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심리치료 자료

2013. 2. 1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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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1│제1강 - 서광 스님

<월간 불교와 문화>연재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으로 치자면 선수 과목과도 같은 것이고, 법회에서는 입정(入定)과 유사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법회에서는 대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법사 스님의 설법을 마음에 새기고 담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가끔은 마음을 비우는 것에 더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특별한 마음 자세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나로빠 대학을 설립하고 불교심리학과 불교심리치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쵸감 트룽빠() 린포체는 자신의 저서1)에서 불교 수행에 앞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자각하고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다음의 4가지 항목을 주장했다.

첫째, 인간 삶의 고귀함 : 우리가 불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복된 환경 조건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둘째, 죽음의 실재 : 죽음은 갑자기, 아무런 경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셋째, 업의 덫 : 선한 것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인과의 덫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넷째, 고통 :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일체 중생이 겪는 고통의 강도와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다.

사실 요즘처럼 마음이 힘들고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특히 온갖 불평등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삶의 존귀함을 명상하고 불법과 인연한 사실을 감사하는 일이 그다지 쉽게 와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즉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아차리고 자각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롭고 눈물나게 감사한 일인가를 체험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설사 사는 것이 힘겹고, 눈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이 현실에서의 삶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그 모든 현실적 문제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들 삶의 유한성,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은 갖가지 집착으로부터 우리들을 보다 자유롭게 해주고, 나아가서 인과의 덫을 볼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준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그러면 이제 실제적으로 그러한 명상을 실습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눈을 감고 허리를 편다. 편안하게 숨을 천천히 9번 들이쉬고 내쉰다.

우선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고,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 우주 안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지금 내가 그 가운데 인간의 몸을 받아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그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귀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들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즉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만간 이 몸을 떠나야 하고 이 마음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죽음이라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존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러나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상당히 운명적으로 갈등하고 괴롭고 두렵게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감, 자만심, 우월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심층에는 필연적으로 실존적인 고통과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엄청나게 분노하고, 화나고, 자존심 상하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며, 더러는 잘난 척하고, 더러는 못난 자신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그 엄연한 현실 앞에서는 이 모든 감정들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또 우리가 만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그들을 모두 용서하고 더 큰 마음으로 포용하고자 하는 연민심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사유와 명상은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찰나, 바로 지금-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순간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머물기를 바라는 부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명상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 한 나머지 서로 경쟁하고 질투함으로써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순간,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주변의 여러 인연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인연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도 사랑, 화해, 용서하는 마음을 보낸다. 힘겹게 삶의 짐을 지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질투, 괴로움, 미움, 사랑, 분노 등으로 짓눌린 우리 자신의 어깨를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감싸면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의 행복, 성장, 사랑을 위해서 시방에 상주하신 불보살님들의 가피를 구하면서 기도한다.

내가 누구라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아집을, 그 자만이나 에고(ego)를 내려놓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것, 내가 배운 것과 생각하는 것 전부를 내려놓고 아주 편안하게 머문다. 모른다는 불안감과 많이 안다는 자만심, 해야 할 일, 떠오르는 인연들에 대한 생각도 잠시 내려놓는다. 불법을 공부하는 이 순간의 공덕으로 우리들의 삶이 보다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그 인연으로 앞으로 우리와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도 더불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다시 마음을 호흡을 가져가서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 번 깊이 들이쉬고 내쉰 후 조용히 눈을 뜬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 연기, 인연, 삼법인, 37조도법, 6바라밀, 10바라밀, 윤회, 중도, 유식, 업 등 셀 수 없이 많은 팔만사천 방편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그런 가르침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깨닫고, 우리 안에 내재화하고 체득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사수(聞思修)다. 문은 들을 문(聞) 자를 의미한다. 물론 듣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읽고, 쓰고, 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것 전부를 말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내용을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는 일반적인 명상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화두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무튼 계속 마음속에 담고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항상 들으면서 산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꽃을 봤다고 하자. 꽃이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감성을 터치했다. 즉 안의비설신의 가운데 우리의 감각을 건드렸든, 아니면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을 건드렸든 간에 우리의 주의가 발생했다. 그러면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다 불법과 인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주의, 자각하지 않았다면 그 인연은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지는 못한다. 보통 승가에서는 출가한 시기에 따라서 법랍을 정하고 그에 따라 위아래의 순위가 정해진다. 그런데 언젠가 법정 스님께서는 진정한 법랍은 출가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자각하고 알아차렸느냐를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실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자각하는 시간을 따지는 게 올바른 법랍이지 그냥 식물처럼 숨만 쉬고,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멍한 상태로 보낸 세월에 집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가 않다. 문사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들었다는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가 자각하고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것이 문(聞)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알아차린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명상을 하거나 화두를 드는 단계다. 순간적으로 주의를 주고 알아차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차린 내용이 잊히지 않도록 사유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기억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사유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알아차린 내용이 점점 명료해지고 예리하게 다듬어진다. 그런데 만일 듣고 보고 냄새 맡고 하는 과정 없이 그냥 무턱대고 사유만 하게 되면, 이는 휘발유도 공급하지 않은 채 계속 자동차를 몰고 가는 겪이 된다. 만일 열심히 수행한 결과로 망가진 육체와 고착된 사고, 관념을 얻었다면 그것은 필시 사유할 그 무엇도 없이 사유에 매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차린 것도 없이, 구체적인 사유의 대상도 없이 사유하게 되면 자칫 망상으로 흘러버릴지도 모른다.

세 번째 단계에서 사유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즉 우리의 몸과 말과 생각으로 실천하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드디어 우리 안에 체득되고 내재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부른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부처님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삼밀수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부처님을 쳐다보면서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그건 망상이다. 삼업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체계적인 교리적 이해가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 또 부처님의 뜻이 뭔지를 알아야 엉뚱한 것을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문사수의 세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신구의 삼업을 개선하고 수정해가야 한다.

신구의 삼업을 개선하고 수정하는 작업으로서의 수행은 반드시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개입되는 아집의 내적인 작용과 관련지어야 한다. 또 삶의 가치와 의미, 존재 방식, 삶의 태도라고 하는 큰 틀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노력이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흔히 무엇을 하든 중도에 그만두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하지만 수행만큼은 다르다. 비록 우리가 실감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수행은 언제 어디서 그만두든 조금이라도 시작하고 노력했다면 그만큼 효과가 있고 그 공덕이 수승하다.

쵸감 트룽빠 린포체가 제안하는 4가지 선수 과목을 바탕으로 문사수를 통한 올바른 수행은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인생이 더 충만해지고, 더 기쁘고 감사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돕는다. 나아가서 우리의 존재, 삶 자체가 보물이고, 선물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과 인간관계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채워지게 만든다. 그러한 열망은 다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함께 소통하도록 하고, 단절이 아닌 연결과 수용, 포용하면서 인간과 세상을 향한 경계가 무한히 확장되고 확산되는 연기적 세계, 연기적 존재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2│제2강 무아와 유아

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 교리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이 무아에 대한 통찰과 반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많은 가르침이 무아를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거의 관념적, 개념적 이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러한 노력의 과정은 무아가 아닌 유아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무아를 이해하기 위한 전 단계로 먼저 유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무조건 ‘나’를 부정하지 말고, 일단 ‘나’를 인정하고 무엇이 ‘나’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신생아로 태어났다.

아기가 ‘나(我)’라는 개념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단계는 자신의 몸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 ‘나’에 대한 개념이 있었던 게 아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 체험을 통해서 자기 몸과 자기 몸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나’라고 하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유식에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제8 아뢰야식으로 저장되고 그 저장된 경험의 내용을 보고 ‘자아’라는 의식이 제7 마나식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아의식은 우리의 신체를 환경과 분리하고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대소변을 갈아주고 배고프거나 졸리면 재워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엄마도 자신의 현실적 삶이 있는지라, 아기가 필요할 때 마다 제때 모든 걸 챙겨주지는 못한다. 그러면 아기는 불쾌함, 찝찝함, 아픔, 통증, 불편함 등이 일어나게 된다. 거기에서 정서, 감정이 발달되어 정서적 자아가 분화되어 나온다. 그러다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개념과 관념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켄 윌버(Ken Wilber)는 그것을 언어적 에고 마인드(verbal ego mind)라고 불렀다. 누군가가 자신을 예쁘다고 말하면, 예쁘다는 언어적 개념/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을 못생겼다고 말하면 못생겼다는 언어적 개념/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개념들과 이미지들을 누적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무수한 잠재적 감정들이 늘 부수적으로 뒤를 따르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자아의식(ego self-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언어의 발달과 함께 우리의 자아의식은 점차 관념적, 개념적 성격으로 변질되어간다. 그 결과 몸과 자아를 동일시했던 보다 본질적 자아를 망각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몸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자연히 자연과도 멀어진다. 왜냐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념과 개념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또한 느낌이나 감각에서도 멀어진다. 느낌이나 감각은 반드시 몸을 의지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아 개념은 우리와 환경을 분리하고, 모든 것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원성으로 차별 짓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과 연결된, 즉 더불어 함께 하는 모든 것들과 멀어지면서 실존적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체로, 하나로 있을 때는 외로움, 두려움, 공포감이 없지만, 분리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실존적 고독과 불안감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실존적 정체감의 위기를 불러온다. 실존적 정체감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 고독감, 존재의 가치, 목적 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혼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주를 통합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실존적 허무, 공허, 불안, 외로움으로 방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믿음, 종교, 사랑, 예술, 학문 등을 만나지만 궁극적인 안착, 방황은 삶과 존재에 대한 보다 높은 단계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교는 트랜스퍼스널 아이덴티티(Transpersonal Identity), 바로 자아초월적인, 뭔가 더 큰 세계, 더 큰 자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실존적 불안은 소아(小我)를 잡고 있기 때문에 대아(大我), 분리가 아닌 연기적 자아를 깨달을 때, 그러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출가해서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켄 윌버는 자아의 발달 단계를 전초아(prepesonal), 개아(personal), 초자아(transpersonal)의 3단계로 나누었다. 전초아는 자아가 아직 주변 환경과 분리되지 않은 무아의 단계고 그 후 점차 자기가 누군지 알아가면서 에고가 생기는 자아 단계로, 그리고 그 자아를 초월하는 단계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칼 융의 말로 바꾸면 삶의 전반부는 내가 누군지 찾아가고 나머지 반은 에고에서 해방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비합리적 단계, 합리적/이성적 단계, 초이성적 단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식에서는 전초아 단계에서 개아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아주 세밀하고 깊게, 그리고 확장해서 다루고 있으며 개아 단계에서 초자아로 나아가는 방법을 깨달음의 과정과 그 과정에 맞는 수행 방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아가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서 대충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왜 불교는 무아를 강조하는지 생각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 즉 감각적 경험이거나 정서적 경험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언어적, 관념적, 개념적 경험을 ‘나’와 동일시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로 개념화되어 있는 자아의식이다. 유식의 제7 마나식에 해당하는 개념화되고 관념화된 자아의식은 자아에 대한 교만함과 무지함, 고착된 견해, 자아중심적인 사랑이 그 특징이기 때문에 삶과 인간관계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통을 유발하는 근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그러한 자아의식이 진짜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우린 또 무의식적으로 그 ‘나’가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아는 그게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원래 ‘나’란 상당히 상호의존적이어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늘 변화하는 상대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무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 아(我)의 실체를 알게 되면 무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아를 이해하게 된다. 무아를 만약에 ‘이런 게 무아다’라고 고정해놓으면 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불교는 아(我)를 유아적 입장에서 4大(지수화풍), 오온(색수상행식), 18계(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와 같이 구성 요소적으로 파악해서 설명해준다. 한편 유식은 아(我)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능적 측면에서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고통의 뿌리인 개념적 관념적 자아의식을 깨뜨려주는 데 있다.

