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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건염

2014. 5. 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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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성건염

2014. 5. 1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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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5564

만인의 연인, 소피 마르소 “열 넷에 스타 된 것, 끔찍한 고통이었다 ”

[조인스]
[j Story] 80년대 ‘책받침의 여왕’ … 청춘들 설레게 했던 배우, 소피 마르소
기사입력: 01/27/2012 08:45
그땐 그랬다. 1970~80년대엔 스타들의 팬클럽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어 연예인의 동정을 실시간으로 알 길도 없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예쁜 여자배우가 환하게 웃는 사진을 비닐 코팅해 책받침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마치 그와 특별한 인연이 된 것 같았다.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46·Sophie Marceau).

그는 지금 마흔 언저리의 많은 이에게 ‘책받침의 여왕’으로 기억된다. 80년 당시 영화 ‘라붐’의 주인공이었던 열네 살 소녀는 ‘청순미의 대명사’였고, ‘국민 여동생’ 그 이상의 우상이었다. 그 추억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후 ‘유 콜 잇 러브’ ‘브레이브 하트’ ‘007 언리미티드’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청순한 첫사랑’처럼 남아 있다. 지난해 12월 화장품 디올의 광고 모델로 도쿄에 들른 그와 인터뷰를 잡았다. 얼마나, 어떻게 변해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똑.똑.똑.

사진=디올 제공

한껏 차려입었으리라는 첫 예상부터 빗나갔다. 검은색 바지 정장, 안에는 흰색 면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구두 역시 지극히 ‘실용적’이었다. 불편한 킬힐 대신 통굽 부티(복사뼈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맨발이었다. 의례적 인사를 하는 와중에 신경은 딴 데 팔린 듯 보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좀 전까지 있던 카드를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란다. “괜찮다”고 했지만 소파에 앉아서도 의자 틈새로 손을 넣어 연신 카드를 찾아댔다. 같은 연배 여성들의 ‘깜박깜박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뭘 잘 잊어버리나.

 “아, 이런 게 늙어서일까(웃음).”

●여배우라서 늙는 게 더 두려울 것 같다.

1980년 데뷔작 ‘라붐’
1980년 데뷔작 ‘라붐’
1988년 ‘유 콜잇 러브’
1988년 ‘유 콜잇 러브’
 “아니다. 내게 가장 두려운 노화현상은 오히려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뭔가 멈추는 것이라 그렇다. 겁이 난다기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요즘은 모두가 늙어 가는 자체를 싫어하는데.

 “나라도 그게 좋겠나. 하지만 나이 든다는 건 그만큼 이점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게 너무 좋고, 모든 분야를 경험해 보지 않고도 지름길이 뭔지 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을 땐 시간과 돈을 들여 어떤 화장품이 내 피부에 맞고 효과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마흔 가지 비슷비슷한 크림을 테스트해 보고 버리고 할 필요가 없다. 또 나이가 들면서 ‘내가 누구인지’ 자주 생각해 보게 되지 않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을 느리게,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결론을 얻게 될 때도 있다. 그것은 황금 이상의 가치, 신문에서도 읽을 수 없는 나만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지금이 20대 때보다 편안하다는 소리로 들린다.

 “물론이다. 나는 굉장한 경험들을 해 봤지만 걱정 없이 태평한 젊은 시절을 누리지 못했다. 종종 너무 심각하고 힘들었고, 또 쓸쓸했다. 어렸을 때부터 걱정이 넘치는 타입이었다. 너무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중요하게 여겼다. 나이 들면서 내가 더 느긋해졌다고 못 박을 순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양보’라는 걸 하게 됐다. 어떤 일은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자세 말이다.”

 그가 80년 데뷔했을 때 꼭 배우가 되리라는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획사의 소개로 영화 오디션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다. 지원자가 700여 명에 달해 별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스크린 테스트, 대본 읽기를 거쳐 주인공을 거머쥐었다. 영화 ‘라붐’에서 막 사랑에 눈뜬 13세 소녀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고, 그에게 영화·광고 제의가 순식간에 쏟아졌다.

●한국인들은 ‘라붐’ 속 소녀로 당신을 기억한다.

 “프랑스에서도 30년이 지났지만 비슷하다(웃음). 아주 어릴 때 누구를 좋아하면 그 감정이 오래가는 거 같다. 성인이 되기 전, 사회에 나가기 전 천진하고 감정적이고 아무 이익도 따지지 않는 상태라 아주 순수한 거다. 그래서 보통 첫사랑이 오랜 추억이 되지 않나.”

