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자존감의 차이
 
얼마 전 은퇴한 한 여자선교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저는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물론 저도 저 자신을 존중하고 싶지만 하나님은 저의 이런 교만을 인정해 주시지 않을 것 아니겠어요?”라고 말 하는 겁니다.
이 분은 지난 40년 동안 외국에서 충실하게 선교사로 일한 분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그 신실함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도저히 따르기 힘들 정도이지요. 이런 분이 자신의 무가치함 속에 빠져 자신의 가치를 비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벌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7가지 중 교만한 눈을 첫 번째로 꼽은 데서 보듯이 인간의 교만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너무 뽐내고 또 거만해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미워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자존감은 우리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아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를 하기 위함이지요. 다만 이 자존감이 세상의 가치와 맞물리면서 우리를 교만의 죄악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사탄의 유혹에는 단호하게 대적해야겠지요. 그래서 무조건 첫째가 되라고 가르치는 세속적인 성공 철학이야말로 우리의 자존감을 교만이라는 죄악 속으로 떨어뜨리는 사탄의 전략임을 이 아침에 우리 모두가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만과 자존심

 


성경: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는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던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옆집의 친구에게 '우리집 닭이 너희 집에 가 계란을 낳았으니 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집 아이가 들어가서 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쪽집 아이가 거짓말 하지말고 순순히 내 놓으라고 합니다. 정말 없었다고 말하니 그 말을 못 믿겠다고 하면서 분명히 알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알이 있다 없다 하면서 서로 터지도록 서로 붙어 싸웠습니다. 이것을 보고 엄마들이 싸웠습니다. 머리를 잡아 당기면서 서로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들이 가세하여 싸우니 아버지들끼리 또 싸웠습니다. 너무 화가난 나머지 한쪽 편의 아버지가 저쪽 집에 그만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불이 번지더니 한번 바람이 획 돌아 불어서 이 쪽 집도 다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잿더미 위에 앉아서 별을 쳐다보면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이제 반성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하고 생각해 봅니다. 계란 하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계란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 깊히 들어있던 자존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말해 그같은 끔찍한 참사의 원인이 계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존심과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재난의 원인소설 중에서       - 톨스토이 지음 -

 

 

 담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은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 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그것을 본 이 쪽 집 아이가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가서 알을 낳았으니

빨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 아이는 집에 들어가 보더니 달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알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크게 싸웠습니다.

이것을 본 엄마들도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웠습니다.  

싸움이 번져 이번에는 아버지들까지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화가 나서 저쪽 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어 오는 바람에 이 쪽 집도 타버렸습니다.

그들은 잿더미에 앉아 별을 쳐다보면서 후회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싸웠는지 거슬러 생각해 보니 자기들의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교만한 자존심이 두 가정을 몰락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영만의 體認知]<268>자만과 교만, 거만과 오만, 4형제의 대화

 
 

하루는 막내 자만(自慢)이 교만에게 자신의 장기와 재능에 대해서 한껏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증명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자랑 일변도였다. 자기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익숙해지면서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자만(自慢)이다. 자만은 겸손함을 잃고 자신만만함이 도를 넘어서는 순간 찾아온다.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과신한 나머지 중심을 잃은 상태다. 주로 자만은 과시욕에 사로잡혀 생기는 불청객이다.

이에 질세라 교만(驕慢)은 자만이가 갖고 있는 자만심에 더하여 교태스러움까지 겸비해서 시건방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자만은 바로 위 형인 교만에게 단칼 승부에 굴복하고 말았다. `자만`이 더 극에 달하면 `교만(驕慢)`해진다. `교만`은 자신의 지위 높음을 자랑하여 뽐내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뜻을 담고 있다. `자만`은 자신감이 역기능으로 작용해 겸손함을 잃은 상태지만 `교만`은 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잘 났는지를 못 봐줄 정도로 뽐내면서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교만의 바로 위 형인 거만(倨慢)이가 나왔다. `거만(倨慢)`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거들먹거린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교만`이 자만심에 교태스러움을 겸비한 자세와 태도를 지칭한다면 `거만`은 교태스럽지는 않지만 행동거지 표정이 상대의 기분을 건드릴 정도로 업신여기고 지나치게 거들먹거리는 경우를 지칭한다.

자만과 교만, 그리고 거만함의 수준을 넘어서면 이제 오만(傲慢)해진다. 오만은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겸손함을 잃고 불쾌감을 줄 정도로 시건방지게 행동하는 불치병에 가깝다. 오만은 불손과 교만은 방자와 어울린다. 그래서 오만불손(傲慢不遜)하고 교만방자(驕慢放恣)하다는 말을 쓴다.