개념적 관념적 자아의식이 고통과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본질적 이유는 경험을 경험으로 두지 않고 소유권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각적 경험은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간에 감각 대상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항상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어지는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에게 감각이라는 경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한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앎이라고 하는 경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앎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을 했다면 사랑이란 경험은 사랑하는 나와, 사랑받는 대상이 있고, 이 둘은 서로에게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된다. 그런데 내 사랑이라고 못 박으니 사랑이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공동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경험 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나와 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내가 사랑받는 대상이 된다. 둘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인데 갑자기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이 각각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해버리니까 사랑이라는 경험이 사라지고 요구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엄청난 고통과 갈등, 망상, 분노가 생기게 된다.

독자 가운데 느낌, 감각, 생각, 기억, 정서(감정) 간의 관계를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감각을 영어로 하면 ‘센스(Sense)’다. 센스는 몸의 감각이다. 누가 몸을 꼬집을 경우, “아야” 하는 반응과 함께 통증이 일어난다. 아프긴 아픈데 꼬집은 사람이 사랑과 관심의 표현으로 꼬집었다면 아픔의 통각과 느낌은 있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상대방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심리적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 사람이다. 몸의 센스가 작용하는 동안 인지적인 작용이 일어나지 못하고 정서, 감정으로 폭발한 것이다. 심한 심리적 외상을 겪어서 정상적인 신경전달 체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반응하게 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어떤 사람은 쉽게 오해하고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는 분명 그 단어나, 사건, 아니면 그와 관련된 상황이 과거 어린 시절 좋지 않은 기억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분석 과정을 거쳐서 정보를 주고받지 못한다. 그 결과 정서 조절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 경우는 치료가 필요하다. 느낌은 정서에 비해서 신체 감각에 보다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몸에서 가까우면 느낌이고 생각에 가까우면 정서, 감정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정서, 감정의 뿌리는 생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과 함께 경험된 과거의 기억, 상처들로 인해서 우리는 자주 감정 조절에 실패하게 된다.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3│제3강 - 육바라밀

대승불교에서 이론과 실천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실천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실천 항목이다. 대개는 이들 항목들을 각각 독립적으로 수행에 적용하고 어느 한 가지 수행에 중점을 두고 실천한다. 그러나 이들 전체를 하나의 수행 차제로 이해하고 순서대로 닦아가는 것도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수행 단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육바라밀에서 첫 번째 단계인 보시바라밀을 시작으로 생각해보자. 보시는 흔히 베푸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포함된다. 주고받는 것이 물질에 해당하면 재시(財施)라 하고,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면 법시(法施)라 하고,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마음치료에 해당하면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그런데 보시하는 것이 어떻게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완성하는 제일의 길이 되는가? 그것은 보시의 궁극적 기능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최상의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베풀지 아니하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 영적 성장에 이르는 길은 없다. 왜인가? 베푸는 행위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약화시키고, 포기하는 무의식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나’라고 하는 대상의 범위를 자기 자신의 육신과 마음에 한정시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즉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서 주는 ‘나’와 받는 ‘대상’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적으로 깨달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시는 자신에게 집착하고 한정된 자아의식이 타자에게로 이동함으로써 확장된 자아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효과적이고도 신비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시하는 행위는 또 다른 보시바라밀을 낳고, 그 보시바라밀은 다시 또 다른 보시바라밀을 낳고…. 끊임없이 파생되고 퍼져나가는 엄청난 파급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에서 베풀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보시바라밀도 타자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움직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보시바라밀이 그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보시바라밀이 보시자의 아집을 떠나서 자아의식을 확장하고, 타자의 보시바라밀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 즉 삼륜청정(三輪淸淨)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보시하는 자와 받는 자, 보시물이 모두 깨끗해야 된다는 뜻이다. 깨끗하다는 말은 공적(空寂), 마음(자아의식)이 비어서 고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보시는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네 가지 번뇌, 즉 자만심, 자기중심적 사랑, 자기중심적 생각, 어리석음이 들어가지 않는 마음으로 할 때, 타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집착함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삼륜청정의 보시는 오직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우리들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솔직히 삼륜청정의 보시가 가능하다면 굳이 지계, 인욕, 등 나머지 바라밀들을 새삼 닦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은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두 번째 단계가 지계다. 육바라밀의 첫 관문인 보시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 진실하게 노력하다 보면 누구나 보시바라밀에는 반드시 지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보시의 대상, 조건, 상황, 정도, 방법 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익 되게 하고, 깨달음과 성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택의 준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주고받는 행위에는 반드시 절도, 즉 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세 번째 실천 항목은 인욕바라밀이다. 인욕(忍辱)은 말 그대로 참고 인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탐진치 삼독 가운데 진심, 즉 성내고 화나는 마음을 참고 다스리는 실천 수행법을 일컫는다. 지계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인욕바라밀 또한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많은 복잡한 인간관계 문제들의 이면을 보면 결국에는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아서 손해를 보았다는 의식, 무의식적 계산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욕수행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고받는 보시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는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훈련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이다. 정진(精進)은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미 생긴 불건강한 행위는 재발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건강한 행위는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이미 생긴 올바르고 건강한 행위는 더욱 발전시키고, 잠재된 건강한 행위는 잘 자라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네 종류의 올바른 노력(四正勤)이 대표적인 정진의 예가 될 수 있다.

정진바라밀도 지계나 인욕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삼륜청정의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타자를 향한 관심과 관계 형성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시바라밀은 기대나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주고받는 길에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이유는 우리는 모두 각각의 삶의 이력을 가지고 욕망의 세계를 살고 있는 중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아집에서 자신을 개방하는 일, 바로 보시바라밀이다. 제대로 된 보시바라밀의 실천에는 특별한 노력, 올바른 노력이 필요하다.

육바라밀의 다섯 번째는 선정바라밀이다. 선정(禪定)은 잡념이 제거되어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한곳에 집중되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다. 선정바라밀은 앞의 세 바라밀, 즉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거치고 이들을 밑바탕으로 얻어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사이에 순서가 있기보다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선정의 마음상태에 대한 개념, 정의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어왔고 또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는 수행의 전형, 스테레오타입이 어느 정도 있다. 그런데 대승적 관점에서 볼 때, 선정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즉 사람과 동떨어진 외딴 곳에서 홀로 선정에 들고,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과연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일상의 인간관계, 특히 나눔의 관계 속에 선정의 형태, 에너지가 살아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외되고 격리된 나 홀로 고요함을 초세간적 심리상태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는 의미다. 더 쉬운 말로 선정은 보시를 행함에 있어서 내가 준다는 자아의식이나 받는다는 자아의식이 복잡하게 계산되고 대가를 기대하는 산란한 마음이 제거되어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는 없다는 『능가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시는 있으되 보시자는 없는 그런 상태가 선정바라밀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고받는 보시행에 얼마만큼 선정바라밀이 잘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간관계, 사랑의 관계는 그 차원이 달라진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친절하게 예시해주셨듯이 부모가 자식에게 한없이 베풀고도 준 것을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로서의 선정바라밀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부부간에 주고도 준 것을 알지 못하면 부부의 선정바라밀이 될 것이고 친구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또 자기 마음이 주고 싶어도 상대의 필요와 상황을 무지한 채 무조건 주는 것을 삼가고, 주기 싫어도 주어야 할 몫이 있으면 기꺼이 줌으로써 무절제하게 감정에 휩싸이는 일을 사전에 막아야만 한다. 주고받는 관계에 올바른 때와 상황에 맞는 절도 있는 친절과 인내, 노력은 선정바라밀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누가 더 주고, 덜 주었다는 손해 본 느낌 때문에 섭섭하고 화나는 산란한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 여섯 번째는 지혜바라밀이다. 지혜는 연기, 즉 무아, 무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의 기능은 우리들이 하는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 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지혜바라밀 역시 보시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한 최종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지혜바라밀은 보시행이 ‘자아’에 대한 자만을 강화하는지 아니면 그 자아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정화하는 해독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자각력을 높이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 중심적인 보시, 즉 ‘자아’의 만족과 충족, 또는 ‘자아’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지의 여부를 명료하게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자아’ 중심적 보시는 그 보시물이 보시를 받는 자를 위해서 반드시 긍정적이고 유익하게 작용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상대에게 합당하고 꼭 필요한 것을 주는 것, 또 상대가 준비되어 있을 때 주는, 때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상, 연기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무아를 바탕으로 해야만 된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의 이상은 지혜바라밀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4

제4강 -적극적 침묵, 묵빈대처(默賓對處)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는 성미가 몹시 급하고 괴팍해서 늘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찬다카라는 사람이 있었다. 찬다카는 원래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데리고 있던 마부였다고 한다. 출가 전의 부처님과 찬다카는 매우 친했는데, 찬다카는 왕자를 모시고 다니면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고, 왕자의 출가를 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나중에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모국을 방문하셨을 때 출가하였다. 그런데 출가한 찬다카는 부처님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 거들먹거리고 위세를 부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었다.