●청순한 이미지가 너무 잘 맞아서 아닐까.
“내가 청순하다고? 전혀 아닌데. 사람들이 그냥 배역을 나와 동일시하는 거다. 그것이 완전히 내 실제 모습과 다른 건 아니지만 완전히 똑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꼭 어느 한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껏 연기한 모든 것이 퍼즐 조각처럼 모여서 나를 이룬다.”

●그래도 데뷔작부터 큰 인기를 얻어 기뻤겠다.

 “힘들었다. 정말 끔찍했다. 갑자기 물밀듯이 뭔가가 막 밀려 들어와 내 삶의 모든 걸 잠식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고 이해할 수도 없었을 거다. ‘라붐’과 관련된 스토리 자체가 어른들에게는 행복 자체였으니까. 갑자기 영화 하나로 일약 스타가 탄생하고 영화계에선 어린 배우를 발견했다는, 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그때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 흥이 깨질 것이 분명했다. 말할 수 없었다. 혼자 그 고통을 겪어야 했다.”

●혼란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있나.

 “84년 안드르제이 줄랍스키 감독이 ‘미친 사랑’이란 작품을 해 보자고 제의해 왔다. 난 그때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더 이상 ‘라붐’처럼 13세짜리 소녀 역할을 할 수도 없던 터라 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은 마치 나를 끌어당겨 주는 손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 배우로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라붐이 안 떴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라붐의 오디션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배우는 결국 내게 잘 맞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릴 땐 배우를 하면서 자유가 없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오히려 내가 더 자유스러운 인생이었구나 느낀다. 평범했다면 여러 인생을 산다는 게 가능하겠나.”

●그러면서도 감독을 왜 했나(95년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9분짜리 단편을 내놓으며 감독으로서 신고식을 치렀고, 2002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는 ‘사랑한다고 말해 줘’로 최우수감독상을 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배우라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고 다른 것도 필요했다. 뭔가 창조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랄까.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하면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거나 뭔가 창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무언가를 연기할 때 창조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연기자들은 그들을 해석하기 위해 감정과 몸을 쓰지만 그것이 그들의 메시지는 아니다.”

  그는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폴란드 감독인 줄랍스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뱅상(17)과 두 번째 연인이었던 프로듀서 짐 렘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쥘리에트(10)가 있다. 지금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는 2007년 영화 ‘트리비알(원제:La Disparue de Deauville)’에서 감독·배우로 만나며 사귀게 됐다.

●당신의 연인은 어떤 사람인가.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아들은 가끔 내게 ‘엄마, 오늘 멋진데요’라고 말한다. 꼭 램버트가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는 매우 달콤할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여자다. 내 삶을 연인과 함께 나누고 싶지만 언제나 내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내가 너무 독립적이라고 말한다. 그저 나를 연인의 껌딱지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나는 두 사람이 각자의 기반에서 지내는 게 좋다. 그래야 더 행복하다.”

●엄마로서도 독립적인가.

 “내가 엄마일 땐 소피 마르소가 아니다.”

●무슨 뜻인가.

 “그냥 엄마다. 아이들은 내가 배우라는 걸 잘 알지만 난 그 직업의 굉장히 복잡하고 정신없는 상황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다. 그리고 여배우로서 뭔가 쉽게 접근하기 힘든 신비감보다는 현실 속에서 보통 엄마로서의 모습을 늘 보여 주려 한다. 그래서 요리도 직접 하고, 늘 학교에 데려다 주고, 시간을 내 놀아 주려 한다. 어떨 때는 막 소리 지르면서 화도 낸다. 엄마가 스타라는 모습을 오히려 감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이들이 ‘엄마가 배우로서의 직업보다 자기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소피 마르소의 유년 시절을 떠올랐다. 아이들 역시 엄마를 꼭 빼닮은 우월한 미모에 배우의 끼를 물려받지 않았을까. 자식 자랑의 기회도 줄 겸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한데 그는 정색하며 "배우는 꼭 예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원칙도 분명히 했다. 아이들이 배우를 하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겠지만 일단 괜찮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나와 달리 스스로 진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더했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엄마로서의 당신 얘기를 들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

 “내 아이들이다. 전에 숲을 꾸민 적이 있다. 부모님이 은퇴를 대비해 코레즈(프랑스 중부 도시)에 사 둔 가족 소유지였다. 미송, 구주소나무, 금송, 단풍나무, 북미산 참나무 등등을 잔뜩 심었다. 그곳에는 원래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전 소유주가 꽃상추를 심기 위해 나무들을 죄다 잘라 버렸다. 세월이 흘렀고, 이젠 무성한 숲이 됐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아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도 아이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끈끈한 연을 맺으면서 말이다. 특히 아들과는 진짜 서로를 이해한다고 느낀다.”