자만과 교만, 거만과 오만을 포함하는 한 문장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 높음에 자만하여 교만하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행동거지의 거만함은 어른도 몰라보는 오만의 극치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흐르기 전에 자기의 존재이유를 파악하고 자존심에 상처받기보다 자존감을 회복하여 자기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기 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경식(남, 30세, 지체1급, 경북)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16년도 더 지난 그날의 일들이 악몽처럼 생생히 되살아난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신경이 마비되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전기톱으로 내 왼쪽 다리를 절단하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트라우마로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당한 교통사고로 경추를 다쳐서 나는 전신마비가 되었다. 손가락은 힘없이 갈고리처럼 굽었고,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는 골수염으로 잃었다.

아무런 통증도, 감각도 없었다. 그저 마른 나무토막처럼 내 몸은 굳은 채 뻣뻣하기만 했다. 유명하다는 재활병원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도, 걸을 수도 없었다. 오랜 병원생활로 정신과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 할 검사비와 치료비로 퇴원하고 집으로 왔지만,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몇 시간도 살 수 없었다. 혼자서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했고, 옆으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자식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는지 매일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이윽고 집을 나가셨다.

어머니 혼자서 힘든 농사일을 하며 나를 간호해주셨다. 어느 날은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면 건강했던 자식 모습이 생각나셨는지 말없이 울기만 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울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 심장은 쥐어짜듯 아팠고, 우리 집이 불행해 진 것이 전부 내 탓인 것 같아 자책하며 괴로웠다.

중증장애인이 된 내 모습을 남들 앞에 보이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좁은 방안에 틀어박혀 현실을 부정하며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나지?’,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한데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지?’ 라고 생각하며 불평불만을 달고 살았다.

하루는 휠체어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나는 욕창이 생긴 것도 모르고 뒤늦게 알았다. 살이 썩어 들어가도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욕창은 쉽게 낫지 않았다.

결국 욕창수술을 하였다. 수술만 하면 끝날 거라는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술이 잘못되어 다섯 번의 재수술과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하루 종일 침대에 엎드려서 지내야 했는데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듯이 숨이 막히고 힘들었다. 다행히 시간이라는 소중한 약으로 상처는 아물었지만, 또 다시 욕창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얼굴과 몸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두세 시간 이상 앉을 수 없었다.

절망이라는 깊숙한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나 싶어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목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교회에 달려가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 모자(母子)에게도 언젠가는 웃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자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던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책이었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무작정 하나 씩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감명 깊은 구절이 있었다. 유대교의 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중 ‘다윗 왕의 반지’라는 일화였다.

어느 날, 다윗왕의 부름을 받은 궁중의 세공인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지나치게 들떠 오만하지 않도록 하고, 패배를 겪었을 때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글귀를 반지에 새겨오라는 명령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을 때 자칫 빠지기 쉬운 교만을 이기고, 실패와 치욕과 가난 속에서도 절망하며 쓰러지지 않는 용기와 희망을 북돋울 수 있는 글귀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세공인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솔로몬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솔로몬이 그에게 일러주었다는 보석보다 귀한 한마디는 훗날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까지 많은 이가 좌우명으로 삼게 된 그 경구는 다음과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 또한 지나 가리라 - This too shall pass away

그때부터 앞으론 ‘감사하게 생각하자!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렇게 다짐하고 마음먹으니까 차츰 내 인생의 마인드가 바뀌었다. 김별아의 에세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바닥이라고 불리는 지점은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진 상태를 말한다. 즉,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하지 못하고 함부로 방치하거나 내던지는 것이다. 어디가 바닥인가는 사람마다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 무엇 때문에 그 바닥을 경험하게 되는가도 각각의 사연과 사정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바닥에 머무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썩은 고기를 씹듯 질근질근 고통을 곱씹으며 계속적으로 나 자신을 파괴하는 일, 혹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과 상황을 들춰내어 비난하고 저주하는 일을 당장 멈춰야 하리라. 이 모두가 잠시 나에게 일시적인 위로나 도피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같은 바닥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에 따라 누군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누군가는 그 바닥마저 긁어 땅굴을 판다. 어쩌면 잔인하고 냉정한 진실이지만 고통에 직면하여 가장 빨리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고통의 본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 또한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내게서 비롯하여 내게서 끝맺음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내 경험상 장애를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부정적이었던 생각을 먼저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도 필요하다.