훗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아난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찬다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에 대해서 여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성품이 인색하고 악한 수행자는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찬다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 대꾸하거나 훈계하지 말고, 가르치려고 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찬다카를 위해서 대중이 침묵을 지키고 그를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승려들은 모두 찬다카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찬디카는 자만심에 차서 제멋대로 행동한 것을 뉘우치고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 잘못을 하면 야단을 치거나 말로 잘 타일러서 고친다. 그러나 말로써 고쳐지지 않을 만큼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일체 대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방법을 침묵할 묵(默) 자, 손님 빈(賓) 자를 써서 묵빈대처라고 한다. 부처님께는 가끔 외도들이 와서 물으면 잘못을 꾸짖어서 바로잡아주시지 않고 그냥 빙그레 미소만 지으시는 것으로 응하셨는데도 그들은 부처님을 비난하다가 오히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경전을 통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주로 언어를 통해서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 방문객을 상대할 때, 언어를 전혀 사용하시지 않고 침묵으로 응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의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고 아주 적극적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침묵에 상대방은 부처님께 감화를 입어서 삼배를 올리고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상황을 심리치유, 심리상담 장면이라고 생각할 때, 이것이 어떤 의미, 기능으로 작용했을까?

부처님과 마주한 면담에서 새롭게 창조된 그 둘만의 공간에서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부처님께서는 그저 빙그레 웃으시기만 했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깊은 감화를 받았을까? 부처님은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채 상대방과 함께 어떻게 머무셨을까? 부처님께선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어떤 언어, 어떤 표현보다도 상대방과 연결되어 계셨을 것이다. 너는 너, 나는 나로 있지 않은 대단한 소통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 상대와의 연결은 어떨 때 가장 깊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진실되게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무아(無我), 정념(正念)의 상태일 것이다. 무아가 됐다는 것은 아주 맑은 거울이 됐다는 의미다. 그 거울은 내가 누구라는 아집이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맑다. 그 거울에는 상대방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에고가 작동하지 않는 거울에 비친 모습은 표면이나 허상이 아니라 대상의 심층, 본래부터 고유한 모습, 진실된 자아 모습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눈에 비친 일체 중생의 모습은 모두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상담자, 치료자가 되는 중요한 관건은 내담자를 마주하고 있는 치료자 자신의 에고가 얼마만큼 작동하지 않고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 즉 상대를 향해서 빙그레 웃었을 뿐인데 상대방은 그 어떤 때보다도 자신의 존재가 수용받고 인정받았기에 엎드려 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은 또한 그동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온갖 책략과 수단을 동원했던 에고를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은 부처님의 아(我)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완전히 무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상담자와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상담의 효과가 가장 클 때는, 상담자 자체가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을 때다. 즉 상담자가 얼마만큼 자신의 자아의식이 가감과 왜곡이 없는 맑고 투명한 거울로 내담자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방어기제는 자아의식이 위협에 처했을 때, 현실을 극복하고 자아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투사, 합리화, 부정, 억압, 반동형성 등 다양한 무의식적인 전략들이다. 물론 방어기제에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나 사고로 승화하거나, 스트레스나 불안을 유머 있게 표출하고, 이타적 방식으로 전향하는 긍정적 방어기제도 있다. 그러나 유식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5감각식과 제6 의식, 제7 자아의식, 제8 저장식(아뢰야식)의 8가지 식(識)이 전환되어 각각 4종류의 지혜(四智)로 근본적인 변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방어기제라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아의식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고, 무아의 상태는 아니다.

흔히 깨달음의 상태를 심리치유적으로 설명하면 방어기제가 멈춘 상태라고 말한다. 즉 완전한 깨달음은 방어기제가 완전히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방어기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8종류의 식(識)이 4종류의 지혜로 전환된 상태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4종류의 지혜는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 the wisdom of the great perfect minor)다. 붙잡거나 거부하지 않고 차별 없이 비추는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편견 없이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평등성지(平等性智, the wisdom of essential equality)다. 대상의 실체가 공성(空性)임을 깨닫고 자신과 모든 대상이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다. 셋째는 묘관찰지(妙觀察智, the wisdom of wonderful observation)다. 일체 현상의 절대적 동질성과 현상적 차이점을 알고 상대적 특징과 다양성을 아는 지혜다. 넷째는 성소작지(成所作智, the wisdom of achieving the task)다.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고 기쁘게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몸과 입과 마음의 무수한 변형을 온 우주에 드러내고 성취하는 지혜다.

8식이 전환되지 않고 작용하는 단계에서는 눈, 귀, 코, 혀, 몸의 5가지 감각기관은 자아가 갈망하고 원하는 대상을 구하기 위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심부름꾼, 노예로 작용한다. 그러나 4가지 지혜로 전환하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오직 중생의 이익과 필요를 위해서 활용될 뿐 더는 자아의 만족과 충족을 위해서 이용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소작지라고 부른다. 또 8식이 작동하는 상태에서는 제6 의식이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대상을 분류하고 차별하며, 옳고 그릇되고, 좋고 나쁘고,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 그러나 4가지 지혜로 전환된 상태에서는 자아의 욕구 충족과는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 그러한 현상의 동질성과 다양성을 관찰하고 아는 지혜다. 그래서 이를 묘관찰지라고 부른다. 한편 평등성지는 자아와 타자를 이원적으로 분류하고 차별하던 제7 자아의식이 전환된 지혜로 일체 현상이 자아와 완전히 동일하고 절대 평등한 연기적 존재임을 아는 지혜다. 마지막으로 대원경지는 과거 경험과 기억이 무의식의 심층에서 폭포수처럼 흐르면서 제7 자아의식을 통해서 현재의 경험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제8 아뢰야식(저장식)이 전환된 지혜다. 대원경지는 이름 그대로 크고 맑고 깨끗한 거울과 같은 지혜다. 그래서 무엇이든 대상이 오면 어떤 왜곡이나 굴곡, 보태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지혜다. 그야말로 오는 대상은 무엇이든 비추고 수용하며 가는 대상은 붙잡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

한편 상담자의 마음이 내담자의 본심을 비추는 맑고 큰 거울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무아, 즉 자아의식이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의식이란 무엇일까? 유식에서는 자아의식의 작용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아만(我慢), 자만심(pride)이다. 흔히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동창회에 갔는데 어떤 동창의 차가 자신의 차보다 더 비싸거나 싼 것에 따라서 심리적 반응이 일어난다.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콤플렉스, 아만에 속한다. 두 번째는 자기중심적인 사랑, 아애(我愛)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타자에 대한 관점, 배려가 결핍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경청, 존중하는 데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자기에 대한 견해, 즉 아견(我見)이다. 아견은 내가 누구라고 하는 꼬리표, 즉 학력, 재산, 집안 등등 자아를 장식하는 수많은 액세서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다. 그들은 온통 자아를 액세서리로 장식하고 그것이 자아라고 믿고 혼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자아의 실체는 공허, 허무다. 액세서리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액세서리에 집착한다. 네 번째는 자아에 대한 무지, 아치(我癡)다. 자기가 누구인지 진짜로 모른다. 그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존재가 아닌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유식에서는 자아의식이 이와 같이 4가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사번뇌(四煩惱)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유식적으로 보면 4가지 번뇌가 작동을 멈추었다는 의미다. 유식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마음치유자는 4번뇌의 작용이 멈춘 치유자다. 치유가 필요한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마음치유자가 4가지 번뇌와 함께 자아의식이 작동하면 소위 말하는 상담자의 문제가 내담자에게 전이되는 역전 현상이 존재하게 되고, 따라서 치료 효과는 보장되지 않는다.

흔히 부처님을 의사들의 왕, 의왕(醫王)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4가지 종류의 번뇌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문제점, 고통을 안고 부처님을 찾아오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방어, 마음의 덫, 짐, 삶의 걸림돌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말로 소통할 수 없는, 전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조차도 말없이,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4가지 지혜가 작동함으로써 그들을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도겐 선사의 말을 인용하면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고,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만물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4종류의 번뇌다. 4종류의 번뇌가 치유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상대와 소통하고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구하든, 상담자가 되어 상담하든, 좋은 수행자와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4가지 번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인연 된 사람들, 환경들, 일체 정신적 물질적 조건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상태를 심리치유적으로 설명하면 방어기제가 멈춘 상태이다. 완전한 깨달음은 방어기제가 완전히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방어기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5│제5강 -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6│제6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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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 스님 운문사 명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효성여자대학교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종교심리학 석사 및 ITP(Institute of Transpersonal Psychology)로부터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불교심리치료 연구원 대표로 있으면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과 대원불교문화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 30송』,『 한영불교사전』,『 나를 치유하는 마음여행』(워크북) 등이 있고,「 불교와 정신치료」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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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2강__서광 스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 교리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이 무아에 대한 통찰과 반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많은 가르침이 무아를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거의 관념적, 개념적 이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러한 노력의 과정은 무아가 아닌 유아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무아를 이해하기 위한 전 단계로 먼저 유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무조건 ‘나’를 부정하지 말고, 일단 ‘나’를 인정하고 무엇이 ‘나’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신생아로 태어났다. 

