 적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고 이미 충분히 한자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 우리말에 한자어가 70%? 실질적 사용은 절반도 안돼
한글단체들은 한자 혼용론자들의 주장에는 '잘못된 상식'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속설은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라는 것이다.
한글단체들은 국립국어원이 간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51만여 개 낱말을 조사한 결과 한자어 비중은 57%였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에도 사전에만 실렸을 뿐 일상생활이나 전문 분야에서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 낱말이 수두룩해 실질적인 비율은 더 낮다는 설명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를 보면 우리말의 낱말 사용 비율은 토박이말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였다.
한글단체들은 1920년 조선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사전'에서 '한자어 70%' 뿌리가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당시 침략자들이 사전에 토박이말을 30%만 싣고 나머지는 한자어로 채웠다는 설명이다. 당시 낱말들이 솎아지지 않고 표준국어대사전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반면 한글학회가 1957년 완성한 '큰 사전'에는 토박이말 47%에 한자어는 53%정도다. 이를 다시 '우리말 큰사전'으로 정리하고 있는 한글학자 정재도씨에 따르면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를 버릴 경우 그 비중은 30%로 줄어든다.
◇ 신문·교과서 한자 없이도 이해 술술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박사)
2004년 국한문 혼용 문장의 최후 보루였던 서울대학교 '대학국어'가 한글 전용으로 바뀌면서 교재에서도 한자가 사라졌다. 신문 등 매체에서도 한자를 쓰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한자의 벽에 부딪히는 일은 줄어들었다.
한글단체들은 낱말의 의미는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나 '다의어'로 인한 혼동도 거의 없어 한자를 함께 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사장님이 사기를 당해서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와 같이 이미 문장 속에서 낱말의 의미는 부여된다.
이들은 또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한자어로 분해해 어원을 밝히는 등 교육 방식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발달심리학자 피아제의 발단 단계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하며 중학교 이후에나 급속히 발달하는 영역이다.
또 현재 중학교 95%에서는 한문을 가르치고 있고 2009년 새 교육과정부터는 초등학교 정규 과목인 '창의적 체험활동'에 한자 과목을 추가되면서 이미 절반 이상의 초등학교에서 충분히 한자를 배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요즘은 유치원에서도 한자 급수 시험을 강요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며 "교과서에 한자를 집어 넣으면 한자 사교육이 요동칠 게 뻔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한자를 익히고자 한다면 학생 개인이 꾸준히 암기해도 될 것"이라면서 "굳이 우리의 문자 생활을 과거를 되돌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최초로 직접 편찬한 국어사전이 나온다. 1992년부터 사전 편찬에 착수한 국립국어연구원은 사전 편찬 사업을 마무리하여 10월 9일 표준국어대사전 상권을 발행한다. 발행처는 두산동아이다. 나머지 중권과 하권은 11월 말에 나온다.
이 사전에는 표준어를 비롯하여 북한어, 방언, 옛말 등 50여만 단어가 수록되어 지금까지 나온 사전 중에서 가장 많은 단어 수를 보이고 있다(전문어 190,000, 북한어 70,000, 방언 20,000, 옛말 12,000. 중복 단어는 각각 계산). 전체 면수는 7,300여 면으로 기존의 대사전과 비교하면 최대 두 배 정도이다. 200여 명에 이르는 박사 과정 수료 이상의 국어국문학 전공자가 집필과 교열에 참여하였으며, 전문어는 따로 120여 명의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감수를 받았다. 8년 동안 500여 명의 인원이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12억 원(국립국어연구원 92억 원, 두산동아 20억 원)의 예산이 들어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루어진 사전 편찬 작업 중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 원칙만을 정하고 있는 현행 어문 규정을 구체화하였다. 그동안 기존 사전들이 표기나 표준어 판정에 적지않은 차이를 보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국립국어연구원은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등 현행 어문 규정에 정해진 원칙을 구체적인 단어 하나하나에 적용하여 단어를 사정하고 사전에 제시하여 사전을 찾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였다.