한국 목욕탕 왔던 그녀 … 마흔 여섯에 미모 유지하는 비결

실제 만나 본 그는 젊어 보였다. 앳된 모습을 보여 줬던 과거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의 모델답게 잡티·주름이 적고 탄력도 좋았다. 배·팔뚝에도 ‘나잇살’이라고 할 만한 군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관리 비결이 궁금하다.

 “나는 미모 때문이 아니라 아픈 게 싫어 몸매를 관리한다. 신체적 능력을 젊을 때와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려는 거다. 나이 들면서 비타민을 꼭꼭 챙겨 먹고 있다. 담배도 끊었다. 먹는 것에 신경도 쓰고 운동도 한다. 일정 기간 규칙적으로 운동하다가 에너지가 모자란다 싶으면 쉬기도 한다. 몸을 예쁘게 하는 데는 자세 역시 중요하다. 사람들을 볼 때 앞이 아니라 뒤를 보면 진짜 나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트레이너와 함께 스트레칭도 한다.”

●잔주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가·입가 주름이 없을 수 있나. 하지만 촬영할 때 조명이 좋으면 그 정도는 없는 듯 감출 수 있다. 그렇다고 주름이 보일까 봐 너무 사진 보정을 하면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웃음).”

●보톡스에 대한 생각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 양(量)이 중요한 것 같다. 레드와인도 두세 잔 마시는 것과 두세 병 마시는 게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여담이지만, 그는 한국에 대한 추억으로 목욕탕을 얘기했다. 옷을 벗은 여자들끼리 자연스럽게 몸을 닦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것. 유럽 여자들이 수영장 탈의실에서조차 뭔가 불편하게 행동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더구나 한국 여자들이 가져온 목욕제품들은 향이 별로 없어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부드럽고 세심하고 우아한 한국 여자들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고 설명했다.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

소피 마르소와 더불어 1980년대 ‘책받침 여왕’으로 꼽을 만한 외국 여배우들이 더 있다. 피비 케이츠(49)와 브룩 실즈(47)다. 이들을 두고 당시에는 ‘3대 트로이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피비 케이츠는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동양적인 외모를 지닌 청춘스타였다. 83년 데뷔작인 ‘파라다이스’에서 검은 머리의 미소녀가 맑고 푸른 물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화제가 된 장면. 이후 영화 ‘프라이빗 스쿨’ ‘그렘린’ 등에 출연하며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지닌 최고 스타의 자리를 굳히지만 85년부터 돌연 브로드웨이로 영역을 옮겨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89년 배우 케빈 클라인과 결혼한 뒤 세 아이를 낳았고, 연기 활동보다는 결혼 생활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005년엔 뉴욕 매디슨 거리에 ‘블루 트리’라는 선물가게를 열기도 했다.

 브룩 실즈는 77년 열두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프리티 베이비’에 출연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후 최고의 미녀라는 극찬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 특히 80년대 출연한 영화 ‘푸른 산호초’ ‘끝없는 사랑’ ‘사하라’ 등은 그녀의 강렬한 매력이 더욱 돋보였던 작품이다. 하지만 20대 후반 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흔히 ‘거인증’이라고도 불리는 ‘말단비대증’에 걸린 것. 이 병은 뇌하수체에 성장호르몬을 과다 분비하는 종양이 생겨 신체가 거인처럼 커지는 건 물론이고 장기까지 과다하게 성장해 각종 합병증을 유발하는 희귀질환이다. 하지만 브룩 실즈는 턱과 광대뼈를 지속적으로 깎아내고 약물 치료를 하면서도 연기 활동을 지속했다. 2010년에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퓨리 벤젠스’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97년 테니스 스타 앤드리 애거시와 결혼했다 2년 뒤 헤어졌고, 2001년 방송작가인 크리스 헨치와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다.

j 칵테일 >>
“김정일 사망, 한국엔 영향 없나요 ?”


소피 마르소가 ‘색깔’ 있는 배우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08년 영화 소개와 관련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가 극우 정치인인 장마리 르펜이 같은 날 출연한다는 얘기를 듣고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펑크 낸 적도 있다. 이번 만남에서도 정치·국제뉴스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는 속사포 같은 프랑스어로 통역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표정도 진지했다. 무슨 얘기였을까. 그것은 ‘북한의 김정일 사망에 대해 남한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남한 사회에 특별한 변화는 없는지’ 등을 물어본 것이다. 옆에서 그의 매니저가 “북한에 폭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끼어들자 그는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정색하며 대꾸하기도 했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 아이들이다. 일단 너무나 사랑하고 날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일단 이 아이들을 낳은 이상 정상적으로, 고통 없이 키우는 게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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