아기가 ‘나(我)’라는 개념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단계는 자신의 몸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 ‘나’에 대한 개념이 있었던 게 아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 체험을 통해서 자기 몸과 자기 몸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나’라고 하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유식에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제8 아뢰야식으로 저장되고 그 저장된 경험의 내용을 보고 ‘자아’라는 의식이 제7  마나식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아의식은 우리의 신체를 환경과 분리하고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대소변을 갈아주고 배고프거나 졸리면 재워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엄마도 자신의 현실적 삶이 있는지라, 아기가 필요할 때 마다 제때 모든 걸 챙겨주지는 못한다. 그러면 아기는 불쾌함, 찝찝함, 아픔, 통증, 불편함 등이 일어나게 된다. 거기에서 정서, 감정이 발달되어 정서적 자아가 분화되어 나온다. 그러다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개념과 관념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켄 윌버(Ken Wilber)는 그것을 언어적 에고 마인드(verbal ego mind)라고 불렀다. 누군가가 자신을 예쁘다고 말하면, 예쁘다는 언어적 개념/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을 못생겼다고 말하면 못생겼다는 언어적 개념/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개념들과 이미지들을 누적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무수한 잠재적 감정들이 늘 부수적으로 뒤를 따르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자아의식(ego self-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언어의 발달과 함께 우리의 자아의식은 점차 관념적, 개념적 성격으로 변질되어간다. 그 결과 몸과 자아를 동일시했던 보다 본질적 자아를 망각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몸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자연히 자연과도 멀어진다. 왜냐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념과 개념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또한 느낌이나 감각에서도 멀어진다. 느낌이나 감각은 반드시 몸을 의지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아 개념은 우리와 환경을 분리하고, 모든 것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원성으로 차별 짓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과 연결된, 즉 더불어 함께 하는 모든 것들과 멀어지면서 실존적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체로, 하나로 있을 때는 외로움, 두려움, 공포감이 없지만, 분리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실존적 고독과 불안감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실존적 정체감의 위기를 불러온다. 실존적 정체감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 고독감, 존재의 가치, 목적 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혼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주를 통합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실존적 허무, 공허, 불안, 외로움으로 방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믿음, 종교, 사랑, 예술, 학문 등을 만나지만 궁극적인 안착, 방황은 삶과 존재에 대한 보다 높은 단계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교는 트랜스퍼스널 아이덴티티(Transpersonal Identity), 바로 자아초월적인, 뭔가 더 큰 세계, 더 큰 자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실존적 불안은 소아(小我)를 잡고 있기 때문에 대아(大我), 분리가 아닌 연기적 자아를 깨달을 때, 그러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출가해서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켄 윌버는 자아의 발달 단계를 전초아(prepesonal), 개아(personal), 초자아(transpersonal)의 3단계로 나누었다. 전초아는 자아가 아직 주변 환경과 분리되지 않은 무아의 단계고 그 후 점차 자기가 누군지 알아가면서 에고가 생기는 자아 단계로, 그리고 그 자아를 초월하는 단계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칼 융의 말로 바꾸면 삶의 전반부는 내가 누군지 찾아가고 나머지 반은 에고에서 해방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비합리적 단계, 합리적/이성적 단계, 초이성적 단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식에서는 전초아 단계에서 개아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아주 세밀하고 깊게, 그리고 확장해서 다루고 있으며 개아 단계에서 초자아로 나아가는 방법을 깨달음의 과정과 그 과정에 맞는 수행 방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아가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서 대충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왜 불교는 무아를 강조하는지 생각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 즉 감각적 경험이거나 정서적 경험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언어적, 관념적, 개념적 경험을 ‘나’와 동일시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로 개념화되어 있는 자아의식이다. 유식의 제7 마나식에 해당하는 개념화되고 관념화된 자아의식은 자아에 대한 교만함과 무지함, 고착된 견해, 자아중심적인 사랑이 그 특징이기 때문에 삶과 인간관계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통을 유발하는 근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그러한 자아의식이 진짜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우린 또 무의식적으로 그 ‘나’가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아는 그게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원래 ‘나’란 상당히 상호의존적이어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늘 변화하는 상대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무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 아(我)의 실체를 알게 되면 무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아를 이해하게 된다. 무아를 만약에 ‘이런 게 무아다’라고 고정해놓으면 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불교는 아(我)를 유아적 입장에서 4大(지수화풍), 오온(색수상행식), 18계(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와 같이 구성 요소적으로 파악해서 설명해준다. 한편 유식은 아(我)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능적 측면에서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고통의 뿌리인 개념적 관념적 자아의식을 깨뜨려주는 데 있다.

개념적 관념적 자아의식이 고통과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본질적 이유는 경험을 경험으로 두지 않고 소유권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각적 경험은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간에 감각 대상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항상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어지는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에게 감각이라는 경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한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앎이라고 하는 경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앎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을 했다면 사랑이란 경험은 사랑하는 나와, 사랑받는 대상이 있고, 이 둘은 서로에게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된다. 그런데 내 사랑이라고 못 박으니 사랑이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공동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경험 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나와 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내가 사랑받는 대상이 된다. 둘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인데 갑자기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이 각각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해버리니까 사랑이라는 경험이 사라지고 요구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엄청난 고통과 갈등, 망상, 분노가 생기게 된다.
 
독자 가운데 느낌, 감각, 생각, 기억, 정서(감정) 간의 관계를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감각을 영어로 하면 ‘센스(Sense)’다. 센스는 몸의 감각이다. 누가 몸을 꼬집을 경우,  “아야” 하는 반응과 함께 통증이 일어난다. 아프긴 아픈데 꼬집은 사람이 사랑과 관심의 표현으로 꼬집었다면 아픔의 통각과 느낌은 있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상대방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심리적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 사람이다. 몸의 센스가 작용하는 동안 인지적인 작용이 일어나지 못하고 정서, 감정으로 폭발한 것이다. 심한 심리적 외상을 겪어서 정상적인 신경전달 체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반응하게 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어떤 사람은 쉽게 오해하고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는 분명 그 단어나, 사건, 아니면 그와 관련된 상황이 과거 어린 시절 좋지 않은 기억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분석 과정을 거쳐서 정보를 주고받지 못한다. 그 결과 정서 조절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 경우는 치료가 필요하다. 느낌은 정서에 비해서 신체 감각에 보다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몸에서 가까우면 느낌이고 생각에 가까우면 정서, 감정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정서, 감정의 뿌리는 생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과 함께 경험된 과거의 기억, 상처들로 인해서 우리는 자주 감정 조절에 실패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3강__서광 스님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제3강

육바라밀(六波羅蜜)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대승불교에서 이론과 실천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실천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실천 항목이다. 대개는 이들 항목들을 각각 독립적으로 수행에 적용하고 어느 한 가지 수행에 중점을 두고 실천한다. 그러나 이들 전체를 하나의 수행 차제로 이해하고 순서대로 닦아가는 것도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수행 단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육바라밀에서 첫 번째 단계인 보시바라밀을 시작으로 생각해보자. 보시는 흔히 베푸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포함된다. 주고받는 것이 물질에 해당하면 재시(財施)라 하고,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면 법시(法施)라 하고,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마음치료에 해당하면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그런데 보시하는 것이 어떻게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완성하는 제일의 길이 되는가? 그것은 보시의 궁극적 기능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최상의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베풀지 아니하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 영적 성장에 이르는 길은 없다. 왜인가? 베푸는 행위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약화시키고, 포기하는 무의식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나’라고 하는 대상의 범위를 자기 자신의 육신과 마음에 한정시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즉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서 주는 ‘나’와 받는 ‘대상’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적으로 깨달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시는 자신에게 집착하고 한정된 자아의식이 타자에게로 이동함으로써 확장된 자아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효과적이고도 신비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시하는 행위는 또 다른 보시바라밀을 낳고, 그 보시바라밀은 다시 또 다른 보시바라밀을 낳고…. 끊임없이 파생되고 퍼져나가는 엄청난 파급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에서 베풀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보시바라밀도 타자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움직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보시바라밀이 그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보시바라밀이 보시자의 아집을 떠나서 자아의식을 확장하고, 타자의 보시바라밀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 즉 삼륜청정(三輪淸淨)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보시하는 자와 받는 자, 보시물이 모두 깨끗해야 된다는 뜻이다. 깨끗하다는 말은 공적(空寂), 마음(자아의식)이 비어서 고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보시는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네 가지 번뇌, 즉 자만심, 자기중심적 사랑, 자기중심적 생각, 어리석음이 들어가지 않는 마음으로 할 때, 타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집착함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삼륜청정의 보시는 오직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우리들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솔직히 삼륜청정의 보시가 가능하다면 굳이 지계, 인욕, 등 나머지 바라밀들을 새삼 닦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은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두 번째 단계가 지계다. 육바라밀의 첫 관문인 보시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 진실하게 노력하다 보면 누구나 보시바라밀에는 반드시 지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보시의 대상, 조건, 상황, 정도, 방법 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익 되게 하고, 깨달음과 성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택의 준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주고받는 행위에는 반드시 절도, 즉 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바라밀의 세 번째 실천 항목은 인욕바라밀이다. 인욕(忍辱)은 말 그대로 참고 인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탐진치 삼독 가운데 진심, 즉 성내고 화나는 마음을 참고 다스리는 실천 수행법을 일컫는다. 지계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인욕바라밀 또한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많은 복잡한 인간관계 문제들의 이면을 보면 결국에는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아서 손해를 보았다는 의식, 무의식적 계산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욕수행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고받는 보시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는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훈련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이다. 정진(精進)은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미 생긴 불건강한 행위는 재발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건강한 행위는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이미 생긴 올바르고 건강한 행위는 더욱 발전시키고, 잠재된 건강한 행위는 잘 자라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네 종류의 올바른 노력(四正勤)이 대표적인 정진의 예가 될 수 있다.

정진바라밀도 지계나 인욕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삼륜청정의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타자를 향한 관심과 관계 형성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시바라밀은 기대나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주고받는 길에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이유는 우리는 모두 각각의 삶의 이력을 가지고 욕망의 세계를 살고 있는 중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아집에서 자신을 개방하는 일, 바로 보시바라밀이다. 제대로 된 보시바라밀의 실천에는 특별한 노력, 올바른 노력이 필요하다.



육바라밀의 다섯 번째는 선정바라밀이다. 선정(禪定)은 잡념이 제거되어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한곳에 집중되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다. 선정바라밀은 앞의 세 바라밀, 즉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거치고 이들을 밑바탕으로 얻어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사이에 순서가 있기보다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선정의 마음상태에 대한 개념, 정의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어왔고 또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는 수행의 전형, 스테레오타입이 어느 정도 있다. 그런데 대승적 관점에서 볼 때, 선정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즉 사람과 동떨어진 외딴 곳에서 홀로 선정에 들고,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과연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일상의 인간관계, 특히 나눔의 관계 속에 선정의 형태, 에너지가 살아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외되고 격리된 나 홀로 고요함을 초세간적 심리상태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는 의미다. 더 쉬운 말로 선정은 보시를 행함에 있어서 내가 준다는 자아의식이나 받는다는 자아의식이 복잡하게 계산되고 대가를 기대하는 산란한 마음이 제거되어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는 없다는 『능가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시는 있으되 보시자는 없는 그런 상태가 선정바라밀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고받는 보시행에 얼마만큼 선정바라밀이 잘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간관계, 사랑의 관계는 그 차원이 달라진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친절하게 예시해주셨듯이 부모가 자식에게 한없이 베풀고도 준 것을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로서의 선정바라밀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부부간에 주고도 준 것을 알지 못하면 부부의 선정바라밀이 될 것이고 친구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또 자기 마음이 주고 싶어도 상대의 필요와 상황을 무지한 채 무조건 주는 것을 삼가고, 주기 싫어도 주어야 할 몫이 있으면 기꺼이 줌으로써 무절제하게 감정에 휩싸이는 일을 사전에 막아야만 한다. 주고받는 관계에 올바른 때와 상황에 맞는 절도 있는 친절과 인내, 노력은 선정바라밀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누가 더 주고, 덜 주었다는 손해 본 느낌 때문에 섭섭하고 화나는 산란한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 여섯 번째는 지혜바라밀이다. 지혜는 연기, 즉 무아, 무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의 기능은 우리들이 하는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 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지혜바라밀 역시 보시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한 최종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지혜바라밀은 보시행이 ‘자아’에 대한 자만을 강화하는지 아니면 그 자아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정화하는 해독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자각력을 높이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 중심적인 보시, 즉 ‘자아’의 만족과 충족, 또는 ‘자아’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지의 여부를 명료하게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자아’ 중심적 보시는 그 보시물이 보시를 받는 자를 위해서 반드시 긍정적이고 유익하게 작용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상대에게 합당하고 꼭 필요한 것을 주는 것, 또 상대가 준비되어 있을 때 주는, 때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상, 연기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무아를 바탕으로 해야만 된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의 이상은 지혜바라밀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4강__서광 스님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제4강
적극적 침묵,
묵빈대처(默賓對處)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는 성미가 몹시 급하고 괴팍해서 늘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찬다카라는 사람이 있었다. 찬다카는 원래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데리고 있던 마부였다고 한다. 출가 전의 부처님과 찬다카는 매우 친했는데, 찬다카는 왕자를 모시고 다니면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고, 왕자의 출가를 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나중에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모국을 방문하셨을 때 출가하였다. 그런데 출가한 찬다카는 부처님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 거들먹거리고 위세를 부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었다.



