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0세에 3번 이직한 안태양(31)씨. 경로가 독특하다. 회사를 창업해 CEO로 출발했다가, 중국기업 본부장으로 이직했다. 이후 국내기업 과장으로 또 옮겼다.
얼핏 시련의 역사 같지만, 사정 모르고 하는 소리다. 2010년 마닐라 야시장에서 동생 안찬양(29)씨와 함께 떡볶이를 팔기 시작했다. '서울시스터즈'. 창업 3년만에 월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당시 필리핀 1인당 국민소득은 2790달러(313만원). 필리핀 방송∙신문∙잡지가 앞다퉈 안씨 자매를 취재했다.
월 매출 1억원을 달성한 그 해에 사업을 접었다. 중국계 대기업 GNP 트레이딩에 들어갔다. '케이펍 비비큐' 등 한국 음식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다. 잘 나간다. 3개 매장 모두 하루 매출 1000만원을 내고 있다.
성공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명함엔 '죠스푸드' 과장이 찍혀 있다. 왜 직급을 낮춰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안씨를 만났다.


◇죽다 살아나 결심, "돈을 벌자"
고3 때 부모님 이혼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약대에 가고 싶었지만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서울여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적성에 안맞아 재미가 없더라고요.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 아르바이트 하느라 더 집중하지 못했구요. 성적이 좋을리 없죠. 올 F를 받은 적도 있어요.”
2008년 8월, 아르바이트로 모은 300만원을 들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명목은 어학연수. 하지만 도피에 가까웠다. 한국만 떠나면 인생이 잘 풀릴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연말까지 4개월 간 술에 의지하며 살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쓰러졌다. 스트레스와 영양실조.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돈부터 벌기로 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필리핀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2년 동안 한인 학생을 대상으로 과외를 했다. 한달에 200만~30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다. 사업을 해보기로 한 것.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동생을 필리핀으로 불렀다. 수중의 자금은 300만원. 가게를 내는 건 어려웠다. “가진 돈으로 인테리어 비용과 보증금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한꺼번에 3개월치를 내야 하는 월세도 부담이었구요."
매주 금요일 열리는 야시장에서 한국 대표 음식 떡볶이를 팔기로 했다. 2010년 3월 첫째 금요일 장사를 시작했다. 100인분을 준비해, 1인분에 2500원을 받았다. 하지만 팔린 건 고작 2인분. 쓰지 못한 식재료는 모두 버렸다. 그 후로도 한동안 매출은 1만원 언저리를 맴돌았다. 생계는 과외로 유지했다.
서러운 일도 많이 당했다. “15kg 가스레인지와 식재료를 들고 택시를 잡아 장에 갔어요. 기사에게 욕먹고 동생이랑 운 적도 있어요."