요즘 나는 김천시장애인복지관에서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받고 있으며 손에 보조기를 끼고 컴퓨터도 배운다. 컴퓨터로 내가 쓴 글을 읽고 누군가 삶의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글을 잘 써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게 나의 꿈이자 목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겪었던 아픔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으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말하기를 “태양이 바깥에 있으면 반짝이며 빛나지만, 어둠이 깃들면 안에서 비추는 빛이 있어야만 참다운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들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숨겨진 재능을 한번 찾아보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 가치를 드러내보기 바란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다시 밝은 빚이 나타나듯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와 여우” 이야기입니다. 숲의 개구리가 어느 날 동물들을 향해 큰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모든 병을 치료하는 법을 다 알고 있다." 지나가던 여우가 말했습니다. "너의 그 교만병을 치료하는 법은 무엇이냐?" 오늘의 시대는 '자기 피알(PR) 시대'입니다. "나는 모든 병을 치료하는 법을 다 알고 있다."라고 선전하지 않으면 관심도 끌지 못하고, 개원한 병원은 빚더미에 쌓여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삶을 숭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지배하는 삶을 위해서는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능력을 알리므로 주목을 받고, 뜨라고 말합니다. 글로벌 경쟁력 시대에 겸손은 성장의 장애물이며, 힘을 매개로 한 문화 속에서 지배의 힘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스타를 만드는 문화에서 자기선전은 미덕이고, 자기선전 없이 스타가 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만은 항상 내가 좋아하는 미덕 중 하나였다...나는 인간의 교만을 위축시키는 모든 것을 경멸한다."고 여배우 데임 시트웰은 말했을 것입니다.
교만의 정의를 자경심(自敬心)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교만은 ‘악덕’이 아니고 ‘미덕’이며 더 이상 '좌천'의 원인이 아니라 ‘승진’의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솝 때 뿐 아니라 오늘날 스타를 숭배하고 자기 PR이 생존의 필수가 된 시대라고 하지만 교만이 미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만은 자존심, 자아 존중감, 자기 알림 등과는 다른 의미의 말입니다. 교만은 단순하게 자기를 들어내거나 자신을 높이는 것보다 자신의 상태를 사실 이상으로 확대 평가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요,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감정입니다. 더 나아가 교만은 불합리한 자기 이해, 과도한 자기만족, 지칠 줄 모르는 자아도취로 일종의 자기 숭배입니다. 그레고리 대제는 7가지 죄악을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이라고 나열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 중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는 표현했습니다. 교만 이외의 다른 모든 죄악들은 교만 때문에 파생된다는 의미입니다. 교만은 이 세상의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 갈등, 파괴, 단절, 적대 등의 자식을 낳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불행을 일으키는 마음의 핵심에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마음의 문제이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교만은 죄의 한 특성이라기보다는 죄의 본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함으로써 교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외 없이 스스로를 높이고자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다 높아지려는 영적인 암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가 때가 되면 드러납니다. 돈과 권력, 명예, 지식, 미모 등이 주어지면 추한 옷으로 노출됩니다. 지나치게 거드름을 피우게 됩니다. 이기심, 거만, 방자. 자기 본위, 허영심, 자고함, 건방짐, 무시, 독선, 자랑, 잘못된 자부심, 자기만족, 자기중심주의 등등의 누더기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래서 안하무인이 되어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닫습니다.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기 싫어하고 자신이 최고의 권위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막아 영적 장애자인의 자리에 머물면서도 다 되었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과도한 욕심이 스스로 긴장과 피곤을 가져다줍니다. 자신의 교만을 꺾는다든지 받아주지 않으면 쉽게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여 상처를 줍니다. 성경은 교만이 죄의 실제적 근거이며(사 2:6-22), 악한 자의 특징이라고 말씀합니다(시 5:5, 잠 8:1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멀리 하십니다(잠16:18, 벧전5:5, 약4:6).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을 예비하셨습니다(겔31:10, 사2:12-17).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교만은 이 세상에 들어온 첫 번째 죄이지만 그것은 또한 정복되어야 할 마지막 죄이기도 합니다. 교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어떤 공동체도 건강하게 존속될 수 없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암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속이는 죄악입니다. 교만은 자기숭배에 빠지게 합니다(눅18:9-12). 교만은 끊임없이 스타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의 인기에 예수님은 영합하지 않았습니다(요6:15). 베드로나 바울도 자기들을 향해서 절을 하거나 경배하려는 스타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행10:26,14:15). 그러나 헤롯왕은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무리들에게 넘어가 파멸했습니다 (행12:22-23). 교만은 남을 멸시하게 합니다(눅18:9, 11).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눅18:11, 13; 창3:5).

보이지 않는 교만이라는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바로 알고(요1:20, 23)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눅18:13-14; 15-17), 자신의 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눅18:13) 권력, 명예, 지식, 미모 등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9.5

 

 

 

Posted by 돈오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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