훗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아난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찬다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에 대해서 여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성품이 인색하고 악한 수행자는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찬다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 대꾸하거나 훈계하지 말고, 가르치려고 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찬다카를 위해서 대중이 침묵을 지키고 그를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승려들은 모두 찬다카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찬디카는 자만심에 차서 제멋대로 행동한 것을 뉘우치고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 잘못을 하면 야단을 치거나 말로 잘 타일러서 고친다. 그러나 말로써 고쳐지지 않을 만큼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일체 대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방법을 침묵할 묵(默) 자, 손님 빈(賓) 자를 써서 묵빈대처라고 한다. 부처님께는 가끔 외도들이 와서 물으면 잘못을 꾸짖어서 바로잡아주시지 않고 그냥 빙그레 미소만 지으시는 것으로 응하셨는데도 그들은 부처님을 비난하다가 오히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경전을 통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주로 언어를 통해서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 방문객을 상대할 때, 언어를 전혀 사용하시지 않고 침묵으로 응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의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고 아주 적극적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침묵에 상대방은 부처님께 감화를 입어서 삼배를 올리고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상황을 심리치유, 심리상담 장면이라고 생각할 때, 이것이 어떤 의미, 기능으로 작용했을까?

부처님과 마주한 면담에서 새롭게 창조된 그 둘만의 공간에서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부처님께서는 그저 빙그레 웃으시기만 했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깊은 감화를 받았을까? 부처님은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채 상대방과 함께 어떻게 머무셨을까? 부처님께선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어떤 언어, 어떤 표현보다도 상대방과 연결되어 계셨을 것이다. 너는 너, 나는 나로 있지 않은 대단한 소통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 상대와의 연결은 어떨 때 가장 깊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진실되게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무아(無我), 정념(正念)의 상태일 것이다. 무아가 됐다는 것은 아주 맑은 거울이 됐다는 의미다. 그 거울은 내가 누구라는 아집이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맑다. 그 거울에는 상대방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에고가 작동하지 않는 거울에 비친 모습은 표면이나 허상이 아니라 대상의 심층, 본래부터 고유한 모습, 진실된 자아 모습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눈에  비친 일체 중생의 모습은 모두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상담자, 치료자가 되는 중요한 관건은 내담자를 마주하고 있는 치료자 자신의 에고가 얼마만큼 작동하지 않고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 즉 상대를 향해서 빙그레 웃었을 뿐인데 상대방은 그 어떤 때보다도 자신의 존재가 수용받고 인정받았기에 엎드려 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은 또한 그동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온갖 책략과 수단을 동원했던 에고를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은  부처님의 아(我)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완전히 무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상담자와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상담의 효과가 가장 클 때는, 상담자 자체가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을 때다. 즉 상담자가 얼마만큼 자신의 자아의식이 가감과 왜곡이 없는 맑고 투명한 거울로 내담자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방어기제는 자아의식이 위협에 처했을 때, 현실을 극복하고 자아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투사, 합리화, 부정, 억압, 반동형성 등 다양한 무의식적인 전략들이다. 물론 방어기제에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나 사고로 승화하거나, 스트레스나 불안을 유머 있게 표출하고, 이타적 방식으로 전향하는 긍정적 방어기제도 있다. 그러나 유식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5감각식과 제6 의식, 제7 자아의식, 제8 저장식(아뢰야식)의 8가지 식(識)이 전환되어 각각 4종류의 지혜(四智)로 근본적인 변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방어기제라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아의식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고, 무아의 상태는 아니다.
흔히 깨달음의 상태를 심리치유적으로 설명하면 방어기제가 멈춘 상태라고 말한다. 즉 완전한 깨달음은 방어기제가 완전히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방어기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8종류의 식(識)이 4종류의 지혜로 전환된 상태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4종류의 지혜는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 the wisdom of the great perfect minor)다. 붙잡거나 거부하지 않고 차별 없이 비추는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편견 없이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평등성지(平等性智, the wisdom of essential equality)다. 대상의 실체가 공성(空性)임을 깨닫고 자신과 모든 대상이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다. 셋째는 묘관찰지(妙觀察智, the wisdom of wonderful observation)다. 일체 현상의 절대적 동질성과 현상적 차이점을 알고 상대적 특징과 다양성을 아는 지혜다. 넷째는 성소작지(成所作智, the wisdom of achieving the task)다.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고 기쁘게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몸과 입과 마음의 무수한 변형을 온 우주에 드러내고 성취하는 지혜다.

8식이 전환되지 않고 작용하는 단계에서는 눈, 귀, 코, 혀, 몸의 5가지 감각기관은 자아가 갈망하고 원하는 대상을 구하기 위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심부름꾼, 노예로 작용한다. 그러나 4가지 지혜로 전환하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오직 중생의 이익과 필요를 위해서 활용될 뿐 더는 자아의 만족과 충족을 위해서 이용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소작지라고 부른다. 또 8식이 작동하는 상태에서는 제6 의식이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대상을 분류하고 차별하며, 옳고 그릇되고, 좋고 나쁘고,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 그러나 4가지 지혜로 전환된 상태에서는 자아의 욕구 충족과는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 그러한 현상의 동질성과 다양성을 관찰하고 아는 지혜다. 그래서 이를 묘관찰지라고 부른다. 한편 평등성지는 자아와 타자를 이원적으로 분류하고 차별하던 제7 자아의식이 전환된 지혜로 일체 현상이 자아와 완전히 동일하고 절대 평등한 연기적 존재임을 아는 지혜다. 마지막으로 대원경지는 과거 경험과 기억이 무의식의 심층에서 폭포수처럼 흐르면서 제7 자아의식을 통해서 현재의 경험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제8 아뢰야식(저장식)이 전환된 지혜다. 대원경지는 이름 그대로 크고 맑고 깨끗한 거울과 같은 지혜다. 그래서 무엇이든 대상이 오면 어떤 왜곡이나 굴곡, 보태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지혜다. 그야말로 오는 대상은 무엇이든 비추고 수용하며 가는 대상은 붙잡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

한편 상담자의 마음이 내담자의 본심을 비추는 맑고 큰 거울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무아, 즉 자아의식이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의식이란 무엇일까? 유식에서는 자아의식의 작용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아만(我慢), 자만심(pride)이다. 흔히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동창회에 갔는데 어떤 동창의 차가 자신의 차보다 더 비싸거나 싼 것에 따라서 심리적 반응이 일어난다.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콤플렉스, 아만에 속한다. 두 번째는 자기중심적인 사랑, 아애(我愛)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타자에 대한 관점, 배려가 결핍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경청, 존중하는 데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자기에 대한 견해, 즉 아견(我見)이다. 아견은 내가 누구라고 하는 꼬리표, 즉 학력, 재산, 집안 등등 자아를 장식하는 수많은 액세서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다. 그들은 온통 자아를 액세서리로 장식하고 그것이 자아라고 믿고 혼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자아의 실체는 공허, 허무다. 액세서리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액세서리에 집착한다. 네 번째는 자아에 대한 무지, 아치(我癡)다. 자기가 누구인지 진짜로 모른다. 그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존재가 아닌 절대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유식에서는 자아의식이 이와 같이 4가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사번뇌(四煩惱)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유식적으로 보면 4가지 번뇌가 작동을 멈추었다는 의미다. 유식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마음치유자는 4번뇌의 작용이 멈춘 치유자다. 치유가 필요한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마음치유자가 4가지 번뇌와 함께 자아의식이 작동하면 소위 말하는 상담자의 문제가 내담자에게 전이되는 역전 현상이 존재하게 되고, 따라서 치료 효과는 보장되지 않는다. 

흔히 부처님을 의사들의 왕, 의왕(醫王)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4가지 종류의 번뇌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문제점, 고통을 안고 부처님을 찾아오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방어, 마음의 덫, 짐, 삶의 걸림돌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말로 소통할 수 없는, 전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조차도 말없이,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4가지 지혜가 작동함으로써 그들을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도겐 선사의 말을 인용하면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고,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만물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4종류의 번뇌다. 4종류의 번뇌가 치유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상대와 소통하고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구하든, 상담자가 되어 상담하든, 좋은 수행자와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4가지 번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인연 된 사람들, 환경들, 일체 정신적 물질적 조건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상태를 심리치유적으로 설명하면 방어기제가 멈춘 상태이다. 완전한 깨달음은 방어기제가 완전히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묵빈대처는 방어기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불교심리치료 강의│제5강_오정심관   <서광 스님>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예기치 않은 크고 작은 일에 부딪치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도 또 이런저런 뜻밖의 일들로 이전의 괴로움을 잊고 순간순간 삶의 즐거움에 빠진다. 그러나 더러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일을 겪으면서 그때의 상처나 아픔은 쉽게 잊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된다. 물론 그러한 상처는 마음이라고 하는 영역에만 남는 것이 아니라 몸속에도 함께 저장된다.

