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는 일기를 쓴다… 여민지, 훈련 내용·반성과 각오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
  • 입력:2010.09.30 18:05
  • 트위터로 퍼가기
  • 싸이월드 공감
  •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그저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하나의 선수 정도로 만족한다면 너는 여기에서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대팀에게 악몽과 같은 선수가 되어라.… 돌아가는 버스 안을 싸늘한 침묵이 아닌 귀청 터질 듯한 자축의 노래로 넘치게 하는 자. 증오와 존경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자. 감히 막을 수도 없고 오직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자가 돼라. 모든 경기 매 순간마다 너의 존재를 각인시켜라. 오늘도 내일도 훈련 중에도.’ (2009년 9월 21일 축구선수 여민지의 일기)

2010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에서 8골을 터뜨리며 첫 우승컵과 골든부트(득점왕), 골든볼(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쥔 여민지(17·함안대산고2).

“박지성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 축구일기를 썼다”는 소녀의 방에는 ‘롤 모델’ 박지성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2007년 10월엔 영국에 가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의 환호 속에 그라운드를 누비는 박지성을 지켜봤다. 여민지는 그때부터 세계무대에 매료됐다. 키 1m60의 작은 소녀는 지름 21.7㎝ 축구공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다.

꿈꾸는 아이… 절제와 평정심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이 잠에서 깬다. 가젤은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깬다. 사자는 가젤을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네가 사자이든 가젤이든 마찬가지다. 해가 떠오르면 달려야 한다.’(2006년 12월 11일)

성공에 대한 갈증과 긍정적인 사고는 여민지의 일기를 붉은 희망으로 물들였다. 2008년 4월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돼 10개월간 입원 생활을 했을 때도 다들 예전 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고 했지만 자기개발서 ‘꿈꾸는 다락방’이나 ‘탈무드’를 읽으며 마음을 다졌다.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여민지는 일상에서도 그랬다.

“제가 가끔씩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딸이 저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해요. 말처럼 된다고. 저한테는 늘 의지하고 싶은 어른스러운 딸이에요, 민지가.” 지난 27일 경남 김해시 장유면 자택에서 만난 어머니 임수영(41)씨는 “엄마인 내가 오히려 배울 구석이 많은 아이”라고 했다.

여민지의 일기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새벽, 오전, 오후 훈련 내용을 간략히 적고 그날 배운 기술을 그림과 글로 복습한다. 여기에 경기 분석, 개선 사항, 반성, 각오를 덧붙였다. 선수 자신의 몸만 인지할 수 있는 ‘운동 기억’을 문자로 객관화한 것이다.

‘볼을 받기 전에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다. (거리를) 체크하면서, 끌어내면서, 공간에 툭 치고 나오면서라든지. 그리고 스트라이커끼리의 간격이 10∼13m 돼야 스위칭도 자주 할 수 있고 2명이 패스를 주고받을 수 있다.’(2006년 4월 20일)

여민지는 독했다. ‘선수는 매 경기마다 악착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선배 언니들은 살살하라고 한다.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선후배가 없는데 말이다. 나는 살살하지 않을 거다. ☆노력하는 자만이 인정을 받고 그 대가를 얻을 수 있다.☆’ 2006년 2월 9일 이런 내용을 일기장에 쓴 중학교 1학년 소녀는 늘 또래에서 선두를 달렸고, 그래서 때로 외로웠다. 어린 여자 선수들끼리 함께 생활하는 중에 어떻게 갈등이 없었겠는가. 그는 이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주중에 합숙하고 주말에 집에 와서도 축구단에서 생긴 안 좋은 이야기는 잘 안 해요. 한참 시간이 지나고 저 혼자 마음 정리가 돼야 말을 하더라고요. 제 딴에는 엄마한테 말하는 게 고자질이라고 느꼈나 봐요. 축구 엄마들 중에서 그래서 제가 젤 정보가 늦어요.”

1등이 가져다주는 부담감과 견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일기장에는 자만심을 절제하는 문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금 민지가 떠도 이것도 붐이잖아요. 남들이 어떤 선수가 한물갔네 이런 말 쉽게 해도 저는 선수 엄마라 그런지 다른 선수 평가를 함부로 못해요. 민지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바람 들어갔다’예요. 열네 살 때 ‘19세 이하 여자대표팀’에 역대 최연소로 발탁됐을 때도 주위에서 일부러 애를 누르더라고요. 그때 애가 속상해서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남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일기장에 적었어요.”

U-20 여자월드컵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끈 공격수 지소연(19·한양여대)을 돌파력과 스피드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작 축구장을 떠나면 별명이 ‘거북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 6권에도 흘려 쓴 글씨체가 없다. 평정심(平靜心)은 여민지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인터뷰 중에 엄마의 전화벨이 울렸다. “딸 어디야? 뉴욕? 너네 여기 오면 좀 시끄러울 텐데. 벌써 떨려? 거기서는 안 그런데? 민지 보면 엄마 눈물 날 것 같다….” 일본과의 결승전 경기가 끝난 지 24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걸려온 첫 연락. “원래 민지가 이래요.” 전화를 끊은 임씨가 찡긋 웃었다.