◇떡볶이 대신 김말이로 공략
장사 시작 후 3개월 째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장사’를 검색했다. 관련 책∙잡지∙사이트를 미친 듯이 읽었다.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떡볶이 99페소(2500원)’ 간판만 내걸었을 뿐, 가게 이름도 로고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쳤다. 한국인이 직접 판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서울시스터즈’라 이름 지었다. 디자이너를 고용해 캐릭터도 만들었다.
장터를 지나는 행인에게 떡볶이를 나눠주며 맛을 평가해달라 부탁했다. 아이템을 잘못 선정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떡볶이가 현지인들이 싫어하는 요소를 다 갖고 있더라구요. 쫄깃하고, 찐득거리고, 맵고, 뜨겁고. 한류가 한창일 때라 신기해 하며 먹긴 하는데 구매로 이어지진 않더라구요.”
떡볶이는 서울시스터즈를 상징하는 메뉴로 한정하기로 했다. 대신 김말이를 팔기 시작했다. 당면을 김으로 싸서 튀긴 김말이는 반응이 뜨거웠다. 손님에게 먹는 법과 재료를 설명하니 흥미가 배가됐다. 장사 시작 후 6개월 째 하루 매출 100만원을 넘겼다.
이제 남은 건 원가 관리. 수익성을 올리려면 지속적으로 낮춰야 한다. “한국 슈퍼에서 떡을 사면 개당 200원 꼴이에요. 1인분에 떡이 10개만 들어가도 2000원이죠. 여기에 야시장 하루 임대료가 13만원. 전기∙수도세는 별도예요. 현지 기준으로 비싼 값에 팔아도 남는 게 없었어요.”
한국에서 도매가로 재료를 수입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무작정 한인 슈퍼 앞에서 도매업자를 기다렸다. 제품 뒤에 있는 번호로 물류회사에 전화해 부탁도 해봤다. 하지만 구입 물량이 적어 계약을 맺기 어려웠다. 그래도 계속 연락했고, 어렵사리 계약을 따냈다. 떡 매입가를 50원까지로 떨어 트렸다.
안정적인 매출에 원가 부담 인하까지. 공격적인 점포 확장에 나서 2013년 7개까지 점포를 늘렸다. 2곳은 일주일 내내, 나머지는 2일간 영업했다. 배달·출장 서비스로 사업을 확대했다. 그렇게 한 달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잘 나가던 장사접고 회사원 된 이유
사업이 성공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한국 음식을 맛보이고 싶은데 규모의 한계가 있었던 것. 장기적으로 떡볶이나 김말이가 얼마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구심도 들었다.
식품 대기업이 어떻게 일하는지 배우고 싶었다. 그때 중국 업체 'GNP 트레이딩'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한국 음식 프랜차이즈를 만들기 위해 '서울시스터즈'의 사업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업 인수와 함께 안씨 자매 모두에게 억대 연봉을 제안했다. "딱 필요할 때 좋은 제안을 받은거죠. 다만 서울시스터즈는 넘기지 않고 폐업했어요. 브랜드를 계속 보유하고 싶었거든요."
안씨는 신사업본부장, 동생은 총괄 셰프가 됐다. 성공적이었다. '케이펍 비비큐' 등 프랜차이즈를 새로 출시해 3개 매장을 냈다. 매장 모두 하루 매출 1000만원을 내고 있다.
◇한국에서 세계를 향해 도전
2016년으로 필리핀 생활 8년째. 삶은 몰라보게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허전증'이 다시 도졌다. '동남아에서 성공해봤자'라는 말도 들려왔다. 필리핀을 넘어 한국·미국에서도 성공하겠다는 꿈이 새로 생겼다.
3월부터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중앙대 외식최고경영자 과정을 들었다. 내로라하는 외식업계 대표들과 토론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눈빛·말투·손동작·걷는 태도까지 공부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만났어요.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강연에 쫓아 다니며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한 뒤. 정중히 만나달라 부탁했죠. 사업에 대한 제 견해를 담아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요." 이렇게 야놀자 이수진 대표, 주노헤어 강윤선 대표 등과 연을 맺었다. 페이스북 친구는 4000명을 넘는다.
7월 죠스푸드 나상균 대표로부터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죠스푸드는 작년 매출 1000억원을 달성했다. 국내에서 떡볶이로 성장했지만, 해외에선 새로운 음식으로 도전할 생각이라 했다.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나 대표의 정신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3주 전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죠스푸드 전략기획부 과장. 직함과 연봉이 모두 낮아졌다. "높은 직급으로 시작하면 조직문화를 해칠거라 생각했어요. 돈보다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중요했어요. 배우려고 들어왔기 때문에 직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브랜드 관리를 맡게 됐다. 죠스푸드가 해외에서 통할 수 있도록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다. "한국 요식업도 해외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맥도날드 같은 세계 1위 프랜차이즈를 만들고 싶습니다. "
예비 해외 창업가를 위한 멘토 역할도 할 계획이다. "필리핀은 중국이나 미국보다 창업하기 좋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국 음식이 많거든요. 하지만 법과 제도, 문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실패해요. 잘된다 싶으면 중국 기업이 바로 베끼고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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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더라도 고아원 후원은 끊지 마세요.”

27일 오전 1시, 90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구봉서(서울 예능교회·사진) 원로장로가 유언으로 부인 정계순(78) 권사에게 남긴 말이다.