마음의 상처는 몸에도 상처를 남긴다는 몸과 마음의 일원성이 바로 불교심리치료가 몸과 마음의 분리, 이원성을 바탕으로 출발한 서양의 심리치료와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태어나서 성장하고 독립하기까지 상대적으로 긴 세월 동안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면서 생존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경우는 작은 일에도 깊이 상처받고 온몸으로 아파하는 아주 민감하고 섬세한 존재들이다. 특히 스스로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어린 시절에 받는 상처들은 이후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이전의 상황을 모두 잊어버리고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그 힘겨움의 경험은 반드시 이후의 삶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그러한 반응 양식들은 다시 버릇, 습관, 인격, 성격 등의 이름으로 우리들의 개성을 특징짓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개성들이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드러날 때마다 그 속에 내포된 자애, 연민심, 이타심 등의 건강하고 선한 마음의 요소들과 탐욕, 분노, 미움, 질투, 게으름 등의 불건강하고 파괴적인 요소들도 함께 표출된다. 이때 선하고 건강한 마음의 요소들이 표출되는 순간에 우리는 행복, 평화라고 부르는 마음 상태들을 경험하게 되고, 불건강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표출되는 순간에는 불행, 좌절, 우울 등으로 불리는 심리 상태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일단 두려움, 불안, 긴장, 스트레스가 유발되면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모든 생명체가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단지 노출된 상황에 반사적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등의 실존적 물음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들 가운데 더러는 그런 인간적인 질문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축생 마인드도 있지만 그렇다고 24시간 축생의 정신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 진정으로 인간적 마인드로 돌아오면 그러한 실존적 삶의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의 고통에 직면해서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육도 가운데 인간계의 정신세계에 머무르는 순간만이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운명을 바꾸고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불교심리학은 그러한 인간계의 마인드, 즉 우리 자신의 존재 본질에 대한 의문, 내가 진짜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지, 그 해답을 구하고자 영적 마음여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정심관①이라고 하는 수행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더러는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일단 시시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이 살짝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래 참다운 진리는 어렵지 않는 법이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오정심관은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제거하는 5가지 수행법이다. 오정심관에서 관(觀)은 지관(止觀)의 지혜를 의미하는 관(觀,vipas′yana-)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어지럽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멈추게 한다는 기능적 의미에서 사마타(sa-matha, 止) 명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우리들의 내적인 마음의 평화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불건강한 심리상태는 탐욕, 화, 어리석음의 3가지 독성과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 Anhaenglichkeit fuer Sich), 그리고 분별하고 비교하는 산란한 마음이다. 이들 5가지 불건강한 마음을 정화하고 해독하는 방법이 오정심관이다. 먼저 기본적인 욕망, 이를테면 식욕, 성욕, 물질에 대한 욕망 등의 탐욕 성향이 강한 사람은 부정관(不淨觀, 몸의 더러움을 떠올림)을 한다. 욕망의 가장 밑바닥에는 결국 육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치법으로 육신의 더러움을 떠올리고 상상함으로써 혐오감을 유발해 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내려놓고 상쇄시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부정관이 지나쳐서 집착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학대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편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비관(慈悲觀, 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염원)을 하는 것이 좋다. 자비관은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선한 의도와 대상에 대한 관심과 주목, 그리고 그들을 향한 연민과 관심, 사랑으로 행복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이는 화의 감정이 주변을 향한 적대감으로 단절감을 유발하는 것에 비해서 강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불행감을 감소시킨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인연관(因緣觀, 일체 것들이 원인과 조건에 얽혀서 발생)을 권한다. 대개 어리석은 사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자신과 타자와의 연기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원인과 조건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이 어떻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아집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무아를 통찰하는 계분별관(界分別觀, 5온, 12처, 18계를 관함)을 하라고 제안한다. 계분별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좀 어렵기는 한데 쉽게 이해하자면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통찰하는 훈련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주장하는 그 ‘나’의 바탕인 몸과 마음이 실제로는 무수한 타자의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자와 비교하고 차별해서 우월감과 열등감, 자만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분별심이 강한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을 통해서 계산하고 따지는 마음을 쉬도록 돕는다../

 

깨달음의 길, 영적인 여행의 길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위의 5가지 대표적인 불건강한 정신 요소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어느 정도 이들을 제거하는 훈련, 즉 치료를 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위의 5가지 요소들에 휩싸이고 얽매여 살고 있는 연고로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를 오해하고 착각하고 그로 인해서 발생되는 이차적 삼차적 왜곡된 반응과 갈등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첫 번째 작업으로 자기에게 유난히 두드러진 불건강한 정신적 요소가 무엇인지, 그러한 걸림돌을 제거하고 어떻게 하면 디딤돌로 전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어느 정도 익힌 다음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데 치료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이를테면 화가 많아서 평소에 인간관계를 그르치고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화를 치유하는 자비관 대신에 수식관을 하려고 하면 속에서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질 뿐, 효과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평소에 하던 습관 때문에 분별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연관이나 계분별관에 더 매력을 느끼고, 문제의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생각이 필요하지 않는 수식관에 더 이끌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생각이 많아서 장애가 되는 사람을 더욱 생각하게 만들거나 생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 사람을 더욱 생각이 없도록 부추기는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마음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자기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통해서 거기에 합당한 공부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화가 많으면 부처님께서 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찾아서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탐욕, 질투심, 또는 어리석음이 문제가 되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찾아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살면서 정신적 고통이 커지고 뭔가 삶의 의욕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보약보다는 마음의 치료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치료제인 오정심관을 잘 사용해야만 뒤이어서 사용할 보약인 37조도법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흔히들 불교 공부는 어렵고 난해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교를 공부하는 방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불교 공부에서 진짜 중요한 주 교재는 자기 자신인데 엉뚱하게도 부교재인 타자나 환경, 주변 조건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경우다.

도겐 선사의 말을 인용하면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자기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고(to study Buddhism is to study the self), 자기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며(to study the self is to forget the self), 자기를 잊는 것은 일체와 친해지는 것(to forget the self is to become intimate with all things)”이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 말, 생각에 대한 자각과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그런데 알아차림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찰하고 지켜봐야 하는데 욕망이나 화, 무지 등이 지나치게 심하면 스스로의 행위를 지켜볼 수가 없다.

그래서 오정심관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알아차리고 자각하기 위한 일종의 선수과목과도 같은 것이다. 명상에서 알아차림은 치료다. 자아에 대한 알아차림이 온전하게 잘 이루어지면 그게 바로 자아를 잊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는 것이 잊는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아를 의식하고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행위를 회피하고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아를 올바르게 볼 때, 진실로 자아를 잊을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부정하거나 거부, 억압하면 더 강한 저항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에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주변과 세상에서 고립되고 단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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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오정심관(五停心觀)
마음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관법(觀法)으로 모든 수행의 기초이다

1.수식관(數息觀)
자기호흡 즉 숨이 들어가고 내쉬는 것을 수를 세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
수행의 근기가 높아질수록 더 세분화하여 많은 수를 셀 수 있게 되며, 남방불교의 코앤카 위빠사나 수행법이 수식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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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오정심관(五停心觀)


마음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관법(觀法)으로 모든 수행의 기초이다

1.수식관(數息觀)
자기호흡 즉 숨이 들어가고 내쉬는 것을 수를 세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
수행의 근기가 높아질수록 더 세분화하여 많은 수를 셀 수 있게 되며, 남방불교의 코앤카 위빠사나 수행법이 수2,

2.22. 2. 부정관(不淨觀)
육신의 더럽고 지저분한 (不淨한) 모양을 관하여 자기 육체에 대한 탐욕심과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수행법

3.자비관(慈悲觀)
철저하게 자기 자신부터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성내고 다투는 마음이 일어날때 자비심으로 가라앉히는 관법.
그렇게 하므로 인하여 분별 망상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4.인연관(因緣觀)
내 몸이 안이비설신의(眼耳卑舌身意)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서 분별심을 일으킨다는 것을 관하여 공(空)사상으로 그것을 잘 다스려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집착하거나 끄달리지 않게 하는 수행법

5.불상관(佛像觀)
부처님의 상호를 관 하듯이 자기자신의 몸을 관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하는 수행법으로 염불 간경 주력등의 방법이 있다.

 

이상과 같이 수행하는다섯가지 관법을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고 한다.

혜능(慧能)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성이라는 것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며, 생(生) 하지도 멸(滅)하지도 않으며 본래 자기에게 있으며 본래 움직임이 없다"

 

 

② 도겐(道元, Dogen)

 

조요 대사[承陽大師], 기겐 도겐[希玄道元]이라고도 한다. 선(禪)을 조동종(曹洞宗)의 형식으로 일본에 소개했다. 창조적인개성의 소유자로서 좌선과 철학적 사색을 결합시켰다. 황실 귀족 출신으로 7세에 고아가 되었고 13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 산[比叡山]에서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의 영적 갈망을 채우기에는 불충분했다. 1223~27년에는 중국에서 선을 공부했고 선승 여정(如淨)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러 사찰을 전전하면서 좌선을 전파했으며, 나고야[名古屋] 북서쪽에 에이헤이 사[永平寺]를 짓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첫 저작인 〈후칸자젠기 普勸坐禪儀〉 (1927)에서는 좌선을 간단히 소개했으며, 그밖에 지침서도 많이 썼다.

대표작인 〈쇼보겐조 正法眼藏〉(1231~53)는 총 95장으로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것인데, 불교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그는 지관타좌(只管打坐), 곧 좌선전수(坐禪專修)를 열심히 할 것을 가르쳤으며 수행과 깨달음의 합일을 강조했다.






[2012년10월호]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8강 십바라밀 (1)__서광 스님


