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고 나서 책 이야기

2006/01/03 16:20

복사 http://blog.naver.com/iezzb/120020955620

전용뷰어 보기

 

도서관에서 죽은 자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서재에서 죽은 자의 영혼과 밤새 혼인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서재는 말 많은 자들의 공동묘지. 어느 날, 햇살 가득한 서재에서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보면서 깔깔거릴 수도 있고, 카프카의 <변신>을 발가락 사이에 넣어 빙빙 돌릴 수도 있다.  책은 죽은 자의 입 냄새로 가득한 무덤이기에 가능하지 않던가.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첫 소설집을 내 놓고 몇 천권이나 되는 책이 전국 서점에 전시되었다는 생각에 몸들 바를 몰랐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내 영혼들이 조각이 나서 흩어지다니! 어서 가서 이것들을 죄다 모아와야만 할 것 같았다. 1000피스, 2000피스, 이것들을 조합하면 그럴싸한 내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내가 양산한 죽은 척 하는 것들을! 

 

그래서 자주 서점에 나가서 누워 있는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을 만져보곤 했다.  "너는 여기에서 잠들었지만, 조만간 타인의 뇌리에 박혀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야." 라는 희망을 던지며. 때론 너들너들한 표지를 점원에게 보여주면서 새 책으로 바꿔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책 안에는 1997년 명동을 쓸고다니던 은행잎 똥냄새도 있고, 1998년 청파동이 개똥냄새도 있고, 습기 먹은 종이들이 마르면서 남태평양의 캐캐한 냄새를 풍길지 모르니 어서 새 책으로 배꿔 달라고. 그리고 낡고 병든 책을 집으로 사왔다. 밤새 그 책을 들여다보면서 밤새 평형봉에 매달려 몸을 흔들어대던 1999년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흔들면 허공으로 붕 날아가 버릴 것 같던 영혼, 그것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무거운 몸. 다시 돌아 온 책을 베고 누워 절단, 도둑, 강도, 뭐 이런 단어를 몇 번씩 되뇌이다가 내가 이 책 한권으로 기억의 꼬리를 자르고 다시, 뭔가 다시 삽질을 해야 겠다는 의지를 발견했다.

 

그 후, 일상은 그지없이 평온했다.

 

내 책이 로브그리에와 등을 맞대면 다소 무거워 질 것 같다는 생각, 카프카 보다는 아래에 둬야 한다는 생각, 최인훈 선생보다는 두 칸 아래, 최수철 선생보다는 한 칸 아래, 이렇게 하다보니 <강아지 이름 짓는 법>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책과 서 있는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였다.

 

이런 약간의 불안을 제외하고는 아무른 희노애락이 없는 책이었다. 간간이 전화가 와서 다음 책을 묻는 후배들에게 삶은 늘 평온하고 또 늘 불안한데, 이 모든 게 책으로 제본이 되고 보니 일목요연하다는 식의 말을 던지며.

Posted by 돈오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