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가고시마에는 도미야여관富屋旅館이 있다. 이곳엔.. 가미가제특공대와 호타루에 대한 사진이 많이 있다고 한다.
호타루(반딧불이)가 된 한국인의 사진도 있다.
그 여관의 호타루 전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그는 일본의 자살특공대원 중의 한사람이었고, 마지막 출격전에.. 여관 아주머니에게 영혼이 있다면 반딧불이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여관에는 반딧불이가 몰려들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어 죽은 그 한국인은.. 친일파라고 해야 할까? ..
그 당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도 있고, 앞장서서 일본을 찬양한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일제에 항거한 투사들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간인들은.. 투사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은..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하로 간다면, 일제에 항거하여 가정을 버리고 고문과 죽음을 견디며 감옥이나 어두운 곳에서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
그저 삶이 이끄는데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들의 삶만으로도 벅찰 따름이다.
일제 강점기하에는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 노역을 하거나 일본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된 사람들.. 많이 사람들이 일본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단지 일본에서 (일본을 위해서?) 일한 것이 친일이라면.. 그 모든 일본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모두 친일파라고 해야 마땅하다.
다시 돌아와 보면. 어쩔수 없이 징용되고, 출격전에 죽음을 예감하며,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그 한국인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고있었을 따름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한 일은, 군인이었을 따름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의 한 여관에 붙은 한국인 가미가제를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를 비판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여행을 다녀왔다. 한결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 인연처럼 만난 사연 하나가 가슴에 애련하다. 지란(知覽)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여관 복도에 65년 동안 걸려 있는 한국사람 사진 한 장.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沈壽官)' 도요지와 도자기를 보는 것이었다. 일정에 시간 여유가 있어 관광안내소에 상담을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란이란 곳을 추천해 주기에, 그 자리에서 관광지도 한쪽 구석 맨 위에 올라 있는 도미야여관(富屋旅館)이란 곳에 전화로 예약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한 지란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 여관부터 찾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인 손님이 길이나 헤매지 않을까 문밖까지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부부 둘밖에 없는, 오래된 조그만 여관이었는데, 현관에서부터 특공대(特攻隊)와 '호타루(반딧불이)'에 관한 액자와 문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오래전, 한 한국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안 주인 도리하마 하쓰요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악명 높은 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도리하나 도메)가 이 집에서 식당(食堂)을 하고 있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한국명 탁경현)라는 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도 면회 오는 이가 없었던 그와 모자(母子)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는 출격하기 전날, 작별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한 서린 목소리로….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녀가 그를 위로하자, "만일 제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반딧불이 되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출격했고, 태평양에 몸을 던진 그날 밤, 그가 앉아 있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이후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러 해 전에 일본에서 '반딧불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계속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혹시라도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유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사진만 저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유족을 만나든지, 그의 고국으로 사진이라도 전해주고프다며…. 지금은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자기와 딸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하쓰요씨는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며 아린 얘기들을 끊임없이 가슴에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들 사이에 빛바랜 낡은 그 사진 한 장이 애처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을 그 사진이, 이국(異國)의 시골 한구석,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피의 한국사람들조차 발길 하지 않는 이 조그맣고 오래된 여관 벽에 65년이나 걸려 있어야 하다니….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희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가슴이 미어졌다.
역사의 구렁텅이에서 '가미카제'라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나갔던 그를 누구는 친일파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울며 마지막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래였을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묻고, 그 영혼조차 긴 세월을 이국의 구천(九泉)에서 떠돌아야 했으니…. 암울했던 그 시대에 어찌 억울한 영혼이 그 하나뿐이랴! 울음을 삼키려 고개 숙이고 부른 그의 아리랑이 오늘도 나의 가슴을 울린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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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일본 시골 여관에 65년째 걸린 사진 한 장 최길시 前 성남 분당중 교장 | 2010/12/09 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