십바라밀 ①
 
육바라밀 지혜를 삶 속에서 실천해가는 과정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십바라밀은 육바라밀, 즉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해방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수단에 더해서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의 네 가지 바라밀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각각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십바라밀의 필요성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왜 육바라밀로 충분치 않고, 이들 4바라밀이 더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붓다의 궁극적 가르침을 깨달아가는 데 육바라밀 수행에 더해 4바라밀이 더 필요한 이유를 찾기 위해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떤 한 수행자가 진지하게 깨달음을 열망하면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다고 하자. 마침내 그가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모두 하나고, 중생이 바로 부처라고 선언했다고 하자.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말이나 주장이 아니라 진실로 중생이 부처라고 믿는다면, 부처인 중생에게 절을 하고 공경하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도리어 부처인 중생에게 삼배를 받고 설법하는 이유가 뭔가? ‘나’와 ‘너’가 하나고 진정 중생이 부처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육바라밀의 지혜바라밀과 십바라밀의 지(智)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치유적 관점에서 유식 30송의 5단계 수행 과정을 참고로 설명하면 육바라밀의 지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에 해당하고, 십바라밀의 지혜는 분별지(分別智)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분별지는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고 인식할 때, 경험하는 “나”와 경험되어지는 대상인 “너”를 이원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나”와 “너”가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한다. 분별지는 무분별의 지혜, 즉 인식하는 “나”와 인식되어지는 “너”의 일체성을 바탕으로 “나”와 “너”의 차이를 인식하는 지혜다. 그러니까 “나”와 “너”는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하나이지만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서로 다르게 생겨나고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수행에서 ‘만법귀일 일귀하처’, 즉 일체 현상은 모두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가 있다. 일체 현상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무분별지라면 그 하나가 다시 일체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를 분별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제 육바라밀에 더해서 4바라밀을 더 닦아야 하는 이유를 치유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여섯 번째 바라밀에서 “나”와 “너”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단계의 깨달음은 그야말로 그냥 인식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온 수많은 과거 경험과 행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깨달음의 순간에 바뀔 수 있지만 몸으로 익힌 습관은 몸으로 다시 습관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내재화, 또는 체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득하고 내재화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십바라밀의 4바라밀을 바로 자기가 본 진리를 내면화하고 내재화하는 과정, 수단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즉 인식의 주체인 자아와 인식의 대상인 타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를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타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본 진리를 남들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방법, 과정이 바로 4바라밀일 것이다. 한마디로 십바라밀은 육바라밀 수행에서 얻은 지혜를 실제 삶과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해가는 과정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바로 보살이고, 그 보살의 종착점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이제 4바라밀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인 방편바라밀은 육바라밀 수행에서 얻은 지혜, 즉 너와 내가 독립적이고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존재하며 상호의존적이고 차별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수단·방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수단·방법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위로하고 돕는 행위를 통해 몸으로 체득해가는 과정이지 머리나 이론, 관념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식에서 보면 방편바라밀을 행하는 자들은 일단 진리를 보는(유식 5위의 세 번째 단계인 견도)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대승보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자아를 타자와 비교하면서 타자보다 잘나고 싶고, 튀고 싶어서 애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사실은 자아와 타자가 동일한 것이니 그리 애쓰지 말고 내려놓아도 좋다는 진리를 전하는 메신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온갖 방편들을 고안하게 되었다.
 
아마 인류의 종교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교리서가 많은 것이 불교가 아닌가 싶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다양한 의식과 명상 기법 등을 감안하면 어떨 때는 너무 복잡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방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과 조건에 맞는 객관적·합리적 유연성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어느 것이 방편이고 어느 것이 방편이 아닌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 방편바라밀의 목적은 법보시인데, 법보시의 여부를 판단하는 준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나 붓다의 법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법보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교에는 지혜로운 자가 그릇된 법을 행하면 그릇된 법이 올바른 법이 되고 어리석은 자가 올바른 법을 행하면 올바른 법이 그릇된 법이 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를 지칭하는 것은 적어도 육바라밀 수행을 어느 정도 완성한 이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아직 육바라밀을 충분히 닦지 않는 자는 붓다의 법을 말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다만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친다든지 법보시를 행한다는 착각을 내려놓고, 그냥 더불어서 함께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도반이라는 자세를 갖는 것이 보다 사실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미다.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나누는 데 최상의 방편바라밀은 나누고자 하는 대상과 친구가 되는 길이다. 진실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다정한 벗의 소리로 다가갈 때 불법은 난해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서 생동감, 신선함, 자유 등 고유의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방편바라밀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보시를 하려는 보살의 노력이 깊어지면서 아울러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심도 커져간다. 그리하여 보살은 자신과 인연한 중생도 하루속히 붓다의 법을 깨닫고 고통에서 벗어나,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방편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섭법(四攝法), 즉 보살이 중생을 대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인 ‘진리를 가르쳐주고, 재물을 베풀며(보시섭, 布施攝), 사랑스러운 말로 대하며(애어섭, 愛語攝), 이익이 되는 행을 하며(이행섭, 利行攝), 고락을 함께함(동사섭, 同事攝)’으로써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끈다. 원바라밀에서는 중생을 향한 그 마음이 더욱 깊어져서 어떤 인위적인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중생을 향한 끝없는 마음이 보살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마음이다. 『대지도론』 권 20에 의하면, 사무량심의 네 가지 마음인 자비희사(慈悲喜捨) 가운데 자무량심은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고, 비무량심은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이며, 희무량심은 중생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무량심은 이들 세 가지 무량심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사심이 없고 치우침이 없는 평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제 또 다른 관점에서 원바라밀을 이해해보자.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은 너와 나는 서로 분리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으며, 그래서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고 개체로서의 나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 나머지 실존적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방편바라밀은 그러한 중생의 수준과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주고, 그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보살이 중생으로부터 세속적 현상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으로부터 세간을 배우고 중생은 보살로부터 초세간을 배우는 그러한 과정이 방편바라밀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게 해서 중생에 대한 보살의 이해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보살은 오직 중생의 깨달음과 행복만을 바라는 원바라밀의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때의 보살은 일심으로 중생의 기쁨과 행복, 깨달음을 염원하고, 보살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은 그 염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고, 뜻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야말로 보살은 자아를 망각한 채 오로지 타자를 위한 삶의 행위, 실천, 존재로서 현존하는, 타자중심적 삶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그 결과 중생과 보살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중생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진여불성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오직 중생의 기쁨과 행복, 그들의 깨달음을 갈망하는 보살의 진정성, 진심이 마침내 중생의 두꺼운 업장을 녹이고 그들의 잠자던 불성, 본래면목을 두들겨 일깨우는 것이다.
십바라밀에서 여섯 번째 바라밀 수행까지는 비록 보살이 타자를 향해 이타심을 배양하고는 있으나 그 행위의 중심축은 어디까지나 자아에 있다. 왜냐하면 그 수행의 근본 동기나 과정, 목적은 보살이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닦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인 방편바라밀과 여덟 번째인 원바라밀에 이르면 보살 수행의 중심축이 자아에게서 타자에게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살의 일체 행위, 신구의 삼업은 그야말로 타자를 위한, 타자에 의한, 타자중심의 바라밀행이 이루어진다. 처음 여섯 번째 바라밀행을 통해 보살은 자아와 타자, 사회, 환경, 자연, 우주와 더불어 연기적이고 유기적 관계, 머무름을 실천하는 데 장애가 되는 자신의 숙업을 정화시킨다.
 
그런 다음 7·8바라밀에서 타자와 보다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과 더욱 가깝게 연결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이는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고, 타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깨달음을 돕고 이익이 되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개발되고 실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__다음 호에 계속.



[2012년11월호]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9강 십바라밀 (2)__서광 스님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9강
 
십바라밀 ②
십바라밀의
핵심은‘보시’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지난 호에 이어서 십바라밀의 아홉 번째인 역(곋)바라밀을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십바라밀에서 여섯 번째 바라밀까지는 자아중심적 수행, 즉 수행자 내면에 초점을 맞춘 수행이다. 반면에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타자중심적 수행, 즉 수행자 자신을 잊고 타자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붓다
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자아와 타자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게 된다. 이것은 여섯 번째 바라밀의 인식 수준에서 주객의 경계가 없음을 깨달은 것과는 달리 자아와 타자가 하나임을 몸으로 체득하고 내재화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그 결과 보살이 행하는 일체의 행위에
는 힘, 즉 신비력이 따른다.
 
왜냐하면 보살은 자타의 구분이 없이 타인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온 마음과 정성, 일념으로 행하기 때문에 보살을 둘러싼 주변이 보살의 이타심에 감화를 받게 된다. 나아가 그들의 마음이 보살의 원력, 이타심의 실천을 완성하는 데 동참하고자하는 자연스러운 에너지로 전환된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화내는 자는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우울한 자는 주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타인을 선하게 만들고, 이타적인 사람은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행하고, 타인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전념하
는 보살행은 능히 주변 조건들을 변화시킨다. 나아가 온 사회와 우주가 보살의 일을 돕고 동참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역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하는 일마다 불보살이 돕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자아정체감의 혼란기, 실존적 위기에 처한 이들을 한순간에 제도하고 그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뛰어난 능력일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성장 발달 과정에서 너와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주로 부모나 우리를 돌봐주는 이들과의 유아적·의존적‘일체감’, 즉 ‘우리’라고 하는 심리적 상태로부터‘나’라고 하는 개체성·독립성을 먼저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자아정체감의 확립 과정과 혼란기에 있는 사람들은 실존적 공허와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종교적 삶 또는 영적인 가르침에서 위안을 구하게 된다. 이때 그들이 만나는 보살의 정신 수준이 십바라밀의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얻게 될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 될 것이다.

역바라밀의 단계에 있는 보살이라면 한순간에 기쁨과 위안으로 그들의 내면세계를채움으로써깨달음의길로나아가게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의 6단계에 있는 보살이라면 그런 극적인 만남은 불가능할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아를 잊어버린 채, 온전히 타자의 행복과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행위의 중심축이 여전히 자아중심적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십바라밀의 마지막 단계는 지(智)바라밀이다. 그런데 육바라밀의 여섯번째도 지혜바라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섯 번째 바라밀의 지혜와 열번째 바라밀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섯 번째 바라밀의 지혜는 주객의 이원성이 통합되고 초월된 인식론적 깨달음의 성질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열 번째 바라밀의 지혜는 그렇게 깨달은 지혜가 방편, 원, 역바라밀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객의 이원성이 실제 삶 속에서 실현되고 통합되어서 감각, 느낌, 정서, 인지, 기억 등
마음의 전 영역을 통해서 실천되고 내재화된 지혜다. 그야말로 오온을 비운 상태의 지혜를 말한다.

유식5위 수행에서 본다면 전자는 세 번째 단계인 견도(見道) 수준이고, 후자는 마지막 단계인 궁극적 경지, 법신불의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여섯 번째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에 해당하고 열 번째 지혜는 분별의 지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무분별지가 만물의 근원적 동일성, 일체성에 대
한 이해라면, 분별지는 그러한 동질성이 상황과 조건이라는 인연을 만나서 다시 진공묘유로 드러나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무분별의 지혜는 만물이 본질적으로 연기되어 있으며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일체는 상대, 즉 환경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실제로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온몸으로 체득하고 내재화하지 않으면 미세한 마음의 심층에서는 깨달음 이전에 형성된 업, 즉 과거 기억과 경험, 습관의 힘에 의해서 여전히 압도되고 지배받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가운데 더러는 십바라밀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단계에서 경험한 선정과 지혜가 세속에 오염되고 더럽혀지는 것이 두려워 세속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그들과 떨어져서 고요히 머물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도교적 태도이지 불교적 태도는 아니다.
특히 선(禪)적 태도는 더욱 아니다. 선수행 과정을 묘사한 대표적 가르침인 심우도를 보더라도 주객일여의 8단계는 원래 도교 수행의 최고 단계이고, 선은 그 깨달음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체화하는 9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완성된다.