둘째, 북한어를 대폭 수록하였다. 북한에서 1992년에 간행한 조선말대사전을 참고하여 북한에서만 쓰이는 말뿐만 아니라 남북의 어문 규정의 차이로 북한에서 달리 표기하는 단어들까지 실었다. 단어의 표기가 남한의 어문 규정과 다를 때는 남한식 표기 정보도 제시하였다. 한민족의 언어적 동질성 회복을 위한 토대 마련에 한걸음 다가선 것이다. 예) 가갸시절, 가계사1, 가공라선로, 가급, 가까운갈래, '가난'의 속담
셋째, 예문을 풍부하게 제시하였다. 예문이 부족하다는 점은 그동안 우리 국어사전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었다. 연구원에서는 5,000만 어절 분량의 자료를 입력하여 이를 편찬에 활용하면서 많은 단어에 용례를 제시하였다(어절은 띄어쓰기로 구분하는 각각의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소설책 한 권은 보통 5만 내지 6만 어절 정도 된다). 예) 가게채, 가경4, 가계3, 가근방, 가긍하다
넷째, 단어의 쓰임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용언과 어미가 결합할 때 변화하는 모습인 활용형을 모든 용언에 제시하였다. 또한 체언과 조사가 결합하거나 용언과 어미가 결합하여 발음이 바뀌는 경우에도 그 정보를 제시하였다. 대사전으로는 처음으로 각 용언이 어떤 문장 구조를 이루는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모든 용언에 제시하였다. 예) 가녘, 가는잎할미꽃 / 가꾸다, 가꾸러지다, 가깝다 / 가급적, 가공하다3 / 가하다1, 가깝다, 가꾸다, 가누다.
다섯째, 어원 정보를 보완하였다. 17세기 이전에 간행된 옛날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의 모습과 그 출전을 제시하였으며 현대 국어에 이르기까지 변천도 함께 제시하였다. 예) 가1, 가까스로, 가깝다, 가꾸다, 가냘프다
여섯째, 정부 조직 개편 등 1999년까지의 최신 정보를 수록하였습니다.
일곱째, 단어 뜻풀이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10,000여 점에 이르는 컬러 삽화를 제시하였다.
또한 부록으로 기본 단어 중심의 용언 활용표, 로마자 순서로 정리된 외래어 표기 목록 및 학명 목록을 수록하여 이용자가 한글 표기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국립국어연구원은 앞으로 사전 편찬을 위해 만들었던 지침과 사전 편찬 과정을 정리한 백서를 발간하고 사전 편찬 중에 확보한 자료를 공개하여 국어사전의 편찬 기반을 넓히는 데도 기여할 계획이다.
국립국어연구원과 두산동아는 사전 발간을 기념하여 10월 9일 세종홀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출처-http://www.korean.go.kr/search/dictionary/Dic.html>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 2002년 02월 10일 정가 : 270000원 판매가 : 270000원 훈민정음 반포 이래 국가가 만든 최초의 국어 규범사전
표준국어대사전 CD-ROM 두산동아 / 2001년 10월 09일 정가 : 100000원 판매가 : 100000원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을 CD 1장에 담은 표준 언어 생활의 지침서
1992년 간행되었는데 편찬기간은 1967~1992년까지 약 25년이 걸렸습니다. <현대말> 3권과 <옛말과 이두> 1권, 이렇게 전4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큰사전(1957년)>에 우리말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반영한 사전으로, <큰사전>이 발간된 지 10년만인 1967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었습니다. 편찬체제는 '올림말-발음-씨갈래-뜻풀이-보기글-관계말-말밑(어원)'의 차례로 구성되었는데. 올림말은 시대적으로 현대말과 옛말 및 이두(吏讀)를 다루었습니다. 특히 옛말(일반어 및 지난 시대의 사회문화용어)과 이두는 따로 한 책(제4권)으로 만들어 앞서 발행된 <큰사전>과 <이조어사전(1964년)>의 내용을 새롭게 보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표준어와 비표준어로 구성하여 일반어휘와 전문용어 등을 두루 실었는데, 특히 많은 문학작품에서 '보기글'을 찾아 싣고 고전문학과 현대 문예작품에서 새 어휘와 사라져가는 남북한의 방언을 모두 검토하여 수록한 것이 큰 특징입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문화어(文化語)'도 대부분 수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전 4권을 따로 사시면 각 7만원(인터넷 판매가 6만 3천원)이고, 상하로 사시면 14만원 (인터넷 판매가 12만 6천원)입니다. (영풍문고 기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