고인은 바쁜 연예인 생활 중에도 남몰래 고아원과 정신지체 아이들을 후원해 왔다. 특히 경북 문경의 사회복지법인 신망애육원을 1979년부터 37년째 후원하고 있다. 신망애육원 황영일 이사장은 “구 장로님이 37년째 매달 후원을 해왔다”며 “빈소에 가서 사모님을 뵀는데 ‘내가 죽더라도 후원을 계속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단독] 구봉서 “내가 죽더라도 후원 끊지 말라” 유언© Copyright@국민일보 [단독] 구봉서 “내가 죽더라도 후원 끊지 말라” 유언

신망애육원은 54년 5월 5일 12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개원했다. 설립자인 고 황용석 장로는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를 교훈으로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마음과 강건한 신앙심을 길러주었다. 지금까지 80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양육돼 목회자를 비롯해 교수, 박사 등 건강한 사회인으로 배출됐다. 현재 60명의 원생들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 고인은 이 고아원을 수차례 방문해 아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고인은 70년대 중반 고(故) 하용조 목사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후 연예인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 설립을 도왔다. 동료 기독연예인과 연예계 복음화에도 힘썼다. 틈틈이 해외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6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45년 대동상고를 졸업한 직후 태평양악극단 악사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TV 코미디 프로그램은 물론 400여편의 영화, 980여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69년부터 85년까지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해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곽규석 배삼룡 서영춘 김희갑 등과 함께 60∼70년대 한국 코미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한국 코미디계 발전에 일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포장, 옥관문화훈장에 이어 2000년 MBC 코미디언부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발전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56년 ‘애정파도’를 시작으로 ‘오부자’ ‘부전자전’ ‘맹진사댁 경사’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대히트작인 ‘오부자’에 막둥이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평생 ‘막둥이’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다.

구 장로는 2009년 1월 자택 욕실에서 넘어져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뒤 뇌수술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 신장 투석을 하러 병원에 다녔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명예집행위원장 전유성씨는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못살고 추웠던 시절에 서민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코미디 덕분이었다”면서 “큰 기둥을 잃은 것 같아서 정말 마음이 굉장히 힘들다”고 애도했다.

장례식장은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이다. 발인은 29일 오전 6시,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이다.

조경이 기자 rooke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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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수여식서 김인권 여수애양병원장 연설…학·석·박사 2천428명 졸업

서울대는 29일 오전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에서 제70회 추기 학위수여식을 열었다.

학사 851명, 석사 1천명, 박사 577명 등 총 2천428명이 학위를 받았다.

© Yonhap News Agency

성낙인 총장은 졸업생들에게 밝은 영혼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선한 인재'가 될 것을 당부했다.

성 총장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성과지상주의가 팽배해 있어 사회적 양극화와 계층 간 갈등이 날로 심화하고 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에 기초해 공동체적 가치를 사회전체의 기본 가치로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 총장은 이어 "졸업생들이 국경을 넘어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창출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기를 당부한다"며 "따뜻한 감성, 충실한 지식, 창조적 지혜를 통해 우리사회와 지구촌의 문제들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해달라"고 당부했다.

서울대 의대를 1975년 졸업한 후 40년 가까이 소록도병원, 여수애양병원에서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해온 김인권 애양병원 명예원장은 이날 축사 연사로 나서 앞으로 진로를 선택할 후배들에게 값진 조언을 나눴다.

김 원장은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 때 재상 손숙오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며 "누구나 생각하는 좋은 직장은 경쟁이 치열하고 상하 수직관계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어 여러분의 존재감을 나타내기가 무척 어렵다"며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말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서는 어떤 직장에 들어가면 무조건 열심히 일하라고 조언했다.

김 원장은 "여러분은 각자가 유일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며 "잘 안풀리고 때로 실망하고 좌절하더라도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내가 동요없이 30여년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곳에서 봉직하게 된 제일 큰 힘은 이 선택을 내 자신이 했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라며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끄는대로 결정하라"고 조언했다.

졸업생 대표로는 봉사단체 나눔실천단 단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외에서 다양한 공헌활동을 해온 최교윤(산업공학과·12학번)씨가 선정됐다.

(서울=연합뉴스) 채새롬 기자 srch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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