아직도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을 깨달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지 목적이 아니다. 왜 대승불교가 육바라밀에서 끝나지 않고 십바라밀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진실로 고민해본다면 충분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육바라밀 수
행만으로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고, 전법에 온전히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수 없다. 선정과 지혜를 얻은 단계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고 실천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깨달은 만큼 나누고 실천하는 과
정을 거치지 않고 궁극의 성불을 이루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십바라밀을 종합해보면, 처음에 언급했듯이 십바라밀의 핵심은 첫 번째 바라밀인 보시이다. 보시는 물질, 깨달음,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서로 더불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물질을 탐하고, 진리에 어둡고, 그래서 서로 갈등한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보시를 가장 온전하게, 즉 가장 합당한 것을 가장 합당한 시간, 합당한 대상에게 주기 위해서는 절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계바라밀이다. 팔정도 수행은 대표적인 지계바라밀의 하나이다. 주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주거나 필요 이상으로 주면 상대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때로는 주고 싶지만 상대를 위해서 주지 않고 참아야 하고, 때로는 주기 싫지만 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인욕바라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욕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필요하다. 정진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 보시하는 행위와 마음을 보다 잘 자각하고, 올바른 행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사정근을 통해서 부지런히 제거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동안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이 고요하고 순탄하게 되어 선정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왜곡된 마음이 없는 선정의 상태는 자연스럽게 불이(不二)의 지혜바라밀로 이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우리는 모두 연기적 존재로서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통찰은 자신의 아집을 깨고 세상과 소통하고 깨달음을 몸으로 실천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행함으로 써 얻어지는 것이 방편바라밀이다.

보살은 사무량심과 사섭법 등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편을 통해서 진실로 일체 만물의 깨달음과 행복을 염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원(願)바라밀이다.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사심 없이 오직 세상 만물의 평화와 행복을 갈구하는 진실한 마음은 자연히 주변을 감화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력을 낳는다. 이것이 역(곋)바라밀이다. 그러한 신비력의 체험은 세상 일체만물이 진실로 하나이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체득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궁극의 지혜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것이 지(智)바라밀이다.

우리는 대부분 상황과 맥락, 조건을 무시한 채, 십바라밀 각각을 독립적으로 이해하고 제각각으로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지계의 궁극적 목적이 자타의 웰빙을 위한 올바른 보시를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계를 지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
계를 통해서 좀 더 자비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냉정하고 비판적이 된다. 그 결과 계를 지키면 지킬수록 상대 입장을 배려하고, 소통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꽉 막히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해갈 수도 있다. 그것은 방편을 목적으로 오해할
때 발생하게 된다.

또 더러는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을 실제로 실천 수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관념적, 이론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순서와 뜻을 외우는 것으로 자신이 바라밀 수행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깨달음의 궁극적 목적이 좀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은 연민심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매우 인위적이고 억지로 무리하게 애를 쓰면서 오직 깨달음에만 매달리기도 한다.

물론 십바라밀의 순서가 고정돼 있어 반드시 순차적으로 닦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수행이든 서로 나누고 공유하는 보시의 마음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과 자비심을 얻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__다음 호에 계속

[2013년1월호]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10강 사섭법__서광 스님


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제10강
 
사섭법(四攝法)
치유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마음가짐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사섭법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사용하는 4가지 행동 덕목으로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을 말한다.

사섭법은 사무량심(四無量心 - 중생을 향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고귀한 마음가짐)과 함께 보살 수행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 회향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심리치유적 입장에서 보면 치유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마음가짐, 행동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Freud)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어떻게 정신분석을 통해서 환자의 병이 치료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프로이트가 대답하기를, 치료자가 환자를 사랑하고, 동시에 그 환자가 자기 치료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때, 그때 치료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연구에서 프로이트는 자기가 환자를 사랑했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그 분석은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했고, 치료자는 완전하게 냉정함을 유지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정신치료든 보살의 중생 교화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진실된 사랑의 힘이 갖는 파워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본다면 그 사랑의 개념이나 방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갈등하면서 오히려 치료보다는 더 많은 고통과 병을 만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심리적 원인과 증상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알고 보면 그 마음의 심층에는 사랑과 인정의 갈구가 뿌리 깊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유발하는 보다 진실한 사랑, 이타적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어머니의 사랑 등 수없이 많은 수식어를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붙이면서 진실로 고통을 치유하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사랑의 특질을 정의하려고 애써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단어에 제각각의 개념과 환상을 덧칠하고 오해함으로써 사랑의 기쁨은 잠깐이고 그 후유증으로 긴 시간 갈등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섭법은 사랑의 완성, 그 궁극의 모습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보면, 치유자가 갖추어야 할 최상의 기법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치료자가 환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상적 모델이다. 다시 말해서 치료자가 사섭법으로 환자를 대한다면 환자는 자기 치료자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서 정신분석 치료자와 대승불교의 보살을 비유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다. 왜냐하면 치료자의 길과 대승보살의 길은 그 동기와 과정, 목적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중생을 치유하는 보살의 조건에는 얼마만큼 아집을 버리고 공성을 체득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정신치료자에게 그런 조건은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양자가 모두 고통받고 있고 아픈 자를 치료해주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일정 수준의 목적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서양의 심리치료와 불교수행은 이미 상당 수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온 시점인지라 사섭법의 의미와 가치를 심리치유적 입장에서 들여다보는 것은 불교 용어를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서는 불법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치유자인 보살이 내담자인 중생을 진실로 사랑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보살이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네 가지 방편을 살펴보자. 첫째, 보시섭(布施攝)이다.
 
보시는 중생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법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살이 중생에게 보시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양을 허공에 비유했다. 허공은 생각도 알음알이도 없는 것처럼, 보살인 치유자가 내담자를 향해서 베푸는 보시도 모든 생각, 계산에서 자유롭다. 허공처럼 보시하는 행은 한계가 없고 조작도 없으며 보시한다는 의식이나 생각이 없다. 또 겁내거나 인색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더 주거나 덜 주는 차별이 없고 거만하지 않다. 그와 같이 보살이 하는 보시는 아집이 없는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보시하는 적절한 때와 대상, 내용은 중도와 연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둘째는 애어섭(愛語攝)이다. 애어는 온화한 모습과 부드럽고 친절한 마음을 담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서 중생의 마음을 법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켜주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과 따뜻함이 가득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거친 마음을 치유하고 편안하게 머물게 만든다. 가깝거나 먼 사이, 현실적인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랑스러운 말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내재된 고귀하고 성스러운 불성, 즉 자신의 본질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 번째는 이행섭(利行攝)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조화롭고 균형 있게 드러나야 한다. 보살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선행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법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이론과 치료 조건에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서양의 심리치료와는 달리 보살이 중생을 치유하는 이행섭은 조건이나 이론이 없다. 보살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치료 방편의 제한에서 자유롭다. 먹을 것이 필요한 이에게는 먹을 것으로 이익 되게 하고, 불안한 이에게는 편안함으로, 병든 자에게는 약으로 이익 되게 돕는다. 악한 마음을 품은 자에게는 선한 마음을 품도록 도와준다. 이행섭을 통한 보살의 치유는 이론이나 글자에 매이지 않고 오직 법의 이치에 맞게 신구의 삼업을 사용함으로써 고통받는 중생이 고통의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수행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네 번째는 동사섭(同事攝)이다. 동사섭은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몸을 나퉈 중생의 수준에서 함께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그들을 법의 세계로 이끌어 들인다. 보살은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으로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고, 몸, 말, 생각으로 중생과 공감하고 공명함으로써 화신불이 되어 그들을 법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치유라는 말이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는 나머지 아예 치유라는 번역어 대신 힐링(healing)이라는 말을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만큼 치유의 방법이나 목적도 다양해지고, 치유자의 자격이나 능력, 조건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치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섭법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방법이나 기법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섭법을 사용하고 적용하는데 특별한 자격이나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과 의사나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을 밟고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돈,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무수한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치료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일에 사람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지의 여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을 돕고 치료하는 일이지만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지, 치료자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지, 자비심이 풍부한지 그런 능력을 배양하거나 평가하는 일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다.

불교에서 치유자가 되는 길은 의외로 단순하고 특별한 자격이나 훈련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다만 반드시 갖춰져야 할 조건이라면 인간 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심리치료에서 치료의 효과, 중생 교화의 근본 능력은 보살·치유자가 얼마만큼 자기(ego), 아집에서 자유로운가에 달려 있는데, 불성에 대한 견고한 믿음은 자신의 에고(ego)를 내려놓게 하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의 일차적 관심은 중생의 고통과 증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고통의 보다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 그 고통과 증상 이면에 숨겨진 근본 뿌리인 무지를 치유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인 불성을 만나고 깨닫도록 돕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하여 치유가 단순한 고통이나 증상의 제거에서 끝나지 않고, 고통이 거름이 되고 변환되어 불성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단과 방편 그 자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삶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중생의 고통이 보살의 사섭법이라는 묘약을 만나 삶의 디딤돌로 전환되는 과정을 고통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뗏목인 10바라밀과 대비시켜 보면, 첫 번째 보시섭을 인연의 시작으로 해서 애어섭은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을 바탕으로 할 때 가장 올바르게 작용할 수 있다. 또 올바른 이행섭은 정진, 선정, 지혜바라밀을 의지할 때이고, 동사섭은 나머지 4가지 바라밀, 즉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바라밀로써 행해져야만 가장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섭법의 각각에 10바라밀이 온전히 갖춰져 있어야 하고, 사섭법 각각 또한 각각이 아니라 보시섭에 애어섭과 이행섭과 동사섭이 함께 녹아 있어야 할 것이다. 애어섭은 다시 보시섭, 이행섭, 동사섭이 들어 있어야 하고, 나머지 이행섭, 동사섭도 마찬가지다.

‘팔만사천 법문’이라는 말처럼 불교는 사실 수단과 방편이 너무 넘치고 많아서 웬만큼 마음을 내서 공부를 시작한 사람조차도 때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지, 막연할 때가 있다. 더러는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많다. 그만큼 치유 기법은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하다. 어떤 가르침들은 많은 공부와 수행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전 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그냥 곧장 실천수행으로 옮겨도 크게 무리가 없는 수행법이 사섭법이 아닌가 싶다. 이제 막 시작한 초보자나 고참 수행자나, 수행의 도가 높은 자나, 전혀 없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불성에 대한 믿음만 견고하다면 누구든지 당장 시작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최상의 수행법이 아닐까 여겨진다.            
 
사섭법은 이제 막 시작한 초보자나 고참 수행자나, 수행의 도가 높은 자나, 전혀 없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불성에 대한 믿음만 견고하다면 누구든지 당장 시작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최상의 수행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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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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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범문 3일쨰 -1

2013. 2. 5.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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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읽기 2일째

2013. 1. 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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