박찬호 이청용 김연아의 공통분모

“그건 마치 초등학생이 일기를 지속적으로 쓰기 힘든 것과 같은 겁니다. 누구나 해 보면 좋다는 걸 알지만 대다수 선수가 일기를 쓰는 건 아니에요. 지속적인 일기와 메모가 스포츠 선수들의 정신 건강을 향상시킨다는 건 어떤 심포지엄에서도 이견이 없어요. 하지만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죠.”

중앙대 용산병원 한덕현 교수(스포츠정신의학)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계속적인 마음의 외침”이 일기 쓰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소망을 글로 써서 확인하는 가운데 자신감이 바이러스처럼 온몸에 퍼진다는 것이다.

축구선수 이청용, 피겨여왕 김연아, 마라토너 황영조, 체조스타 신수지. 이들의 공통분모는 지속적인 일기와 메모다. 일기는 경기력 향상에도 기여한다.

“프로선수들은 실력이 정점에 도달했거나 남에게 더 배울 게 없는 경우도 꽤 있어요. 운동할 때 자기만의 법칙, 잘될 때의 동작, 근육 느낌을 일기에 쓰면 운동 감각은 사라지더라도 기록으로는 남는 거죠. 시합 전에 훈련 과정이 적힌 일지를 보면서 ‘훈련에서 오는 자신감’도 갖게 됩니다.”(인하대 체육교육과 김병준 교수)

박지성의 뒤를 이을 차세대 축구 스타 이청용(22·볼턴 원더러스)도 15세 때부터 축구 일기를 썼다. 그는 훈련 내용을 색색의 볼펜으로 그리면서 암기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중시했다. ‘올 시즌 좋은 일이 많을지 나쁜 일이 많을지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 같다’(2008년 1월 26일) ‘모든 준비는 끝난 것 같다.절대 자만하지 말고 무조건 열심히만 하자’(같은 해 2월 18일)…. ‘영리한 플레이’ ‘남보다 반 박자 빠른 속도’는 이청용이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면서 얻어낸 결과다.

한국인 최초로 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37)도 일기를 쓴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으며 ‘국민 영웅’이 됐던 박찬호. 2002년 이후 부진을 거듭한 그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면서도 절대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여민지와 이청용의 일기가 성공의 지렛대라면 박찬호의 일기는 인생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심리적 건강, 그 자체다.

‘애린아 안녕! 아빠는 지금 스프링 캠프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가고 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아빠에게는 기회와 설자리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간다. 아빠의 목표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도전 속에서 아빠는 더욱 강해지고 야구선수로서 더 성숙되어 있을 거야.’(2008년 2월 12일)

‘내 인생에는 불행은 없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은 분명 집착이다. 집착이 없다면 평화만이 있고 평화로운 삶은 행복이다. 어려움도 고통도 힘겨움도 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의해 느껴지는 착각일 것이다.’(2010년 9월 13일)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에게 추락은 인생의 패배나 마찬가지다. 박찬호의 일기장은 그러나 상처와 실패, 방황을 완충하는 장소다.

둔한 필기가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 - 둔필승총(鈍筆勝聰)

메모의 매력은 비단 스포츠 선수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메모 달인들’ 저자인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은 사자성어 ‘둔필승총’으로 메모의 힘을 설명한다. 둔한 필기가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디슨, 링컨, 잭 웰치, 김대중 전 대통령, 안철수 카이스트 교수(안철수연구소 전 대표)도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성공은 품 안의 작은 메모지와 필기구가 함께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아이폰으로 어느 때든 정보를 검색하고 저장할 수 있는 ‘앱 시대’에도 최 소장은 메모야말로 필수 생존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지금의 정보는 인터넷에 공개돼 사회적 자원이 돼 있어 접근은 용이해요. 하지만 자기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중간적인 작업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메모라는 거죠. 축구 야구 스타가 경험한 내용에는 자신만의 노하우, 지적 자산이 담겨 있는 것이고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땀이 있 는 정보예요. 정보 과잉 시대일수록 지혜를 자기화하는 작업, 그게 바로 메모죠.”

메모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근원지이기도 하다. “투수의 볼을 한 시즌 두 시즌 적다 보면 특정 선수의 투구 한계 수치가 나옵니다. 몇 개까지는 초속이 몇 ㎞가 나오는데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다운되는 선수도 있을 거고, 전혀 변함 없는 선수도 있겠죠. 선수들을 관리하는 면에 있어서도 메모는 필수입니다.” “잘 던지는 투수는 110개의 투구를 거의 모두 복기해야 한다‘는 것이 넥센 김시진(52) 감독의 야구 철학이다.

다빈치의 그림도 메모에서 비롯됐다. 그는 30년간 기하학, 건축, 인체 원리를 수천장의 메모지에 정리하며 신체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의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호기심은 다빈치를 천재 화가에 이르게 했다.

순간순간 지나가는 기억들을 흘러 버리지 않고 저수지에 모아 놓는 ‘메모’는 곧 창조적 지식으로 변할 괴력의 에너지이다.

김해=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Posted by 돈오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